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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볼트의 선물 - 1976 퓰리처상 수상작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44
솔 벨로 지음, 전수용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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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솔 벨로. 솔 벨로는 처음에 <오기 마치의 모험>을 읽고 얼마나 학을 떼었는지 곧바로 읽을 생각으로 함께 사 둔 <허조그>를 다섯 달 동안이나 먼지만 쌓게 만들었던 적이 있다. 그랬다가 <허조그>가 참 재미있어서 원래 계획에 의하면 다시는 쳐다보지도 않을 솔 벨로를 연달아 찾게 만들었지 뭐야? <비의 왕 헨더슨>과 <오늘을 잡아라>. 그리고 눈에 띄기만 하면 솔 벨로는 무조건 읽겠다고 작심까지 했다. 그러다가 문학동네에서 이 책을 다시 찍었다는 얘기를 들었으니 어찌 망설임이 있을 수 있었을까? 그대로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해 첫빠따로 읽었다. 어휴, 솔 벨로의 거침없는 수다라니. 즐겁게 지긋지긋한 사흘 반이었다.
솔 벨로의 입심은 초장부터 현란하다. 극을 견인하는 등장인물은 화자 ‘나’ 찰스 시트린, 유대 이름으로 처키 치트린. 위스콘신 촌놈으로 대학에 다니다가 1930년대에 혜성처럼 등단한 20세기 첫 번째 아방가르드 작가 폰 험볼트 플라이셔의 담시집을 읽고 홀딱 반해 무작정 그를 만나기 위해 뉴욕에 가 주당 3달러짜리 방에 머물며 ‘풀러’라는 선술집에 일자리를 얻은 인물이다. 세월은 무상한 것이라 1940년대 후반에 이르면 과작의 시인 험볼트의 명성은 점점 작아지다 결국 달팽이 지나간 길처럼 어느새 자취도 없어진 반면 ‘나’ 찰스 시트린은 50년대 들어 연극과 영화 버전으로 크게 히트한 <폰트렌크> 덕택에 큰 돈을 만지게 되었다. 험볼트가 이 꼴을 보니 “배알이 뒤틀릴” 수준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심기가 좀 불편하지 않았을까? 자기하고 한 번 말이나 해볼 생각으로 뉴욕으로 왔던 꼬맹이가 이리 크게 성공했으니. 게다가 점점 조증과 울증의 교차 공격을 받기 시작한 험볼트는 이렇게 꼬아댄다.
“찰리 시틀린을 봐. 위스콘신주 메디슨에서 와서 우리집 문을 두드렸지. 그런데 이젠 백만장자가 됐어. 대체 어떤 작가 어떤 지성인이 그런 큰돈을 벌겠나? 케인스? 그래. 케인스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이지. 경제학 천재에다 블룸즈버리의 왕자였지.” 험볼트가 말했다. “그는 러시아 발레리나와 결혼했어. 돈은 따라왔고. 그런데 시트린이 대체 뭐라고 그렇게 부자가 됐나? 우리는 가까운 사이였어. 그런데 그 친구는 어딘가 좀 꼬인 데가 있어. 그렇게 돈을 벌었는데 왜 구석에 틀어박혀 지내? 시카고에는 왜 간 거야? 정체가 밝혀질까봐 겁이 난 거겠지.” (p.8~p.9)
험볼트는 원래 뭐든 다 가진 남자였다. 금발의 미남이고 체구가 크며, 진지하고, 재치있고, 박식한 인물. 헝가리계 유대인 이민자 아버지가 사업에 성공해 큰 부자였으나 대공황을 만나 가진 것 모두를 파산하고 얼마 안 지나 심근경색으로 급사하는 바람에 갑자기 맨땅에 처박히긴 했지만. 천재적인 문학적, 시적 영감으로 적어 나간 담시가 공전의 히트를 해 시대의 총아로 부상한 거였다. 그는 ‘나’ 찰스, 찰리를 “꽤 잘 생긴 친구, 좀 약은 편이고 일찍 대머리가 될 것 같은데 감정이 풍부해서 문학을 사랑하고 감수성이 있는” 젊은이로 사람들에게 소개하며 잡지에 서평을 쓰는 일자리를 구해주기도 했다.
그의 전성기는 10년 정도로 끝났다. 원래 작품 수가 많지 않은 과작의 시인이라는 한계를 결국 극복하지 못하고 소수의 전문가들 사이에서 인정받다가 그것으로 종 친 예술가. 그는 1940년대 말부터 망가지기 시작한 반면, ‘나’는 50년대 초에 큰 돈을 벌게 되어, 험볼트는 바로 이 돈 때문에 ‘나’에게 반감을 갖게 된 거였다. 게다가 말년에 접어들어 엄청난 우울감에 시달려 결국 정신병원을 들락거릴 수밖에 없었는데, 들락거렸다는 건, 들어가 있을 때가 있고, 나와 있을 때가 있다는 말인 즉, 병원 밖에 있을 때는 꼭 ‘나’와, 정작 ‘나’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백만달러의 재산을 신랄하게 야유하는 것에서 재미를 찾았다. 그러니까 ‘나’의 입장에서 험볼트를 정의하자면, 예전에 신세를 진 적 있지만 이젠 완전히 “진상”이다, 진상. 그렇다고 내놓고 막 대할 수도 없는. 대강 이해 가시지?
인간이 망가지면 참으로 다양한 방면으로 망가지는 것이 보통이다. 험볼트도 예외가 아니다. 일찍이 미국의 빈민가에서 안티 크리스트가 뛰쳐나오리라 생각한 미국 문학계에서 험볼트가 나타나 신사처럼 행동하고 매력적인 작품을 쏟아내 콘래드 에이킨, TS 엘리엇, 아이비 윈터스 등이 호평을 받았던 시절엔 생각지도 못할 망나니가 되어 버렸다. ‘나’의 작품 <폰 트렌크>의 연극 공연장 앞에 자신의 후원자 다수와 피켓에 머큐로크롬으로 붉게 “이 연극의 원작자는 배신자다!”라고 쓴 채 연좌농성을 하기도 하고, 친구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몸집이 크고 피부가 희면서 아름다운 아내 캐슬린을 윽박질러 파티가 끝나기도 전에 퇴장한 것까지는 그럴 수 있지만, 차를 몰고 오다가 핸들을 잡지 않은 팔을 휘둘러 캐슬린의 눈두덩을 시퍼렇게 염색시키는 지경까지 갔으니, 이걸 어쩔꼬? 며칠 후, 캐슬린은 프랑스 제과점에 간다고 나가서 다시는 험볼트의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텍사스 시골로 가서 티글리 씨와 재혼해 살다가, 두번째 남편이 죽고나서야 다시 ‘나’와 상봉을 할 때는 이미 험볼트도 세상에 없었다.
뉴욕에 도착해 오전에 재비츠 상원의원,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과 함께 해안경비대 헬리콥터를 타고 뉴욕 상공을 비행해 센트럴파크 태번온더그린에서 열린 정치인 오찬에 참석했다가 밖으로 걸어나온 ‘나’는 우연히 그를 본다. 벨라스코 극장의 모퉁이를 돌면 바로 나오는, 거의 허물어지는 수준의 일스컴 호텔 앞에서 허름한 옷을 입은 험볼트의 얼굴에는 이미 죽음의 기색이 완연했다. 그는 ‘나’를 보지 못한 채 병들고 지저분한 행색으로 막대형 프리첼을 점심으로 먹고 있었다. ‘나’는 주차된 차 뒤에 숨어 그를 지켜보았고, 결코 다가가지 않았으며 곧 자리를 떴다. 다음날 아침 ‘나’가 사는 시카고행 727 제트기 안에서 <타임스>에 실린 험볼트 사망 기사를 읽었다. 그는 새벽 세 시쯤 쓰레기통을 비우러 나가다가 엘리베이터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었으며 곧바로 시city의 시체안치소에 들어갔는데, 안치소에 시poetry 읽는 사람이 없는 바람에 무연고자 신분으로 안치되었다.
마지막 날 험볼트를 본 일, 이건 ‘나’ 찰스 시트린에게 작지 않은 회한을 주지만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니 그냥 넘어가자.
근데, 솔 벨로의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 가운데, 혹시 정상적으로 이것저것 부부간에 서로 사랑하고, 사랑하는 것보다 더 많이 인내해서 짜증나는 일 참아가며 보통 사람처럼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사는 커플을 혹시 보신 분 계시면 거수.
‘나’ 찰리 시트린의 첫사랑은 나오미 루츠였다. 위스콘신 살 때 고등학교 동창생. 이때부터 찰리의 머리 구조는 보통의 고등학생들과 달라, 갑자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넘나들기 시작해 쾨슬러, 사르트르, 비트겐슈타인을 망라해버리니, 참 나, 이런데도 왕따를 당하지 않았다는 게 기적일만큼, 도무지 시내의 모든 고등학생과 교사를 통틀어도 찰리와 대화 가능한 인물을 구할 수 없었다는 전설이 있다. 찰리와 나오미는 그런 거 말고 나머지 부분에 관해서만큼은, 그러니까 1940년대 연애하는 하이틴이 겪는 모든 과정은 알뜰하게 밟아가며, 찰리는, 겁도 없이 나오미와 남은 생 전부를 보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으나, 나오미는 다른 남자를 골라 홀라당 결혼을 해버리고 말았다. 나중에 하마터면 죽음을 부를 수도 있었을 찰나에 기적적으로 나오미의 딸이 등장해 다시 연락이 닿아 만나 확인해본 바, 나오미는 구름 꼭대기쯤에서 내려오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오리무중의 언설을 도무지 견딜 수 없어, 평생 이런 이야기만 듣고 살다가는 나이 서른도 되기 전에 요실금이 올 거 같다는 공포에 휩쓸려 찰리가 뉴욕으로 험볼트를 보러 간 사이에 후딱 다른 남자와 결혼해버리고 만 거였다.
이어서 애칭 ‘데미’라 불리는 애나 뎀스터 퐁벨이라는 좋은 집안의 아가씨와 깊고 깊은 연애를 했다. 데미는 ‘나’가 <폰 트랜크>의 대성공이라는 기회를 얻어, 이제야 아버지에게 ‘나’를 남편감으로 소개할 수 있겠다 싶어 <폰 트랜크>의 기사나 화보 같은 걸 스크랩해서 당시 투자를 위해 베네수엘라에 출장계획이 있던 아버지와 함께 날아가다가, 그만 공중폭발로 부녀가 동시에 생을 접었다. ‘나’ 찰스는 당연히 시신이나마 찾고자 베네수엘라로 갔지만 아무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고, 그 사이에 언젠가 장난 비슷하게 교환했던 서로의 백지수표에 험볼트가 $6,763.58의 금액을 써넣고 이를 현금으로 찾아가버렸다. 당시 젊은 찰리 시트린에게는 어마어마한 돈이었음은 물론이다.
이후 험볼트가 평생에 걸쳐 악담을 할 만큼 큰 돈을 벌기 시작할 때, ‘나’ 찰리 시트린은 괜찮은 신교도 집안의 아가씨 데니즈와 혼인을 한다. 데니즈와의 사이에 딸 둘을 낳고 잘 사는 듯하다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솔 벨로의 주인공이라면 행복한 결혼생활을 포기해야 마땅한 전례를 따라 갈라섰는데, 데니즈는, 유대인 주제에 감히 나와 이혼을 하려고 해, 시카고에서 가장 지독한 변호사를 고용해 ‘나’의 전 재산을 홀딱 빨아버리려 한다. 실제로도 그렇다. 데니즈와 이혼 소송중에 새롭게 레나타라는 아들 하나 딸린 돌싱녀와 연애를 하고 있기는 하다. 근데 이 레나타는 ‘나’를 완전히 호구로 보고 있는 것 같다. 결혼을 하자고 몇 번 제의를 했지만‘나’ 찰리는 이혼소송이 완전히 다 끝나기 전까지 그러고 싶지 않은 거다. 그리고 사실 알고 보면 ‘나’가 거의 알거지 수준이라는 것도 밝히고 싶지 않다. 솔 벨로의 작품 속 남자들의 삶이 대부분 이렇다. 이걸 재미로 알아야지 뭐.
다시 첫 애인 나오미 루츠로 돌아가서, 사실 크게 볼 일 없는 나오미 루츠를 소환하는 이유는, 나오미가 찰리 시트린을 도무지 참아주지 못하고 다른 남자한테 시집가 버린 이유가 찰리의 과도한 현학성, 장황한 단어의 사용, 끝도 없는 주절거림 때문이다. 책을 읽어보면 정말로 실감난다. 얼마나 말이 많고, 쉬운 이야기를 어렵게 하려고 난리를 벌이는지. 나는 당연히 찰리보다 나오미와 비슷한 부류라서, 본문만 744쪽에 이르는 길고 긴 장편소설을 읽으며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경험도 했고, 속이 미식거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토리라인은 누가 솔 벨로 아니랄까봐 재미 만땅인데, 이제 다른 독자께 권하니, 벨로의 사변적 설레발쯤 아무것도 아닌 듯 견딜 수 있으면 가볍게 도전하시고, 아니면 약간의 허들 정도로 여겨 조금 각오를 하시든지, 그것도 아니면 일단 책을 사놓고, 언제든 내가 한 번은 읽고 만다, 날마다 새로운 마음을 가질 지표로 삼으시면 될 듯하다.
다른 거 다 빼고, 그러면 온 힘을 다해 세계 인텔리겐치아의 지도자가 되기를 추구했으며, 승리에 대한 분석을 믿었고, 시보다 ‘생각’을 선호했으며, 좀더 높은 문화적 가치를 지닌 하위 세계를 위해 우주 자체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던 폰 험볼트 플라이셔가 남긴 선물이 뭐냐고? 정말 선물이 있다. 이제 다른 건 몰라도 경제적으로 다 죽어가는 찰스 처키 시트린을 위한 인공호흡. 그게 뭔지는 안 알려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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