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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게이하트 ㅣ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2
윌라 캐더 지음, 임슬애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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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라 캐더는 참 좋아하는 작가이다. <나의 안토니아>와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 이 딱 두 편으로 나는 단박에 이이의 팬이 되었다. 이후 캐더에게 퓰리처 상을 가져다준 <우리 중 하나>의 참혹한 번역서 때문에 완벽하게 맛이 가긴 했지만. 그래도 캐더의 <루시 게이하트>를 출간했다는 걸 알자마자 단박 구해 읽어야 했다. 역시 네브래스카. 광활한 무대. 대륙성 기후라서 여름엔 몹시 덥고 겨울에는 눈보라와 강추위가 엄습하는 엄혹한 벌판. 플랫 강이 흐르는 작은 마을 해버퍼드 중심가에서 1킬로미터쯤 떨어진 서쪽 끝자락에 시계수리공 게이하트 씨의 집이 있다. 1킬로미터는 한여름의 더위와 한겨울의 추위라면 다녀오기에 꽤 먼 거리라고 여긴다. 다만 딱 한 사람, 이 집의 둘째이자 막내딸인 루시 게이하트를 제외하고.
해버퍼드 중심가에 유난히 빨리 움직이는 점 하나. 그게 루시였다. 부단히 움직이는 작은 빛이자 둥지로 돌아가는 작은 새 루시는 금빛이 감도는 갈색 눈동자에 햇볕에 타서 까무잡잡한 피부, 그러나 붉은 작약처럼 색이 깊고 벨벳 같은 입술과 볼을 지녔으며, 직접적이고, 거침없고 유쾌한 성정을 가졌다. 친구들이 사랑한 것은 루시의 명랑과 기품, 앳되지만 아름다운 생명만이 누리는 독특한 광채였으리라.
루시의 아버지 게이하트 씨는 일리노이 밸빌의 독일인 마을에서 바이에른 출신 이민 부부의 아들로 출생했다. 독일인 후예답게 클라리넷과 플루트를 상당한 수준으로 연주할 줄 알았고 바이올린과 피아노도 교습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능숙했다. 결혼할 때 아내가 130만 제곱미터, 40만 평에 조금 못 미치는 농지를 가져와 처음부터 부농이랄 수 있었지만, 게이하트 씨는 아내가 세상을 뜨자마자 토담대, 토지담보대출을 받아 다른 토지를 구입해 이제는 두 땅 모두 저당 잡힌 상태였다. 부부는 맏딸 폴린을 낳고, 이어서 아들만 둘 낳았으나 일찍 여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낳은 딸이 루시인데 루시가 여섯 살 때 엄마가 세상을 떠서 열여덟 살의 폴린 언니가 엄마 대신 키웠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이 집의 가장 큰 문젯거리는 아버지 게이하트 씨. 속이 없는 양반이다. 천생 한량인데 미국에서도 저 벽촌에 속하는 네브래스카 시골의 작은 마을 해버퍼드에서 시계방을 운영한다. 땅 욕심은 왜 그리 많아 40만평도 모자라 담보 대출을 얻어 또 땅을 사놓고는, 농사일은 전혀 관계하지 않는다. 물론 자신도 복장이 편하지는 않겠지만 하여간 집안 살림과 농사, 루시 보살피는 일 몽땅 다 폴린이 맡아야 했다. 내가 윌라 캐더라면 루시 말고 폴린을 주인공으로 해도 두툼한 소설책 한 권은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라니까. 그러면 게이하트 씨는? 본업이 동네 음악대 대장 같다. 은판 사진 속 독일인 무명 시인 같은 외모로 염소 턱수염과 콧수염을 기르고, 지적이고 느긋한 녹갈색 눈을 한 게이하트 씨는 매일 한결같은 삶을 즐기며 생활한다. 적어도 그렇게 생활하려고 노력한다. 건강과 단순한 즐거움이 최고의 가치로, 푸른색과 금색이 섞인 음악대 유니폼에 가장 큰 만족감을 지니며. 나중에 나이 들어 음악대원들도 늙고 사라질 때부터는 새롭게 체스에 취미를 들여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는 인물. 이러니 토담대 대출받은 돈의 이자 갚느라 안달하는 것도 역시 맏딸 폴린의 몫이다. 폴린은 얼마나 속이 터졌을까? 엄마쪽을 닮아 짧은 몸에 짧은 팔다리, 그리고 바지런한 품성을 지닌 선한 여성이지만 어려서부터 아빠가 특히 좋아하는 음악적 재능을 타고난 루시한테 정을 몽땅 빼앗기면서도 동생을 자기 딸처럼 돌보며 살아야 했던 여성. 넘치는 질투를 타고났지만 덕성과 인내와 선함으로 덮어가며 평생을 숫처녀로 살다가 눈을 감은 우리의 폴린이, 나는 너무너무 불쌍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폴린이 그냥 그랬다는 거다. 세상이 다 그렇듯이 소설 역시 다 그런 거라서, 착하기만 하고 개성이 별로 없는 인간은 주인공으로 발탁하지 않는 법이거든.
본격적으로 루시 이야기를 해보자. 재능이 있어 피아노를 공부하기 위해 열여덟 살에 시카고로 유학을 갔다. 그러나 워낙 무사태평한 성격의 루시는 자기의 앞날을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고 음악은 그저 자연이 주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이며, 피아노를 배워 고향 해버퍼드로 돌아가 아버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돈벌이의 한 방편으로 생각할 뿐이었다. 이야기를 시작하는 1901년, 루시의 시카고 생활 세번째 크리스마스 연휴 막바지에 해버퍼드에서는 그러나 이야기가 좀 달라져 있었다. 두 달 전, 루시는 파울 아우어바흐 지도교수가 좋은 자리를 얻어주어 자신의 친구인 중년의 바리톤 가수 클레멘트 서배스천의 공연을 본 것. 서배스천은 연주회에서 연가곡 <백조의 노래>를 포함한 슈베르트를 노래했다. 앵콜을 사양하겠다는 안내에도 불구하고 그의 프랑스 친구들이 “클레망”을 연호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서배스천은 바이런 시의 <우리 둘은 작별했네>를 노래했다.
우리 둘은 작별했네
조용히 흐르는 눈물
마음이 둘로 부서졌네
오랫동안 이어질 이별
당신의 뺨은 창백하고 싸늘하네
차가운 입맞춤보다도
분명 그날이 예고해줬네
이 이별의 슬픔도
크리스마스 연휴가 끝나는 즉시 시카고로 돌아가야 한다. 클레멘트 서배스천 전담 반주자 제임스 목퍼드는 다리를 저는 장애인인데 골반뼈에 문제가 생겨 런던에서 몸을 돌보는 사이에 서배스천의 연습 반주자를 뽑는 일종의 오디션이 있어서. 아무리 그래도 루시는 어려서부터 마을에서 제일 잘 하는 사람 가운데 한 명으로 꼽혔던 겨울철 플랫 샛강 얼음판 위의 스케이트를 포기할 수 없다. 많은 청춘들 가운데 짐 하드윅과 선두를 형성해 힘차게 스케이트를 타는 루시 게이하트. 그러다가 하늘 같은 말이 끄는 썰매가 도착하고, 마을에서 이름난 부잣집의 성격도 인물도 반듯한 청년 헤리 고든이 등장해 스케이트 끈을 매더니 단박에 선두그룹에 합류한다. 눈치 채셨지? 어느새 저녁별이 내리고 저 먼 곳의 아득한 무언가를 향해 손을 뻗는 행복이 영원한 것일 듯한 분위기. 이럴 때 어울리는 디즈니 만화영화 주제곡 가사에 이런 것이 있다. “자, 입맞춰, 분위기가 좋잖아? 그래 그렇게 입을 맞춰요, 입맞춰!” 하지만 1901년이다. 혼인서약에 서명할 때까지는, 알지? 유학 3년이면 루시가 스물한 살, 해리 고든이 루시보다 여덟 살이 많다니까 스물아홉 살. 둘 다 완벽한 성인임에도.
해리는 삼십대를 앞에 두고 이제 반려를 찾아야 하는 단계. 오랫동안 주판알을 튕겨본 바, 작지만 해버퍼드의 유일한 은행 은행장의 아들이며 틀림없이 차기 은행장이 될 자신이 한낱 시계공의 딸과 결혼하는 건 사실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사업차 온갖 곳을 다니며 많은 여자를 만났지만 루시 같은 여자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 신중한 청년은 세인트조지프에 살며 지역에서 가장 유서 깊은 은행의 은행장의 딸인 스물여섯 살 먹은 해리엇 아크라이트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헤리엇은 서둘러 구속되기 싫다는 이유로 미혼을 유지하고 있었을 뿐, 만일 상대가 해리 고든이라면 언제든지 결혼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해리 고든이 미처 알지 못했지만 야무지게 재산을 관리하고 독립적인 생활을 즐길 줄 아는 미덕도 가지고 있었고. 그건 책의 막바지에 드러난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궁리해봐도 자신한테 깊은 찌릿함을 선사하는 여자는 교회의 쥐처럼 가난하고 여간해서 자기를 칭찬하려 하지 않는 루시뿐이라 결론을 내리고, 시카고로 돌아가 4월 중 뉴욕 오페라단이 시카고 순회공연을 하는 주에 일주일간 함께 오페라를 보자고 제의한다. 당연히 제의를 수락하는 루시.
그러나 루시에게는 1월 4일의 오디션이 기다리고 있었다. 심각한 표정을 한 다소 지쳐 보이는 눈의 남자. 바리톤이 자주 그러하듯 아주 큰 덩치. 키가 크고 퉁퉁하며 넓은 어깨를 한 시카고 사람. 지난 10월 공연을 보며 루시는 생의 진실을 알게 됐고, 사랑은 그저 말랑말랑한 감정이 아니라 비극의 동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루시는 서배스천을 통해 “새까만 물처럼 인간을 집어삼키는 열정을 발견”하고 말았다. 즉 세상이 공포와 위험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데, 이게 어떤 의미인 줄 짐작이 되지? 서른 몇 살의 나이를 초월한 점잖고, 예의바르며, 애틋하지만 경건한 사랑. 아뿔싸, 그러나 서배스천은 지난 10월의 공연에서, 부르지 않겠다는 앵콜곡을 노래하며 이미 이들 사이의 사랑이 어떻게 될 지 왕창 큰 복선으로 깔아놓았다. 이걸 놓치는 독자는 설마 없겠지?
그러면서도 “교회 쥐처럼 가난하고 칭찬하지 않는 루시”와 함께 서배스천이 공연을 떠난 4월의 한 주 동안 <아이다> <오텔로> <라 트라비아타> 그리고 <로엔그린>을 돈 한 푼 안 들이고 구경했으면서, 그것도 모자라 <로엔그린>을 본 날 비싼 레스토랑에 들어 아주 비싼 식사와 겁나게 비싼 와인을 따며 청혼하는 해리한테 퇴짜를 놓는 루시. 루시는 50대 중장년 유부남이자, 당대 최고의 지휘자이며 귀족인 로버트 레스터 경의 사위인 서배스천을 염두에 두고 “자신이 원하는데 차지하지 못할 것이 무어냐는 생각이 들”었었다. 이런. 그러면 비싼 오페라 네 편과, 식사와 와인은 거절을 했어야지, 쯧쯧. 설마 돈이 아까워 그러진 않았겠지만 해리는 홧김에, 나중에 해리 스스로 고백하듯, 정말로 홧김에 두 주만에 해이럿 아크라이트 양과 혼인을 맺고 고향 헤버퍼드 최고의 부자이며 유지로 말뚝을 박는다.
이야기는 낡았다. 이후 몇 가지 비극이 연속되면서 독자의 누선을 적신다. 틀림없이 신파극이며 상투적이다. 그럼에도 윌라 캐더가 그리는 대자연의 광경과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맺는 방식, 점잖고 기품있는 문제 풀이 같은 것은 상투적인 신파도 매우 근사하게 읽히게 만든다. <나의 안토니아>와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 이후 마음에 맞는 윌라 캐더를 읽었다는 거 하나로도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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