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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조율사
궈창성 지음, 문현선 옮김 / 민음사 / 2024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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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대에서 연극학을 공부해 박사학위를 받은 극작가. <남녀에 대한 게 아냐>를 쓰고 연출해 1990년에 “타임스 문학상” 연극부문 최우수상을 받았으니 이 정도면 대박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브로드웨이가 있는 뉴욕 한 가운데서 말이지. 이후 타이완으로 돌아온 64년 용띠 아저씨는 2003년 “유시 프로덕션 박물관有戱制作館”이라는 극단을 만들어 직접 연출가의 길을 걷는 한편 소설과 기타 산문도 꾸준하게 발표했다. 남들은 하나도 하기 힘든데 극작, 소설을 쓰는 명문 국립대만대학 외국어문학과 교수? 삼십대 시절에 더 이상 소설을 쓰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고, 정말로 십여 년 극작과 연출을 하다가 마음을 바꾸어 다시 소설도 쓰기 시작했단다.
중편소설. 기가 막히게 널럴한 편집으로 본문이 196페이지에 끝난다. 큼지막한 활자에 열아홉 줄로 한 페이지를 메꾼 바람에 반나절이면 다 읽을 수 있다. 이 책을 읽은 많은 독자가 “섬세하다” “아름답다” 같은 형용사를 발산한다. 맞는 말이지만 짧은 분량의 작품인 것을 감안하면 그리 돋보이지는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도 섬세, 감각, 아름다움으로만 치면 궈창성을 능가하는 작가 몇 명을 꼽는데 몇 초, 몇 분이면 충분할 듯. 극작, 즉 무대극을 쓰던 작가답게 독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대중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데 더 초점을 맞추면 좋겠다.
두 명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린쌍林桑. 3개월 전에 아내가 죽었다. 처음엔 피아노를 연주했다가 바이올린으로 전공을 바꾸어 유학까지 다녀온 20살 연하의 아내 에밀리가 운영해온 음악학원, 사실상 피아노 학원을 정리하기로 했다. 학원 사무실에 앉은 린쌍의 귀에 들리는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 3년 전, 성공한 사업가 출신인 린쌍은 결혼 1주년 기념으로 에밀리에게 바이올린 독주회를 열어 주기로 했다. 이야기를 들은 아내는 기뻐하면서 오직 단 한 명의 청중, 남편 린쌍을 위하여 바이올린으로 <보칼리제>를 연주해주고 레퍼토리에 넣기로 했다지만, 린쌍이 듣기에 곡이 처연해서 생전의 어머니를 연상시키니 연주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한 적이 있다. 그래서 연주 곡에는 들지 않았으나 린쌍의 머리에 박혀버린 곡이었다. 그런데 그 곡이 연주할 사람이 없는 2층 연습실에서 들려오고 있는 거였다.
음악학원의 문을 닫는 날 들려오는 피아노 연주. 하필이면 <보칼리제>. 린쌍의 귀에는 무거운 침잠이 아니라 ‘무게 잃은 공허함’으로 다가온다. 알아보니 피아노를 옮기기 전까지 자기 의무를 다하겠다고 마지막 날에도 찾아와 조율 중인 조율사가 연주하는 거다. 연주 실력이 뛰어나 교습을 해보라는 권유를 거절하고 시간당 1,500 위안의 저렴한 조율비에 만족하는 야구모자를 쓴 남자. 그는 에밀리가 결혼하면서 가져온 뵈젠도르퍼 업라이트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눈에 힘줘서 다시 소리내 읽어보시라.
“뵈젠도르퍼.”
음악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여러 작품 속에 잘난 척하고 싶은 작가들이 입 밖으로 내는 피아노는 스타인웨이가 아니라 뵈젠도르퍼라는 걸 안다. 그걸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고, 마치 지나가며 얼핏 봤다는 듯이. 그래서 이 작품 <심금자尋琴者: 피아노를 찾는 사람>에서도 뵈젠도르퍼 그랜드 피아노 대신 업라이트가 나온다. 그랜드 피아노일 경우 3억에서 4억은 줘야, 하이엔드는 훨씬 더 많아야 살 수 있을 걸? 당연히 오스트리아 메이드 오리지널. 그러나 이제 야마하가 인수하는 바람에 일본 기업이 됐다. 야마하? 이 책에서도 나오듯이 피아노의 전설 가운데 한 명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가 말년에 전용 비슷하게 연주했던 브랜드이며 에밀리 어린 시절에 집에서 연습했던 악기다.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 역시 린쌍이 에밀리한테 결혼 기념으로 사준 것으로 음악학원이 아니라 저택 거실에 놓여 있다. 에밀리 생전에 조율사가 정기적으로 방문해서 조율을 해왔다. 다만 린쌍이 여태까지는 조율과 조율사에게 관심이 없어서 몰랐지만. 이렇게 세계 명품 피아노 3종 브랜드가 다 등장한다. 린쌍은 자수성가한 사업가. 자수성가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인색하다는 것. 그럼에도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를 선뜻 사 줄만큼 스무 살 어린, 그래도 서른여섯 살이었던 아내가 좋았다.
그렇다고 이걸 음악에 관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면 맞지 않다. 물론 음악 이야기가 들어 있다. 다만 음악 이야기를 곁들인 인생, 위에서 <보칼리제>를 듣는 린쌍의 감상처럼 인생의 “무게 잃은 공허감”을 주제로 하고 있(는 것 같)다. 음악은 <보칼리제>와 드뷔시의 <아라베스크>, 그리고 슈베르트의 D.954와 D.960 소나타 정도 말하고 있으며 작품 자체보다는 연주자, 조율사, 피아노라는 악기, 음악적 재능과 성공의 복잡한 연결고리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먼저 조율사가 작품을 연구해서 곡과 예정된 연주자의 특성/성향에 가장 알맞은 상태의 음색을 내도록 조율을 하면, 연주자는 조율사가 조정한 건반을 연주할 뿐이란다. 내가 알기로 연주자도 조율에 직접적으로 참여해서 자기가 원하는 음색이 나올 수 있게 조율사에게 요구한다. 물론 세계적으로 유명한 연주자의 전속 조율사 정도가 되면 굳이 연주자의 요구를 듣지 않더라도 자신이 만들어야 하는 조건을 알 수 있겠지만 하여간 그렇다.
작품에 등장하는 조율사는 이제 마흔세 살 정도의 젊지 않은 남자로 탈모증세가 심하고, 커다랗고 볼품없는 귀를 가졌으며, 얼굴엔 십대 시절을 휩쓸고 지나간 여드름 자국이 달 표면처럼 촘촘한 외모를 지녔으나, 음악적으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이제 자신의 재능에 대하여 누구도 관심을 두거나 거론하는 사람이 없어서 어떻게든 숨기고 싶어하는 비밀이 되고 말았지만. 이이는 어릴 적부터 음악 신동의 천성적 충분조건을 완전하게 갖추었다. 딱 한 가지, 가정 환경을 제외하고. 1958년 중국과의 진먼金門 포격전에서 한쪽 눈을 상실하고 현지 아가씨와 결혼해 3남2녀를 둔 아버지는 타이페이로 옮겨와 불법건물에서 만둣집을 운영했다. 그의 바람은 아들은 사관학교에, 딸은 사범전문학교에 들어가 학비 없이 괜찮은 직업을 갖게 하는 것이었던 바, 피아노 천재성이란 건 아버지 인생에 불효와 배반을 초래할 수 있는 위협으로 받아들였던 거다. 게다가 음악을 제외한 모든 과목은 평균 이하라서 야간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한 조율사는 어떻게 대학에 진학했지만 도중에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재능이 있는 인간 가운데도 소수만 그것으로 성공할 수 있는 거, 그게 인생이지.
조율사가 스타인웨이를 조율하기 위하여 린쌍의 집에 들락거릴 때 당연히 에밀리를 자주 보았고, 그리하여 말총머리를 한 남자친구도 본 적이 있었으나, 에밀리는 굳이 조율사를 경계하거나 회피하지 않았다. 마흔세 살이 되어도 결혼해본 적 없고, 여자가 있어본 적도 없는 조율사라고 해서 젊은 미인 에밀리에게 관심을 두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러나 췌장암에 걸려 지극한 고통 속에 숨을 거둔 에밀리를 여전히 그리워하는 린쌍을 보면서, 과연 린쌍도 자기 전처의 사생활을 알고 있었을까 궁금했다.
이제 사업을 모두 접고 여유있는 말년을 즐길 수도 있는 린쌍은, 조율사의 훌륭한 솜씨와 뵈젠도르퍼와 스타인웨이에 얽힌 추억에 휩싸여 타이완에서의 중고 유명 피아노 판매 사업을 도모한다. 그리고 거의 즉각 조율사를 사업의 파트너로 채용해 일단 월급부터 지급해버린다. 그리고 훌쩍 뉴욕으로 떠난 두 남자. 볼품없는 조율사와 달리 예순이 훌쩍 넘었지만 183센티미터의 키에 짙은 눈썹, 높은 코, 반짝이는 은발 곱슬머리를 가진 린쌍은 뉴욕에서도 에밀리와의 추억이 있었으며, 후회만 절절하게 하게 만든 6년의 결혼생활 끝에 이혼한 전처와 온몸에 문신을 그린 무능력한 아들과 이제 반년도 남지 않은 삶만 부여받은 암환자인 전처의 남편이 있었다. 그리고 린쌍, 그가 아는지 모르는지 조율사는 감도 잡히지 않는 말총머리의 남자도.
그렇게 사는 거지. 알면 뭐하고, 모른다고 한들 어쩌랴. 해는 저물고, 바람 불고, 눈보라도 치는 이역만리의 땅 뉴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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