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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영사 ㅣ 문지 스펙트럼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최윤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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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걷는다 라고 피터 모르간은 쓴다.
어떻게 하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 있을까. 길을 잃어야 한다. 모르겠다. 네가 배우게 되겠지. 나는 길을 잃기 위한 하나의 지표를 원한다. (<부영사>, 민음사. 최현무 역. 1984년 8월. p.5)
그녀는 걷는다, 피터 모건은 쓴다.
어떻게 하면 되돌아오지 않을 수 있을까? 길을 잃어야 해. 모르겠어. 배우게 되겠지. 나는 길을 잃었다는 걸 알려주는 표시를 원해요. (<부영사> 문학과지성사. 최윤 역. 2024년 3월. p.9)
“이데아총서” 17번으로 나온 <부영사>가 40년 전에 내가 읽은 우리나라 최초의 번역이다. 최현무 역의 금속활자본. 정말 많은 세월이 흘렀다. 2년 후인 1986년에 이용숙은 뒤라스의 중편소설 두 편이 실린 《길가의 작은 공원 / 아반 사바나 다빗》을, 김인환은 유명작이자 우리나라에서 출세작인 <연인>이 <애인>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중단편집 《복도에 앉은 남자》를 번역 출간했다. (<모데라토 칸타빌레>는 책장 저 속에 숨어 있나보다. 못 찾겠다.)
나는 이 책들을 각각 복학생과 사회초년생 신분으로 읽었는데, 그만 단번에 뒤라스에게 빠져버렸다. 이중에서도 특히 <부영사>. 뒤라스는 읽을 때마다 마음을 완전히 채워주는 포만감이 들지 않고 뭔가 놓쳐버린 듯한 기분이 들어, 읽은 후에, 눈을 뒤집고 찾아봐도 속을 털어놓을 책 좋아하는 인간은 없었지만, 누군가에게 뒤라스 독후를 이야기하기가 버거웠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 하여튼 <부영사> 초입을 더 읽어보자.
"수많은 경사지가 사방을 가로지르는 광대하게 펼쳐진 일종의 늪지대, 가장 적의에 차 있는 지평선의 한곳을 향해 그녀의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그녀는 그렇게 한다. 그녀는 여러 날을 걷고, 경사지를 따르고, 떠나며, 물을 건너고, 곧바로 나아가다가 좀더 멀리 있는 늪지대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그 늪지대를 가로지르고 또 다른 늪지대를 향해 떠난다. 여전히 톤레샤프의 평원, 여전히 그녀는 알아본다. 톤레샤프만 따라가면 절대 길을 잃지 않을 거야. 그녀는 엿새동안 걷는다. 배 속의 아이는 점점 더 심하게 움직거린다."
1984년 여름 이후, 뒤라스의 <부영사>를 읽은 다음부터 내게 똔레샵 호수와 메콩강은 로망이 되었다. 흐름이 눈에 보이지 않는 고요한 수면을 하고 있으나 흙이 섞인 물이 두려움을 주는 광대한 물의 벌판. 그러나 뒤라스의 거의 모든 것이 낯설었고 서걱거렸다. 하지만 매혹적이었고, 쉽지 않았다. 근 3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러 나는 결국 똔레샵 호수에 가볼 수 있었다. 빈 손을 벌리고 관광객을 쫓아오는 어린 아이들과, 쓰레기투성이인 호숫가와, 목에 커다란 뱀을 두른 채 ‘다라이’를 탄 꼬맹이들과, 무엇보다, 더럽고, 더럽고, 더러운 것들이 부유하는 호수 표면에 <부영사>고 뭐고 정이 뚝 떨어져버리고 말긴 했지만, 하여간 로망은 이루어져 버렸다. 한 세대가 지나서 그랬는지, 그만큼 내가 더 낡아져 그랬는지. 탓할 것은 세월 말고 없었다. 습지를 따라 걸어보지도 못했다. 외진 곳을 혼자 걷다 무슨 흉한 꼴을 당할지 누가 알랴 싶어. 현금 많이 가지고 다닌다고 소문이 난 코리언 아닌가 말이지.
40년의 세월이 결코 가볍지 않다. 나는 거의 새로운 책을 읽었다. 머리 속에 가지고 있던 조각들은 오직 하나, 애를 배고 만 십대 소녀가 가족한테 쫓겨나 톤레샤프 호숫가와 메콩강변을 따라 걷고 걷는 형상만 기억하고 있었다. 그랬을 뿐이었으면서도 무슨 셈법으로 뒤라스의 대표작을 이야기할 때면 <부영사>를 꼽았을까? 교만해서? 그럴 수도 있지. 되는 대로 막 뱉고 봐서? 그럴 수도 있고. 80년대 중순과 비교해 이제는 다양한 뒤라스가 시장에 나왔고, 독자층도 다양하다. 이를 두고 서강대 불문과 명예교수이자, 전 학과장이자, 천생 선생인 최현무, 필명 최윤은 “뒤라스의 작품 세계가 지닌 예외적∙변방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명성은 이제 세계적이 되었다. 다중적 해석을 허락하는 작품 세계와 점점 희박해지는 언어는 오독도 마다하지 않는 다양한 독자층을 만들어냈다. 명성과 이해가 정비례하지는 않는다.”라고 딱부러지게 지적했다. 일찍이 김치수, 김화영과 더불어 소위 프로방스 학파를 이루면서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누보로망을 소개한 최윤의 지적이니 틀림없을 것이다.
근데 몇 가지만 짚어보자. 그래도 뒤라스 깨나 읽었다고 생각하는데, 앞에서 말했듯이 이이의 작품은 서걱거리고 낯설어서 마음을 채우는 포만감을 느낄 수 없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 초기 작품인 <태평양을 막는 제방>을 읽게 되었고, 처음으로 친근하게 책을 읽으며 소위 별 다섯 개를 매길 수 있었다. 이어서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도. 왜 그럴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뒤라스의 연표를 보면 각각 1950년과 53년에 출간한 것들이다. 이에 반해 <부영사>는 1966년, <모데라토 칸타빌레>가 1958년, <아반, 사바나, 다비드>가 1970년, <복도에 앉은 남자>는 1980년이다. 비록 적장자는 아니지만 마르그리트 뒤라스 역시 누보로망 계열의 한 명으로 볼 수도 있는데 (보기도 하는데), 1950년대 후기 작품부터 선을 그어 그러지 않았나 싶다. 만일 이이의 후기작들을 누보로망이라고 하는 걸 허용한다면, 누보로망의 개념처럼 “근대소설의 반항으로의 신소설”답게 독자가 스스로 주어진 텍스트를 자신이 직접 조합하고 추리하는 적극적 읽기를 당연하게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 독자가 오독을 하든 말든, 작가 또는 역자가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내 의견이다. 믿지 마시라.
내게 뒤라스를 읽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가 쉼표의 사용이다. 문장 속에 자유로이 널려 있는 쉼표. 쉼표가 나올 때마다 호흡을 같이 하면서 나도 덩달아 한번 쉬고 이어 읽는 과정. 나는 이게 즐겁다. 예컨대 이런 문장들.
"그는 어린 시절 음악을 했었다고 말한 다음에, 좀더 분명한 어조로, 지방의 어느 학교로 전학하면서 피아노 수업이 중단되었다고 덧붙인 이후로는, 완전히 입을 다물고 있다. 그녀는 어느 학교였는지, 어느 지방이었는지, 이유가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녀는 그가 말하기를 바라는가?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때때로, 어느 저녁에는 그녀도, 그녀 역시, 이야기한다. 누구와? 무엇에 대해서?" (p. 138)
악보에는 쉼표가 있어도 그곳에서 숨을 쉬지 않고 다음 쉼표까지 갈 수만 있으면 그냥 건너 뛰어도 상관없다. 오히려 더 좋을 수 있다. 그러나 뒤라스는 그렇지 않다. 쉬라고 콤마를 찍어놓은 장소에서 독자는 작가와 함께 숨을 한 번 쉬는 편이 좋다. 무언가 리듬을 느낄 수도 있고, 앞뒤의 문맥을 더 잘 이해할 수도 있고, 쉬어서 오히려 더 강조하는 것임을 알아챌 수도 있다.
톤레샤프 호수가를 무작정 걷던 소녀는 길가에서 아이를 낳고, 낳은 아이를 백인한테 떠 맡기고, 영양실조에서 온 것이 틀림없이 머리카락이 다 빠진 상태에서 10년 넘어, 걸어, 걸어, 걸어서 인도의 캘커타에 도착한다. 프랑스 대사관 앞까지. 마음씨 고운 대사부인 안-마리 스트레테르가 문턱에 놓아주는 음식 찌꺼기를 동료 거지,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먹기 위하여. 이때 건물 안에 전 라호르 주재 프랑스 부영사가 있었다. 말이라고는 자기 고향인 듯한 “바탐방”이란 단어 말고는 한 마디도 하지 못하는 거지 여인이 갠지즈 강변의 캘커타까지 와서 부영사와 대사 부인과 어떤 관계를 만들었을까? 아무것도, 아무 관계도. 그것을 뒤라스는 쉼표가 가득한 문장으로 대답한다.
"그녀는 마치…… 긴 직선 끝의 한 점처럼, 실상 별다른 의미 없는 사건들 끝의 한 점처럼 캘커타에 있게 된 것일까? 거기에는…… 잠과 굶주림, 감정의 소멸, 인과관계의 소멸만이 있었던 것일까?
내 생각에 그 이상이야. 그녀가 사는 것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만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거야. 그녀 자신은 아무것도 느끼지 않아." (p.210)
이것이 무슨 애니그마인지, 나도 모르겠다. 이 책을 다 읽은 당신 생각이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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