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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의 개들
우르스 비드머 지음, 정민영 옮김 / 연극과인간 / 2002년 1월
평점 :
1938년에 스위스의 바젤에서 번역일도 하는 고등학교 교사의 아들로 태어난 우어스 비드머Urs Widmer는 바젤과 몽펠리에 대학에서 불문학, 독문학, 역사를 전공하고, 1966년 전후 독일문학에 관한 논문으로 PhD를 취득한다. 희곡 쓰는 사람들은 대개 젊은 시절에 연극판에 뛰어들어 직접 연기를 하거나 스탭으로 참여하면서 희곡도 쓰기 시작하는데, 박사학위를 딴 인텔리겐치아가 1973년, 35세부터 희곡을 쓰기 시작하는 건 예외적이었다고 한다. 비드머는 희곡 말고도 장편과 단편 소설가와 에세이스트로도 이름을 알리고 있다. 나는 <정상의 개들>을 읽고 이이의 소설 작품 <어머니의 애인>을 보관함에 담아놓았다.
1996년 취리히의 노이마르크트 극장에서 초연한 <정상의 개들 Top Dogs>은, 1981년 바야흐로 대서양 건너 로널드 레이건 미합중국 대통령이 미국 항공 관제사 노조가 파업을 시작하자마자 네 시간 만에, 앞으로 48시간 안에 복귀하지 않으면 해고해버리고 재고용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해서 정말로 그렇게 한 사건과, 영국의 마거릿 대처가 법률 개정을 통해 노동조합의 숨통을 조이기 시작한 일을 기점으로 전개된, 신자유주의 경제가 만들어놓은 구조조정, 다운사이징, 인원 합리화의 명분으로 해고된 사람과 그 가족이 어떻게 피폐해졌는지 보여주고 있다.
근데 특이한 것은 이 피해고자들의 성분이다. 사실 구조조정의 와중에 직업을 잃는 사람들을 계급별 퍼센트로 보면 급여가 많은 저 높은 직책의 인물들이 하위직책자보다 많다. 물론 공장 가동중단의 이유로 일정 라인의 생산직 근로자 전원을 정리해고 하는 경우, 유통지점을 축소해서 버리기로 결정한 지점에서 일했던 판매원 전원이 일자리를 잃는 경우는 예외로 하면 그렇다는 얘기다. 상무나 전무, 부사장 자리 하나를 없애면 평직원 열 명 가까운, 때론 수십 명을 해고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으니 내가 사주라도 그렇게 하겠다. 물론 힘든 일은 상위 직급자가 먼저 한다는 명분도 세울 수 있어 사주 입장에선 일거양득이기도 하다. 이 극에 등장하는 피해고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이들도 보통의 회사원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 물론 말이 그렇다. 일례로 대기업의 중역으로 근무했다 하면, 경력과 스펙의 화려함과 범접하기 힘든 아우라, 게다가 여태까지 벌어놓은 돈을 다시 다방면에 걸쳐서, 토지, 아파트, 주식 등에 재투자해, 여생을 노동하지 않고도 편하게 지낼 수 있겠지만, 이런 사람은 극히 소수고, 중역이었다고 해도 꾸준하게 돈벌이를 하지 않으면 곤란한 지경에 빠질 보통의 인간, 여태까지 운이 좋아 남들보다 좀 더 잘 나갔던 인간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사람들의 제일 큰 공통점은, 자신이 무슨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특정 “대형” 프로젝트의 경우 자기가 없으면 안 될 줄 아는 착각에 빠져 있다는 거. 세상에 한 명 빠진다고 프로젝트가 돌아가지 않으면 그게 회사고 조직인가 말이지. 그래 일 년에 아홉 달을 터키 남부 건조한 지방의 댐 건설 현장에 파견 나가 말 안 듣는 현지인과 머리 터지게 다투면서 꾸역꾸역 일을 하고 있는 상무급 현장 소장을 하루는 취리히 본사 사장이 긴급 소환한다. 현장 소장은 음, 이제야 내 노고를 알아 본사근무를 명하려는 모양이구나, 벌컥벌컥 김치 국물 마시고 날아갔더니 사장이 임원회의를 하기 바로 전 회의실 출입문 앞에서 뒤로 돌아, 소장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그간 고생이 많았네, 소장도 알다시피 요새 회사가 많이 어려워, 세월이 80년대 같지가 않아, 자네한테 투입은 많이 하는데 기대한 만큼 성과는 나오지 않는다고 판단했네, 나도 이러고 싶지는 않지만 지금 해고해야겠어, 율리카에게 안부 전해주면 좋겠네, 라는 말과 함께 구두 해고당하는 거다. 소장은 당연히 임원회의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인사팀장하고 쥐꼬리 같은 퇴직조건에 관해 합의한 다음, 서류에 서명을 한 시간부터 20분 이내에 회사 차량과 법인카드와 사원증과 기타 회사와 관계된 모든 것을 반납한 후, 경비원과 함께 회사 정문 밖으로 나가서, 먼저 회사가 요청하지 않는 한 다시는, 건물 출입문 안으로는 들어올 수 있으되 회사 사무실이 있는 층의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가거나 사원증을 인식시키고 스테인리스 막대기를 덜컥덜컥 밀고 가야 하는 입구 안쪽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신분이 된다.
해고를 당해 이렇게 치욕스럽게 정문을 나서기 이전에, 먼저 사장을 찾아가,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덕분에 집 사고, 자식들 교육시키고,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그간 한 것도 없는데 먹고 살게 해주신 걸 은혜로 알겠습니다, 하면서 사장 보는 앞에서 사원증 풀어 책상에 휙 던지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장실을 나오는 로망, 당신은 꿈꿔본 적 없나? 이때 사장한테, 그만두면 될 거 아냐 새끼야, 이런 험한 얘기하면 안 된다. 점잖게, 어쩔 수 없이 너 같은 인간한테 이런 얘기한다는 걸 눈치 챌 수 있도록 멋있게 한 마디 해야 진짜 폼이 나는 거다. 이 책에 나오는 숱한 피해고자들 역시 어찌 이런 로망이 없었을까. 그러나 정말로 위 문단 같은 경우를 당하면, 건물 밖으로 나가는 계단에 앉아, 전임 상무, 전임 전무, 전임 부사장이 두 손으로 머리를 헝클인 모습을 하고 엉엉 운다. 아, 실제라면 진짜로 눈물을 흘리며 울지는 않겠지만 정말 공감이 간다. 여자는 모르겠고, 해고당한 남자. 원시인류도 마찬가지였다. 사냥하지 못하는 수컷의 비애라니. 나도 요새 아주 절감을 한다. 농담 같지? 정말이다. 밤에 잠도 길게 못 잔다.
이 책에서 브라게라는 남자는 해고를 당하니까, 아내가 아이 둘을 데리고 떠나버린다. 남편이라는 작자가 아직도 연간 30만 마르크를 벌어오는 줄 착각해 집안일도 돌보지 않고, 신문 보는데 말 시키지 말라고 하고, 모계사회로 변한 집구석에서 아직도 갑의 유세를 떨려하는 걸 도무지 눈꼴시어 못 보는 거다. 그렇다고 자기가 돈 벌어 남편 수발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남자여, 아니꼽게 생각하지 마시라. 사냥 능력 없는 수컷의 끝장은 언제나 그럴지니, 그러게 평소 주머니에 좀 있을 때 잘 하지 그랬어. 에휴. 나도 연습 좀 해보려고 지난주엔 일주일 동안, 때마침 아내가 과도에 손가락을 베는 바람에, 설거지를 도맡아 해봤다. 근데 이것도 우리사회의 문제다. 도대체가 말이지, 싱크대가 여성의 체형에 맞춰 설계가 되어 있는 바람에, 너무 낮다. 지나치게 낮다. 그래서 가뜩이나 별로 좋지 않은 허리가 끊어지는 줄 알았다. 다리 벌리고 서서 하면 된다고? 해봤다. 마찬가지다. 비단 싱크대뿐만이 아닐 것이다. 아직 내가 해보지 않아서 그렇지. 싱크대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일반 남자 키에 맞춰 만들면 안 될까? 키 작은 사람들은 발판 위에 올라서면 되니까. 뭐든 해결방법은 있는 거다. 다만 철학자들이 문제를 해석하려 할 뿐, 해결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지. 이거 헤겔이 한 말이다. 싱크대에서 헤겔을 들먹인다고 뭐라 하지 마시라. 어차피 인생인 걸.
브라게라는 중역은 해고를 당하자마자 스위스에서 카리브해로 가는 삼주짜리 크루즈 여행상품 가운데 최고 중의 최고 서비스를 선택해 떠났다. 태양, 모래, 짙푸른 물, 나이든 부자들의 젊디 젊은 애인들을 즐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해고가 아니면 언제 올 수 있을지 누가 아느냐고 주장하면서. 기운차게 크루즈 선박에 오른 브라게 씨는 3주 동안 최고급 스위트룸 안에서 면도 한 번 하지 않고, 방으로 배달되어 오는 밥도 죽지 않을 만큼만 여간해 먹지 않고, 술만 홀짝이며 날이면 날마다 어디다 하는지 국제전화만 하고 있었다. 스위트룸에서 송장 하나 치우는 거 아닌지 승무원은 물론이고 승객들도 궁금해 할 정도가 되면 그때야 겨우 한 번 얼굴을 비치는 브라게 씨는 3주일 후 몰라보게 초췌한 몰골을 하고 스위트룸에서 꼬질꼬질 때가 묻은 흰 와이셔츠에 수트만 걸치고 하선을 하고 만다.
전직 중역 뮐러의 꿈은 등산광인 사장하고 함께 등산을 가보는 거였다. 저 아이거 북벽 정상에 올라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정복의 희열을 느끼고 있을 사장을 슬쩍 떠밀어, 자유낙하를 하면서 불쑥 튀어나온 바위에 코끝이 살짝 걸려 몸에서 코가 제일 먼저 분리되고, 진공의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몸이 먼저, 떨어진 코가 뒤를 이어 추락하다가, 사장이 보기에 파랗고 파란 빙하가 자기한테 맹렬한 속도로 전진해오고, 이어서 퍽, 빙하와 몸이 만나는데 머리통이 먼저 닿아, 뭔가가 머리에서 흘러나온 상태를 만들고, 그 상태를 자기 눈으로 보고 싶어 한다.
대개 해고, 하면 집단 노동자가 대량으로 해고를 당하고 이에 굴하지 않는 노동자들이 서로 연대하여 고용인이라는 거악과 한판 대결을 펼칠 것을 기대할 터인데, 이런 면에서 <정상의 개들>은 깼다. 비록 공감하는 독자들은 별로 없겠지만 아이디어 하나는 기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