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로토닌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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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으로 쪼개지는 작고 하얀 타원형 알약, 캅토릭스.

  초창기에 보급된 항우울제 5-HT1 ’세로플렉스‘나 ’프로작‘은 혈액 내 세로토닌의 비율을 증가시키는 작용을 했으나, 2017년 캅톤 D-L이라는 새로운 세대의 항우울제는 위장 점막에서 생생된 세로토닌의 세포외 유출을 촉진시키는 작용을 했으며 약의 이름을 캅토릭스라고 했다. 이 약의 달갑지 않은 부작용으로는 구토와 리비도 상실 및 성기능 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고 한다. 즉 복용자 전부가 구토와 성기능 장애, 한 발 더 나가서 리비도 상실을 경험하는 건 아니라는 뜻.

  그러나 <세로토닌>의 주인공 플로랑클로드 라브루스트는 당년 46세로 우울증 증세가 있어 15mg짜리 캅토릭스를 한 번에 반년 치 처방을 받아 매일 복용하고 있는데 구토는 없지만 아쉽게도 리비도 상실과 발기부전 증세를 피할 수는 없었다. 여태 우엘벡을 읽어온 독자라면, 우엘벡의 작품 속 남자 주인공이 발기부전은 뭐 다른 약물의 도움을 받으면 해소될 수 있으니 그렇다고 쳐도 리비도까지 상실했다는 것은 도무지 믿지 못할 수도 있으며, 심지어 리비도가 빠진 우엘벡을 뭐 하러 읽느냐, 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크게 걱정하지 마시라. 리비도가 충만하지 않아도 플로랑클로드는 만 46세로 할 만큼 했을뿐더러, (할 만큼 한) 지난 세월을 회고할 수 있는 지력이 있으며, 무엇보다 현재의 여인, 소설이 시작하고 얼마 안 있어 그녀로부터 도망해버리기는 하지만 가히 님포매니악Nymphomaniac 수준에 달하는 일본인 애인 유주가 등장해 당신의 기대를 충족시키는데 부족함이 크지는 않을 테니까.

  우리가 프랑스, 하면 예술과 패션, 사상 등의 소프트웨어에 집중해서 그렇지 프랑스는 세계 2위의 농산물 수출국이(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와 전 세계적으로 유전자 변형 농업이나 특히 기업형 대규모 농업이라는 추세에는 적절하게 맞춰나가는 것 같지 않다. 이번에 <세로토닌>을 읽으며 알게 된 거다. 땅이 좁은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어마어마하게 크겠지만 상대적으로 기계화되지 못한 프랑스 농업은 세계각지에서 저렴하게 밀려 들어오는 농산물과의 가격 경쟁력에서 밀리고, 국내 대형 유통기업마저 농민들에게 수입농산물과의 가격 차이를 좁히라는 요구하고 있는 처지다. 신자유주의는 농업이라고 예외를 두는 법이 없어 농민들은 힘겨운 구조조정을 요구받고 있다고, 우엘벡은 주장한다.

  그리하여 작가는 주인공 플로랑클로드 라브루스트를 대학에서 농학을 전공하고 지금은 농산부에 고용되어 유럽 행정부와 가끔은 더 넓은 범위의 무역협상 테이블의 교섭위원에게 제시할 보고서와 평가서를 작성하며 주로 프랑스 농업의 위치를 규정하고 지지, 소개하는 일을 한다고 설정했다. 위촉직이라서 공무원 연봉을 훌쩍 넘는 고액의 보수를 받아 부족하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으며 지금도 예금통장엔 칠십만 유로가 넘는 잔고를 확보하고 있다. 소설은 이 중년 사내의 예금 잔고가 이십만 유로 수준으로 떨어질 때까지, 일 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15mg에서 20mg의 단위의 캅토릭스로 갈아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첫 장면은 스페인 알메이라의 340번 국도 옆 주유소. ’나‘는 메르세데스 G350 사륜구동차에 경유를 채우고 제로 칼로리 콜라를 홀짝거리고 있었는데 폭스바겐 비틀이 다가오더니 짧은 치마와 핫 팬티를 입은 두 스페인 아가씨가 차에서 내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역시 우엘벡답게 완벽하게 동그란 엉덩이를 가진 탱크 톱 차림의 아가씨들. 이들에게 타이어 공기압을 보충해주고, 보충방법을 일러준 다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고 떠난다. 그러나 이들의 끈팬티와 몇 장의 옷만 든 것 같은 작은 짐꾸러미를 포함해 아가씨들의 동그란 엉덩이에 대한 인상은 앞으로도 근 이백 쪽 이상 가끔이긴 하지만 계속 등장할 예정이다. 젊음과 성, 몸과 관련해서. 2주간 휴가를 받아 스페인에서 지내기로 하고, 비행기로 도착하는 애인 유주를 마중 나가는 길에 잠깐 만난 아가씨들.

  유주는 애초에 함께 살지 말았어야 했지만 너무 오랫동안 삶을 주체적으로 결정하지 못해왔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어영부영 동거하게 된 여자. 일본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지금은 파리의 일본문화원에서 일하고 있는데, ’나‘가 경험한 유주의 프로젝트는 만화 전시회와 일본 포르노의 새로운 경향에 대한 박람회밖엔 없다. 모르긴 해도 부모의 알선으로 다른 곳도 아닌 프랑스에서 별정직 공무원 자리를 얻은 것 같다. ’나‘하고는 스무 살 차이가 나서 지금 26세. 유주를 비난해야 할 점은 무척 많은데, 가장 비난해야 할 건 난교파티에 출입한다는 것. 베튄 강변로의 대 저택에서 백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모여 주로 남자 둘에 여자 하나꼴로 여기저기에서 막 관계를 하고, 대체로 보면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어리고 지위도 낮은 듯했다.

  ’나‘가 결정적으로 유주와의 관계를 정리하고자 하는 마음이 든 건, 유주의 이메일을 볼 기회가 생겨 발견한 동영상 때문이었다. 첫 번째 동영상엔 유주와 열다섯 명의 사내들이 등장해 온갖 방법의 포르노를 실사하고 있었고, 두 번째 영상엔……, 이건 드러워서 내 손으로 자판을 누르지 못하겠다. 궁금하면 읽어보시든지. 하여튼 우엘벡, 미친놈이다, 미친놈. ’나‘가 도저히 참지 못하겠던 것은 첫 번째 동영상을 찍은 장소가 바로 ’나‘의 집 안방이었다는 점과 두 번째 동영상 자체였다. 그리하여 역겨워서 더 이상 보지 못하고 40킬로그램 밖에 나가지 않는 유주를 납작 들고 아파트 창문 밖으로 집어 던져 버릴까, 하다가 유주의 성적 기교의 탁월함 때문인지 하여튼 오늘에 이르렀던 것. ’나‘가 분명히 정상이 아닌 것이, 그러면서 뭐하러 스페인까지 둘이 함께 가기로 하고, 두 주의 휴가를 한 주로 줄이다가, 그것도 중도에 더 빨리 그 먼 길을 운전해 돌아오느냐는 말이지. 하여튼 ’나‘는 그렇게 했다, 파리 15구 토템 타워 30층의 커다란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 도착한 후, 유주와 헤어지기 위하여, 라기보다, 지병처럼 달고 다니는 우울증이 도져서 그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울증에 영향을 준 건 당연히 유주의 문란한 성생활 때문이겠지만 그렇게 생긴 틈으로 ’나‘의 영원한 연인 카미유에 대한 그리움이 자리를 잡는다. ’나‘는 유주로부터 도망하기 위한 방법으로 ”자발적 실종“을 택한다. 실제로 프랑스에선 매년 만이천 명이 가족을 등진 채 사회에서 사라져버린다고 한다. 유주가 가족은 아니니까 양심의 가책도 받을 필요가 없는 ’나‘는 농산부에 가서 아르헨티나로 직장을 옮긴다는 거짓 핑계로 사표를 내고, 거래은행을 바꾸고, 두 주 후에 아파트 월세 계약을 종료시킨 다음, 파리에서 찾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흡연 가능한 메르퀴르 호텔의 니오르 마랭푸아트뱅 지점으로 거처를 옮긴다.

  자발적 실종. 자유는 주체성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상부에서 하달된 수칙에 대한 하급자의 반감이나 일종의 불복종, 또는 2차 세계대전 직후에 등장한 다양한 실존주의적 연극에서 이미 묘사된 개인의 도덕심에 대한 반항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나‘의 자발적 실종의 변명.

  이리하여 ’나‘ 플로랑클로드는 현상의 사회에서 이탈해 과거로, 주로 과거의 여인들로 퇴행해버리고, 급기야 아무 남자하고 맺은 관계로 낳은 아들 하나를 키우며 사는 ’나‘의 베아트리체, 수의사 카미유를 관찰하기에 이른다.

  ’나‘는 작품 전체에서, 한 번도 쉬지 않고 사람 사이를 공고하게 만드는 건 몸이라고, 섹스가 없으면 혼인관계는 물론이고 어떠한 남녀, 또는 동성간의 사랑이 계속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반면에 이와 정반대의 중년 남자, 발기부전은 물론이거니와 리비도까지 상실한 남자를 등장시켜 가슴 속의 유일한 연인을 찾게 만든다. 이들 사이엔 죽음이란 깊은 단절이 있는 셈이다. 만일 20mg 단위의 캅토릭스 복용을 통해 세로토닌을 유지하기를 포기하기만 하면 먼저 리비도가 환원이 되고 이어서 발기부전 증세도 없어지겠지만 눈에 띄게 깊어가는 우울증 증세로 어느 날 권총으로 머리통을 날려버리거나 고층 아파트의 창문에서 몸을 던질지 모를 일이다. 사랑을 위해서는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하고, 목숨을 위해선 리비도 망실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나‘ 플로랑클로드. 이 진퇴양난의 까마득한 벼랑 위에 선 남자의 이야기.




● 잘 살기(well being)와 행복감을 유발하는 물질인 세로토닌이 위장 점막에서 생성된다는 점을 명심하자. 역시 잘 먹는 게 최고다. 먹다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고, 58년 개띠 미국 가수이자 영화배우 마돈나는 맛있는 거 먹는 게 섹스보다 좋다고 했다. 당신은 왜 일을 하는가. 다 먹자고 하는 일. 오늘 점심은 봉평장터 가서 돼지 석갈비에 반주 한 병 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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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05-01 11:0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세로토닌이 이런 내용이군요. 식욕은 성욕에 비례한다고 어디선가 주워들었습니다.ㅋㅋ쩝🙄

Falstaff 2021-05-01 13:07   좋아요 3 | URL
크.... 먹고, 마시고 왔습니다.
이제 절 기다리는 건, 그렇습니다, 즐거운 낮잠!
배부르게 먹고 배 두드리고 있으면 그게 장땡이지 누가 임금인지 무슨 상관인고, 함포고복에 격앙가가 넘칩니다. 인생은 유토피아, 라고 생각하고 살아야지요 뭐, 할 수 읎잖아요. ㅋㅋㅋㅋ 근데 배부르면 딴 생각 안 나던데... 혹시 그거 유언비어 아닐까요?

청아 2021-05-01 13:11   좋아요 3 | URL
주워들은 거라 근거없을 가능성이 큽니다ㅋㅋㅋㅋ
마돈나의 말 때문에 생각나 투척했어요ㅋㅋ😆

Falstaff 2021-05-01 13:15   좋아요 3 | URL
아, 순서가.... ㅎㅎㅎ
식욕은 성욕과 비례한다.... 맞는 말 같습니다. (저절로 배고파지잖아요!)
성욕은 식욕과 비례한다.... 아닌 거 같네요. ㅋㅋㅋㅋㅋ

새파랑 2021-05-01 11:0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미셸 우엘벡 인터뷰가 인상적이어서 읽어보고 싶었는데 ㅎ 이미 이 책이 보관함에 있네요 ㅋ리뷰 보니 읽어보고 싶네요^^

Falstaff 2021-05-01 13:10   좋아요 4 | URL
전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특히 페미니즘 입장에 서신 분들에겐 더 그렇습니다.

syo 2021-05-01 17: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대충 다 까먹었는데 그것만 기억나요.
‘나‘는 정말이지 ‘학문‘에 큰 뜻을 둔 사람이었다는 거.

Falstaff 2021-05-01 19:35   좋아요 1 | URL
ㅋㅎㅎㅎ
여러분, 사이오 님의 중의법에 넘어가지 마세요. ㅋㅋㅋㅋ
근데 ‘나‘가 ‘학문‘에 몰두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 걸로... 아는데요.
마지막 애인 유주가 그쪽 전문이고요. ㅋㅋㅋㅋ

coolcat329 2021-05-01 18: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재밌겠다 생각했는데..오..중간부터 내용이 굉장하네요. 작가가 센거 같아요 ㅎㅎ
그래도 폴스타프님 리뷰는 너무나 재밌게 읽었습니다.

봉평장터 서울에 맛집인가하고 검색해봤는데 ㅋㅋ 혹시 천안이신가요?

Falstaff 2021-05-01 21:57   좋아요 2 | URL
이 양반의 매력이었다가 하도 비슷한 걸 우려먹어서 별로 감응이 안 오는 게 바로 그겁니다. 세미 포르노. 포르노가 특성상 날이 갈수록 좀 더 쇼킹한 걸 내놔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고 어디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세로토닌>에선 조금 너무 나간 듯 합니다.
우엘벡은 이 책의 성애 장면도 주로 여자가 남자에게 기교를 선물하는(자기들이 좋아서든 말 그대로 서비스 차원이든 간에) 것만 자주 출몰하지 거꾸로인 경우는 한 번도 없습니다. 주인공 ‘나‘가 가슴속 연인 카미유를 제외하고 여자를 바라보는 시각은 오직 하나, 그거 뿐입니다. 이젠 우엘벡을 그만 읽어야겠어요.
저녁 먹으면서 또 한 병 깠더니 지금 주정인지 댓글인지 잘 모르겠군요. ㅋㅋㅋ

그리고 봉평장터 가지 마세요. 이젠 맛대가리 하나 없는 그저 그런 밥집이 돼버렸더군요.

coolcat329 2021-05-01 20:30   좋아요 2 | URL
우엘벡은 <소립자>만 들어봤는데, 폴스타프님 덕분에 작가의 세계를 조금이나마 맛보게 되었습니다. 알콜이 들어간 글이 저는 더욱 좋습니다. 😊사실 저도 지금 알콜을 맛있게 마시고 댓글을~~즐거운 주말 되셔요~~

붕붕툐툐 2021-05-01 2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하하! 맛있는 거 먹는게 최고죠~ 암요, 암요~~!!^^

Falstaff 2021-05-01 21:44   좋아요 1 | URL
그럼요, 그럼요. ㅋㅋㅋ
 
2년 8개월 28일 밤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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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은 성인을 대상으로 한 우화. 근래에 읽어본 가운데 작가와 독자의 합이 이것만큼 결정적으로 영향을 주는 작품은 없는 거 같다. 책을 읽고 나서 마음에 들거나 들지 않거나의 차이가 상당히 클 듯하지만, 만일 별점을 준다면, 살만 루슈디의 스리슬쩍 넘어가는 만연체 글 솜씨가 기본으로 별 세 개는 먹고 들어가는 바람에 다섯 개를 주느냐, 세 개를 주느냐의 갈림길에 서지는 않을까 싶다.
  나는 딱 한 가지 이유, 살만 루슈디가 쓴 새 책이 나왔다는 신간 알림을 받아 2020년 12월 30일에 초판 발행한 책을 보관함에 넣어두었다가 2021년 2월 2일에 주문해 사서, 2021년 4월 27일에 읽기 시작해 다음날 다 읽었다. 읽기 위해 책을 꺼내고서야 2년 8개월 28일이 며칠이나 되는지 계산해봤더니 1,001.333…일 이었다. 그러면 <천일야화>. 잔혹 엽기의 페르시아 샤리알 왕과 자진해서 결혼한 셰헤라자데가 여동생 두냐자데와 왕을 관객으로 두고 1,001 밤 동안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서 목숨을 구하는 전설. 프랑스 사람 앙투안 갈랑이 페르시아의 전설을 취하고 거기다가 원본엔 있지도 않은 알라딘의 요술 램프 등 몇 가지 이야기를 스스로 창작해 덧붙인 작품.
  셰헤라자데 왕비와 왕비 동생 두냐자데는, 존 바스가 자신이 쓴 <키메라>를 통해 주장한 바에 의하면, 천하의 폭군 샤리알 왕에게 옛 이야기를 해주고 밤이 깊으면 왕은 왕비와 잠자리에 들어 은은한 촛불을 켜놓은 상태로 방사를 치렀고, 두냐자데는 같은 방의 작은 침대 위에서 이들의 몸짓과 소리를 라이브로 구경할 수밖에 없었으며, 스스로도 달큰한 광경에 몸이 달아 어쩔 줄 몰랐다고 하는데, 클라이맥스는, 2년 8개월 28일째 밤에, 역시 방사를 치루고 나서 잠에 떨어진 거구의 건장한 왕에게 두 자매가 다가가서 페르시아의 반월도를 꺼내들어, 스윽, 왕의 목을, 참수했단다.
  존 바스가 이렇게 주장하고 어느새 43년이 흐른 2019년, 살만 루슈디는 바스보다 훨씬 거대한 우화를 꺼내 현대인에게 일침을 가하게 된다. 루슈디의 천일 하고도 하루 더는 <천일야화>와 별로 상관이 없다. 그것보다는 이이를 세계적인 스타덤에 오르게 만든 <악마의 시>, 해수면 만 미터 상공에서 공중 폭파된 비행기에서 떨어졌으나 살아남은 두 남자. 생존한 대신 한 명은 머리통에서 거대한 광배가 빛나기 시작하고 다른 한 명은 이마에 뿔이 돋고 발굽이 생겼으며 무지막지한 남근이 달렸다는 이야기와 연결되지는 않을까. 즉, 인간계와 마계가 있었는데 서기력 1195년, 아주 오랜만에 두 세계 사이에 틈이 생겨 인간계로 넘어와 당대 최고의 철학자 이븐루시드와 사랑을 맺어 천일 하고도 하루 동안 세 번 수태를 하고 일곱 쌍둥이, 열하나 쌍둥이, 열아홉 쌍둥이를 출산한 열여섯 살 가량의 외모를 가진 번개공주, 이 공주의 이름이 셰헤라자데의 동생 두냐자데와 비슷한 ‘두니아’와 비슷한 거 말고는 <천일야화>와 그리 잘 연결되는 건 없다.
  페리스탄이라고 들어 보셨나? ‘스탄’이라고 하니까 당연히 나라, 지역, 아니면 한 세계를 칭한다. 어떤 종족들이 사느냐 하면, 마족魔族. 마족의 남성은 진jinn, 여성은 진니아jinnia 또는 지니리jiniri라고 한다. 옛 이야기에서는 악마, 타락천사 루시퍼, 즉 아침의 아들을 마족의 우두머리로 오인하는데, 사실은 우리 인간세계와 베일 한 장 차이로 분리된 자기들의 세계 페리스탄이란 이름의 마계에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대개 괴팍하고 변덕스럽고 음탕하며 매우 빠를 속도로 이동할 수 있고, 심지어 변신도 가능하다. 물론 부도덕한 마족도 많지만 이 막강한 존재들 가운데 일부는 선과 악, 바른 길과 그른 길의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벼락을 마음대로 부리는 마족의 위대한 공주였던 어느 여마신은 위에서 말했듯이 마계와 인간계(하계) 사이의 베일 같은 간극이 살짝 벌려졌던 1195년, 세비야의 재판관이며, 고향 코르도바의 칼리프였던 아부 유수프야쿠브의 주치의이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인간 이성의 열렬한 숭배자였던 철학자 이븐루시드를 사랑해 그와의 사이에 수많은 딸, 아들을 생산했다. 아랍계 스페인 전역에서 역병처럼 퍼지며 날로 막강한 세력을 펼치던 광신도 베르베르 족에게 쫓겨나 유대인이라고 밝히지 못하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저 촌 구석 루세나로 귀양을 가 근본도 모르는 소녀와의 사이에 수십 명의 자손을 두게 된 나이든 철학자 이븐루시드는 숱한 아이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물려주지 않아 전부 사생아로 만들어버리고 귀양살이 2년 8개월 28일 만에 사면이 되자마자 다시 이베리아의 알함브라 궁으로 떠나버리고 만다.
  철학자는 일말의 양심이 남아 있어 하계에 내려와 자신을 사랑해 수많은 아이들을 낳은 신계의 위대한 공주 두니아에게 양육비를 보내주긴 했으나, 철학자에게 사업을 물려받아 항아리 장사를 계속 한 두니아는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아이들은 사막의 자갈들처럼 번성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귓불이 거의 없다는 거. 그리고 3백년의 세월이 흘러 페르난도 왕과 이사벨라 여왕이 무어족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축출하고, 유대인들마저 스페인에서 추방해버렸을 때 유대인이라고 말할 수 없었던 유대인들도 몽땅 추방되었는데, 하필이면 같은 동네인 루세나에서 살았던 이유 때문에, 그게 아니라도 저 선대의 아버지 이븐루시드 역시 무어인이었으니까 모든 두니아들도 카디스와 팔로스데모게르에서 배를 타거나, 도보로 피레네 산맥을 넘거나, 마족의 혈통답게 양탄자나 커다란 항아리를 타고 날아서 세상 방방곡곡으로 흩어진다.

 

  여기까지가 모두 열 개의 장 가운데 첫 번째 장 “이븐루시드의 후손”을 요약한 것이다.
  물론 진짜 중요한 건 아직 이야기하지 않았다. 지금부터 할 테니 주목하시라.
  이븐루시드는 칼라프의 수석주치의였다가, 베르베르 족에 의하여 축출을 당한 전력이 있다. 베르베르 족은 이성은 필요 없고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 믿는 광신도적 성향을 가졌다. 이들에게 종교적 신념을 심어준 인물은 이미 죽어 백골이 진토가 된, 정통 이슬람 신학에 신비주의 사상을 접목시킨, 현재는 이란 동북부의 옛 도시이며 시아파의 성지로 알려진 ‘투스’의 철학자 가잘리였다. 가잘리는 아리스토텔레스 등 그리스 철학자들과 신플라톤주의를 지지했던 이븐시나와 왈파라비를 비판했는데, 이븐시나와 왈파라비의 맥을 이은 후배가 바로 이븐루시드였던 것. 이러면 첫 번째  대결구도가 완성된다. 가잘리와 이븐루시드. 신비주의(원리주의)와 인간의 이성.
  하나 더. 가잘리가 살아생전 우연히 푸른색의 작은 유리병을 하나 주웠다. 가잘리야 말할 것도 없이 당대 최고의 신비주의자였으니 이 푸른색 병의 정체를 몰랐을 리가 없다. 마족에도 백마족과 흑마족이 있는데, 푸른 병 속에 유폐되어 있던 건 흑마족의 우두머리 급 지도자인 마왕 주무루드. 가잘리는 병을 손에 쥔 채 주무루드에게 자신의 요구조건을 이야기한다. 유럽 민화에 숱하게 나오는 세 가지 소원을 들어달라는 것. 그러나 언제 자신이 소원을 이야기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가잘리가 원할 때라고 확정, 맹세한 후에 주무루드를 병에서 해방시켜준다. 그리고 세월은 거침없이 흘러 가잘리는 백골로 돌아가고, 이븐루시드 역시 먼지만 남은 천 년 동안. 주무루드는 당연히 가잘리가 죽었으니 세 가지 소원은 날 샌 걸로 알고 마음 편하게 살아왔는데, 천 년이 흘러 신계와 하계에 다시 웜홀이 생겼을 때, 난데없이 가잘리의 영혼이 등장해 주무르드의 귓가에 소원을 속삭인다.
  “세상에 두려움을 심어주시오. 두려움은 곧 하느님의 메아리라고 할 수 있겠소. 메아리를 들을 때마다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자비를 애원하겠지.”
  주무루드가 대답한다.
  “하느님은 내 소관이 아니니까 모르겠고, 네 소원을 기꺼이 들어주겠다. 다만 조건이 있다. 두려움을 심어주기 위해 여러 가지를 해야 하니까 이 일이 끝나면 세 가지 소원을 다 들어준 걸로 하자.”
  “그럽시다.”
  이렇게 해서 주무루드를 위시한 흑마계의 네 위대한 마신들이 하계로 내려와 깽판을 치기 시작한다. 하계에는 백마계의 위대한 번개공주 두니아와 이븐루시드의 자손들이 깔려 있던 차. 사랑 많고 정 많은 정의의 번개공주 두니아가 다른 보통의 인간도 아니고 자기 새끼들이 주무루드, 어렸을 땐 어울려 사방치기, 다방구, 땅따먹기 했던 동무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꼴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나 어디. 그리하여 인간계에선 흑마계 대표(들)과 백마계 대표와 그녀의 자손들이 한 판 승부를 펼치니 이를 루슈디는 ‘이계전쟁’이라고 일컫는다.
  21세기 어느 날, 이계전쟁은 끝난다. 당연히 착한 우리 편인 백마계가 이긴다는 건 누구나 짐작할 수 있겠다. 그리고 또다시 천 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 인간들은 깊은 사색에 잠긴다.
  여기서 어떤 사색인지는 말할 수 없다. 에필로그까지 따라가야 살만 루슈디 정도 돼야 제시할 수 있는 의문문을 읽을 수 있으니까. 이 재미있는 책을 그저 이계전쟁으로 국한해 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루슈디의 질문을 가장한 주장에 적극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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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4-29 11: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호라... 독자와의 합이 중요한 책이군요.

저는 살만 루슈디가 쓴 새 책이 나왔다는 신간 알림을 받아 2020년 12월 30일에 초판 발행한 책을 보관함에 넣어두었다가 2021년 1월 21일에 장바구니에 담았다가, 2021년 3월 4일에 다시 보관함으로 옮겼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다시 장바구니에 돌아올 수 있을 것인가!

Falstaff 2021-04-29 11:40   좋아요 1 | URL
옙. 루슈디의 동화적 (그러나 어린이 ‘동‘자 대신 옥편엔 없지만 성인 ‘동‘자로 읽어야 마땅합니다. ㅋㅋ) 상상력이 만화처럼 펼쳐지는 게 분명히 몇 몇 독자에겐 불편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ㅋㅋㅋㅋ 도서관 가세요. 이런 거 함부로 낚시했다가 코피 터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ㅋㅋㅋㅋㅋㅋ

유부만두 2021-04-29 15: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신나게 재밌게, 한 판 굿처럼(?) 읽었어요. 독자가 원하면 원하는 대로 억만겁 (이때 중국을 뛰어넘는 인도의 뻥을 확인하고 말이죠)의 시공간을 펼치고 또 접고 하면서 사색과 철학도 하는거고요. 그런데 그런다고 루슈디 작가는 눈썹 하나 까딱할 것 같진 않지만요.
뭣보다도 번역이 좋았어요.

근데, 루슈디 동화책은 두 권짜리로 따로 있습니다. ^^

Falstaff 2021-04-29 15:57   좋아요 1 | URL
그죠, 그죠! 무척 재밌습니다. 이게 합이 맞아서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ㅋㅋㅋㅋ
루슈디 동화 가운데 저는 걍 하룬과 이야기바다 하나만 읽었습죠. 동화인지 소설인지 매우 헷갈렸지만 전 걍 소설로 치부했던 기억이 나네요.

잠자냥 2021-04-29 16:53   좋아요 1 | URL
번역이 김진준이군요. 이 사람 번역 좋아하는 분들이 많네요.
 
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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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한 소설. 잘 읽히고, 읽는 사람에 따라 감정에 이입되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심지어 눈물까지 콸콸 쏟을 수도 있으며, 간혹, 세상 산다는 게 뭔지, 한숨 한 번 토할 것 같기도 하고, 아 드런 세상 하긴 다 그렇게 살다 가는 거지 뭐, 하며 검은 비닐 봉지 하나 주머니에 구겨 넣고 GS 편의점에 소주 사러 갈 수도 있겠다. 봉지 한 장에 이십 원이래, 하면서.
  1891년 미주리 주 중부의 분빌 마을 근처 작은 농가에서 태어난 윌리엄 스토너는 여섯 살 때 암소의 젖을 짜기 시작하고(그럼 황소의 젖을 짜겠는가), 이후 차차 돼지 먹이 주는 일, 달걀 가져오는 일을 했다. 나이가 차 무려 8마일, 12.9킬로미터 떨어진 초등학교를 다니느라 만 여섯 살 때부터 왕복 25.8킬로미터를 걸어야 했으니(아 물론 크리스마스 방학, 부활절 방학과 여름방학 때는 빼고), 다른 건 몰라도 아이한테 살 붙을 시간은 없었을 거 같다. 물론 학교에 다닌다고 해서 농사일에 열외를 시켜줄 수 없던 살림이라 열일곱 살이 되자 벌써 이 외동아드님은 어깨가 구부정한 체형의 비쩍 마른 사내가 됐단다. 애초에 공부를 시키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타지까지 보내 유학을 시킬 재력이 없었음에도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어서, 아침에 출발하면 저녁 때 도착할 수 있는 미주리 주의 컬럼비아에 있는 미주리 대학교에 농과대학이 생겼다는 말을 들은 아버지 스토너 씨가 심사숙고 끝에 윌리엄을 4년제 농과대학에 보내겠다는 크고 용감한 계획을 세운다.
  그리하여 다른 학생들보다 조금 많은 나이인 열아홉 살에 농과대학에 입학한 빌은 2학년이 되어 필수과목인 영문학개론 시간에 영문과 학과장인 아처 슬론 교수에게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배우면서 비록 학점은 형편없지만 국어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다. 이후 그는 농과대 커리큘럼 대신 철학, 고대역사 기초 강의, 영문학 전공과목 두 개를 선택해 자연스럽게 전과轉科 과정을 밟는다. 이후 빌은 공부에 몰두하게 되고, 4학년에 올라가자 2년 전 자신에게 형편없는 학점을 부여했던 아처 슬론 교수는 그에게 영문학 석사과정을 권유한다. 그리고 곧바로 박사과정. 교수는 빌 스토너에게 말한다. 자네는 교육자가 될 사람일세. 자네는 (학문과)사랑에 빠졌어.
  이리하여 우리의 키 크고 거친 손을 가진 주인공 윌리엄 스토너는 박사과정과 동시에 유급 강사를 하면서 인생의 마지막 장까지 마주리 대학 영문과에서 전임강사에 이어 종신교수라는 평생 직업을 갖게 된다.
  윌리엄 스토너 교수의 연보를 다시 보자. 1891년생. 1910년 미주리 대학 입학, 1914년 6월 문학사. 1915년 봄 석사과정 종료, <캔터베리 이야기>의 작시법에 관한 논문. 1918년 박사.
  반면에 세계사는 1914년 8월 1차 세계대전 발발, 1917년 4월 6일 미국의 대 독일 선전포고. 윌리엄의 평생 친구 데이비드 매스터스와 고든 핀치는 군대 입대하고 매스터스는 프랑스로 건너가 첫 전투였던 1918년 샤토 티에리에서 전사해버린다. 1918년에 죽었는데도 스토너와 평생 친구라고? 그렇다. 날 믿어라. 그는 유령이 되어서라도 스토너를 결코 떠나지 않는다. 아니, 스토너가 보내주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는 참전하는 대신 인적 없는 교정에서 연구와 교육을 잇는 것에 전력을 다하는 쪽을 선택한다.
  그가 1956년에 마지막 숨을 거둔다는 것이 작품의 제일 앞 장면에 서술되어 있다. 이후 그의 태생부터 시간 순으로 스토너 교수의 평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가상 인물에 대한 전기 비슷하게 생각하면 딱 맞다.
  내가 생각하는 문제는, 작가 존 윌리엄스가 스토너 교수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렌즈를 끼고 관찰했다는 점.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농사일을 하고, 대학에 진학해서도 숙식의 대가로 어머니의 사촌뻘인 짐 푸트의 농장에서 노동을 하며 빈 시간에야 공부를 할 수 있는 처지였으며, 처음 영문학 수업을 들으면서도 아처 슬론 교수에게 비웃음을 사고, 자신과 비교할 수 없는 대도시 세인트루이스의 작은 은행의 은행장 딸을 연모하여 사랑하는 줄 착각한 상태에서 결혼해 평생을 희생하고, 직장에서도 학자적 양심으로 적을 만들어 그 적에 의하여 평생 고초를 겪는 인물.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독자는 저절로 빌 스토너에게 전적으로 동정의 눈길을 보내게 된다. 여기에 작가의 유려하고 달달하면서도 쓸쓸한 문장의 힘까지 보태지면, 독자는 그야말로 흐물흐물, 무릎 뼈가 녹아난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 스토너의 적이랄 수 있는 완전한 악당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착한 우리 편과 나쁜 너희 편이란 이분법을 극도로 강조하기 위해 작가 존 윌리엄스가 만든 악당들은 스토너 교수의 바로 옆에 있는 자들로 구성했다. 자기한테 배우는 학생, 동료이자 나중엔 상급자가 되는 교수, 그리고 가장 치명적인, 아내. 독자는 이들로부터 나쁜 성향 말고는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다. 말 그대로 지독한 악당들이라서 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 오직 하나, 스토너의 인생을 망치기 위해 존재하는 자들이다.
  반면에 독자가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대학에 진학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농학에서 영문학과로 전과를 해, 학과장의 눈에 들어 그의 암묵적 동의를 받아 1차 세계대전 참전을 거부해서 생명을 걸지 않는 건 물론이고 그 시간에 학문을 넓혔으며, 어쨌든 결과적으로 젊은 나이에 종신교수라는 명예를 틀어쥐게 된다. 그래서 나중에 도래한 블랙 먼데이, 대공황이 미국 전역을 내리덮었을 때 하늘처럼 높았던 실업률에도 궁핍함이라는 건 전혀 모르는 상태로 안정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대도시 은행장 딸과 결혼하는데 성공을 해, 비록 대공황이 한창일 때 장인이 권총자살을 해버리긴 하지만 그래도 장모가 세상을 뜨기만 하면 남은 재산은, 이런 것까지 말하는 건 좀 야박하니 생략하자. 세상에 윌리엄 스토너 선생만큼 우울하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나. 다 거기가 거기고, 엄앵란 말마따나 201호나 202호나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권고하노니, 그저 작가가 쓴 대로 따라가면서 읽기만 하자. 그렇게만 한다면 이 책을 읽고 난 다음에 눈시울이 매캐해져 소금물 한 방울이 뺨을 적실 수도 있을 테니. 그러나 입은 비뚤어져도 피리는 똑바로 불겠다. <스토너>는, 내가 이 장르를 무시하는 게 아니고 말이 그렇다는 건데, 이거 혹시 뽕짝 아냐? 하여튼 나는 그렇게 읽었다. 읽으면서는 무지하게 재미있어 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끝.



  암만해도 이야기를 해야겠다.


  이 책에서 스토너 교수를 곤경에 빠뜨리는, 개전의 정이 도무지 안 보이는 악당 두 명이 등장하니, 한 명은 정원이 가득 찬 스토너 교수의 대학원 세미나에 수강을 허락해달라고 부득불 졸라대 겨우 허락을 받고는 첫 수업 부터 지각을 하고, 수업태도도 좋지 않을뿐더러 공부도 하지 않는 찰스 워커. 또 한 명은 찰스 워커의 지도교수로, 그로 하여금 스토너 교수의 세미나에 등록을 하라고 권유한 동료교수 로멕스.

  수강을 끝내고 면접 고사를 치루는 자리에서 스토너 교수는 찰스 워커가 수강과목인 중세와 르네상스 영어에 아무런 지식이 없는 깡통임을 밝히고, 곧 학과장이 될 로멕스가 패스를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불합격 처리를 주장한다. 로멕스와 워커에게는 공통점이 있으니 교언영색하는 재주. 로멕스는 강의교수였던 스토너의 의견이 어떻게 부당한지를 분명하게는 밝히지 않지만 기어이 워커로 하여금 내년에 다시 대학원 과정을 수강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동시에, 스토너한테는 스토너가 학교를 그만 둘 때까지 갖은 악랄한 방법으로 괴롭힌다.

  그러나 독자는 알고 있다. 학과장 로멕스가 찰스 워커를 편애하고 스토너에게 가장 강한 수준의 '직장내 괴롭힘'을 가하는 이유가 찰스 워커가 자신과 같은 장애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가끔 극도의 공격성을 보이는데 로멕스와 찰스 워커가 그 대표적인 경우라는 것도.

  물론 책은 1960년대에 처음 출판했다. 그땐 미국에서도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의 모든 편견은 사라져야 한다. 젠더, 피부색, 성의 선택, 빈부, 종교, 그리고 장애여부 등등. 1960년대 당시엔 어땠는지는 다음으로 치자. 그러나 이 책을 읽는 21세기에, 비록 작품의 메인 스트림은 자신의 감성과 취향에 맞았을지라도, 독자 가운데 몇 명은 스토너가 은근하게 '병ㅇ ㅇ갑하는' 장면을 연출한 것은 지적하고 넘어가야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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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1-04-28 09:4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봉투 오십원입니다;;;; (주머니와 가방에 검은 봉지 스페어로 갖고 다닙니다) 전 이 소설을 꽤 재미있게 읽었어요. 재미...라니까 눈물 겨운 타인의 인생에 예의 없는 태도지만요. 그런데 전 이 사람을 위해서 눈물 대신 욕 바가지를 쏟아냈습니다. 간결한 문장이 쉽지만 슴슴하니 좋았습니다. 영어로도 읽으시길 추천드립니다. 참, 전 소주보단 맥주에요. (봉투 오십원)

Falstaff 2021-04-28 09:50   좋아요 2 | URL
아, 오십 원입니까? 가시는 곳이 GS 맞나요? ㅋㅋㅋㅋ
저도 재미있게 읽었는데, 다 읽고나니 쓸데없는 잡생각이 많아지더라고요.

유부만두 2021-04-28 09:57   좋아요 1 | URL
아니, 그럼 그 숱한 차액 삼십원 들은 다 ....ㅜ ㅜ

비슷한듯 다른듯 고고한 상아탑의 남자를 그린 (이번엔 공대) 소설 <기시마 선생의 조용한 세계/ 모리 히로시>를 추천합니다. 이 남자(들)도 꽤 쩜쩜쩜 입니다.

얄라알라 2021-04-28 12:18   좋아요 1 | URL
저는 봉투가 100원 아니었나? 아, 다음엔 제대로 봐야겠다 하면서 읽었는데 50원인가요^^? 제가 잘 가는 매장에서는 친환경 봉투라 그런지 100원이던데, 매장 마다 다른가봐요^^ Falstaff님 고품격 리뷰 읽고 봉투값 댓글 남겨서 민망하네요

Falstaff 2021-04-28 12:20   좋아요 1 | URL
ㅋㅋㅋ 봉투값 댓글도 재미 있습니다!!!

잠자냥 2021-04-28 10: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봉투 요즘 CU는 100원입니다.... ㅋㅋㅋㅋ 그래서 저는 에코백을 메고 가서 맥주와 소주를 쓸어담아 옵니다. ㅋㅋㅋㅋㅋ

저도 심정적으로 힘겹던 시절에 이 작품을 읽어서 울면서(?) 소주 사러 갔습니다. ㅋㅋㅋㅋㅋㅋ
마지막에 덧붙이신 이야기도 공감합니다.

Falstaff 2021-04-28 12:20   좋아요 1 | URL
앗, 100원이요?
사실, 저 사는 아파트 상가 CU는 평수가 넓지 않아서 그런지 돈을 받지 않아요. ㅋㅋㅋ 근데 아는 척하고 써본 겁니다.

잠자냥 2021-04-28 11:44   좋아요 1 | URL
예, 무슨 친환경 썩는 비닐이라고 100원 받더라고요. 봉투가 부들부들 좀 다른 재질이긴 해요.

Falstaff 2021-04-28 12:21   좋아요 1 | URL
이런, 비닐 봉지 하나가 소줏병 값하고 같다고요? 아이고, 근수 차이가 을맨대 ㅋㅋ

2021-04-28 1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28 1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28 1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파랑 2021-04-28 11: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처음인가?) 제가 읽은 책이여서 반갑네요^^ 전 스토너의 굴곡진 인생에 공감하면서 읽었는데 리뷰보니 또 그런것만은 아닌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역시 날카로우십니다~!!

Falstaff 2021-04-28 11:14   좋아요 2 | URL
ㅎㅎㅎ 그냥 제 독후감, 책 읽은 다음에 느낀 점을 쓴 겁니다.
다양한 데 좋잖아요. ㅋㅋㅋㅋ

다락방 2021-04-28 11:4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주 재미있게 읽고 여운까지 강하게 남았었는데, 폴스타프 님의 마지막 의견에 대해서는 역시 그런 생각을 더러 했더랬습니다. 굳이 왜 그 악역을 장애인에게 주었어야 했을까, 라면서, 그런데 왜 장애인이라면 안되는걸까, 하고 제 안에서 결론을 내리지 못했더랬어요.

Falstaff 2021-04-28 12:38   좋아요 4 | URL
문제는, 미주리 대학이라는 극히 한정된 공간 안에 딱 두 명의 악당이 있었는데, 그게 다 장애인이라는 거였습니다.
장애인도 악당이 될 수 있고, 그게 당연하다면 그렇게 안 만드는 것이 오히려 차별이겠습니다만, 이 책에선 좁은 사회라는 조건 때문에 여차하면 장애인은 악당이란 공식이 생길 수도 있을 거 같았거든요. 게다가 장애 부분을 필요보다 좀 짓궂게 쓴 점도 있고요.
또 여성의 경우도 순종(빌 스토너의 엄마와 딸), 희생(연인), 집 안의 적(아내), 속물(장모), 가난과 무지(외숙모), 부잣집 백치 딸(고든 핀치의 아내) 등, 단 한 명의 긍정적 캐릭터나 투사가 없습니다.
이런 것들이 읽는 내내 불편하더랍니다.
오직 한 명, 스토너의 작품 속 문학적 성취를 위해 모든 등장인물들이 사역하는 대표적인 작품 아닌가 싶었어요. 죽음의 순간까지도요.

잠자냥 2021-04-28 12:40   좋아요 3 | URL
폴스타프 님 말씀처럼 <스토너>에서 가장 불편하고 답답한 지점은 바로 그 여성 캐릭터 다루는 방식인데요. 전 이 작가 다른 책 <오직 밤뿐인>까지 읽고 나니 작가 자체가 좀 그런 사람 아닌가 싶더라고요. 그래서 이 두 작품 읽고 나서는 더 안 읽고 싶어지더랍니다...... 그래봤자 국내 번역본은 <아우구스투스> 하나 남았지만요.

Falstaff 2021-04-28 12:46   좋아요 2 | URL
알라딘엔 페미니즘 책 좋아하시는 분이 많으셔서 여성에 관한 시각은 살짝 빼고 이야기 했었는데 걍 처음부터 나불댈 걸 그랬나 봅니다. ㅎㅎ
저도 위에서 답글 쓴 두 가지, 장애인과 여성에 관한 이상한 시각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끝날 때까지도 해소가 되지 않았습지요. 1960년대 시각으로 봐도 뒤쳐지는 관점이 아닌가 했습니다. 흑인도 스토너의 아버지가 부리는 ˝충성스런 하인˝ 한 명만 등장하고, 학생 가운데는 흑인이 아예 없어요. 4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좋은데 50년대 중순에도 여전했습니다.
물론 미주리가 미국에서도 보수적인 곳이긴 하지만 그래도 좀 껄끄러웠어요.

얄라알라 2021-04-28 12: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렇게 ˝학문과 사랑에 빠져서˝ 학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사람들, 대표적으로 스토너 박사 한국에서는 어떤 분들일까? 상상하며 리뷰 읽었답니다.

Falstaff 2021-04-28 12:25   좋아요 2 | URL
아이고, 제 모교에도 몇 분 계셨는데, 전 학교를 통틀어 고집불통이라 소문이 난 선생들이었습니다. 한 번은 학생들 공부 안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나봅니다.
너네들, 이렇게 공부하다 전부 낙제한다.
아이들은 뭐 또 뻔한 소린가보다, 해서 그냥 그대로. 학자로 이름은 높았는데 이 분은 교수법, 정확하게 발음이 문제였습니다. 외국어가 아니라 외계어로 말하는 거 같았거든요.
근데, 학기가 끝나고 보니까, 정말로, A 서너 명, 복학생들은 전부 D, 나머지는 몽땅 F, 권총이 아니라 기관총 맞았다는 거 아닙니까.
이 양반 같은 과 선배 교수는 전공필수를 복학생 4학년 2학기에 F를 줘서 당당하게 붙은 교보에 입사도 하지 못하고 일 년을 놀아야 했던 같은 학번 친구도 있었습니다. 아, 그놈의 학교는 지옥이었어요, 지옥.

coolcat329 2021-04-28 13: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직 스토너에만 집중해서 읽다보니 주변 인물들에 대해 별 생각없이 지나쳤네요. 지금 보니 충분히 폴스타프님 생각에 공감이 갑니다.

Falstaff 2021-04-28 13:32   좋아요 2 | URL
내가 읽은 게 제일 중요하지요 저도 재미나게 읽었어요. ^^
다 읽고 이런 느낌이다, 라는 것이지요. ㅋㅋㅋㅋ

mini74 2021-04-28 17: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댓글이 갑자기 산으로 ㅎㅎ곧 있음 쓰레기봉투값도 오른답니다 ㅎㅎ 전 이 소설 가슴아프게 봤어요 ㅎ

Falstaff 2021-04-28 21:06   좋아요 1 | URL
아 무조건 본인이 읽은 감정이 제일이라니까요! ㅋㅋㅋ
 
진중자 중국전통희곡총서 8
왕런제 지음, 김우석 옮김 / 연극과인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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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짧은 글이니 <맹자>의 등문공滕文公 하편 10장을 읽어보자. (출처, <맹자집주> 홈페이지. http://www.dubest.net)


  “광장匡章이 말하였다. "진중자陳仲子는 어찌 진실로 청렴한 선비가 아니겠습니까? 오릉於陵에 살 때에 사흘을 먹지 못하여 귀가 들리지 않고, 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물가에 자두(李)가 있었는데, 굼벵이가 열매를 반 이상이나 파먹었지만 기어가서 먹어 세 번을 삼킨 연후에야 귀가 들리고 눈이 보였습니다."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셨다.
  "제齊나라 선비 중에서 내 반드시 중자仲子를 거벽巨擘(엄지손가락)으로 삼는다. 그러나 중자仲子가 어찌 청렴하다 하겠는가? ①중자仲子의 지조를 충족시키려면 지렁이가 되어야만 가능할 것이다.
  지렁이는 위로 마른 흙을, 아래로 흐린 물을 마시나니, 중자仲子가 사는 집은 백이伯夷가 지은 것인가? 아니면 도척盜跖이 지은 것인가? 먹는 곡식은 백이伯夷가 심은 것인가? 아니면 도척盜跖이 심은 것인가? 이것을 알지 못하겠다."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는 몸소 신을 짓고 아내는 삼(麻)을 길쌈을 하여 곡식과 바꿔서 먹고 삽니다"
  "중자仲子는 제齊나라에서 대대로 큰 벼슬을 한 집안사람(世家)이다. 그의 형兄 대戴는 합蓋땅에서 받는 녹祿이 만종萬鍾인데, 형의 녹祿을 불의不義의 녹祿이라 하여 먹지 않으며, 형의 집을 불의의 집이라 하여 살지 않고, 형을 피하며 어머니를 떠나서 오릉於陵에 살았다. ②훗날 형의 집에 돌아와 보니 그 형에게 산 거위를 선물한 자가 있었는데, 이맛살을 찡그리며 '이 꺽꺽대는 것을 어디에 쓰려는 것이요?'라고 했다. 다른 날에 그의 어머니가 거위를 잡아서 함께 먹고 있는데 그 형이 밖에서 들어와 말하기를 '이것이 꺽꺽대던 고기이다'하니, 밖에 나가서 토해 버렸다.
  어머니가 주면 먹지 않고 아내가 주면 먹으며, 형의 집에서 살지 않고 오릉於陵에서 살았다. 이렇게 해서 자기가 지키는 지조를 충족시켜 내겠는가? 중자仲子 같은 자는 지렁이가 되어야 그 지조를 충족할 것이다."


범씨范氏 '하늘이 낳고 땅이 기르는 것에 오직 사람이 가장 크니, 사람이 위대한 까닭은 그 인륜人倫이 있음으로써다. 중자仲子는 형을 피하고 어미를 떠나서, 친척親戚과 군신君臣과 상하上下가 없으니 이는 인륜이 없는 것이다. 어찌 인륜이 없이 청렴이라 할 수 있겠느냐?'
 


  나 역시 진중자 일화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진중자로 말하자면, 오직 하나. 다른 사람은 모르겠고 자신은 누구보다 순수하고 청렴한 삶을 살겠다고 다짐을 했으며 정말로 신념에 충실하며 사는 인간. 그리하여 이이 진중자는 스스로를 과하게 깨끗한 물, 너무 맑아 한 마리의 붕어, 가재, 개구리도 살 수 없는 초순수deionized water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초순수는 한문으로 超純水라고 쓴다. 물은 수소 두 개와 산소 하나가 결합한 상태. 이런 완전 물을 투명한 폴리카보네이트 상자 안에 담고 물속에 컬러 TV를 빠뜨린 다음, 전원을 연결하면 아주 고급스러운 화질로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감상할 수 있다. 만일 당신이 초고도 변비에 시달린다면 이 초순수를 소주잔으로 한 잔만 마시면 20분 안에 완벽하게 당신의 대장을 청소할 수 있다. 다만 어떤 후유증을 겪을지는 검증해본 적이 없어 문제일 뿐. 이 속에 붕어, 가재, 개구리를 빠뜨린다? 여지없이 즉사.
  위에 인용한 <맹자> 등문공 하편 10장에서 맹자가 일갈한 것도, 주인공 진중자가 앞뒤, 좌우, 상하를 가리지 않고 오직 자신 혼자 순수, 청렴하고자 했기 때문. 나도 이 희곡을 다 읽고 나서, 극작가가 어찌 이런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을 썼을까, 상당한 의심이 들었다. 이 정도면 청렴한 수준을 넘어 가히 신경정신과 적으로 편집증 증세가 농후한 인물이라 해야 하겠기 때문이었다.
  이건 역자의 해설을 읽어보고 해소되었다. 왕런제는 진중자를 귀엽고 존경스러운 인물, 다른 측면에선 우습고 슬픈 인물로 보고 있다. 과하게 고리타분하고 너무 극단적인 성격과 행위가 두 가지 다, 우습고 슬픈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어, 그럴 수 있겠구나.
  두 번째 의문. 극이 평면적이라 재미가 없다. 희곡이 이렇게 재미없는데 성공한 공연이 될 수 있을까. 이건 그냥 의문. 만일 현대 희곡이 재미가 없어서 공연에 실패했다면 우리나라에 번역, 소개했을 턱이 없으니. 그러면 뭐가 문제일까. 내가 이방의 언어로 숨어 있는 코드를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싶은 마음으로 본문을 다 읽었음을 굳이 숨기지 못하겠다. 역시 해설에 나와 있는 힌트. 희곡과 공연 사이의 간극이 정답이었다. 우리는 이 간극, 좁은 틈을 자주 ’연출‘이라고 부른다.
  저 위에 소개한 <맹자>에서 ①지렁이가 되어야만 중자의 지조를 충족시킨다고 한 내용 ②선물 받은 거위를 먹고 토하는 장면을 왕런제는 거위의 경쾌한 춤과 지렁이 춤으로 만들어 진중자의 자의식을 놀리고 훈계하는 것으로 표현했는데, 이 역할을 극중 내내 아무 생각 없이 오직 지아비의 뜻을 좇는 아내 역의 배우에게 맡겨 의미심장한 암시를 주었다고 한다. 이 장면은 해설을 읽어야만 알 수 있는 것. 종이 위에 지워지지 않게 검은 잉크로 인쇄된 하드웨어를 무대연출을 포함한 연출과 배우들의 표현을 통한 호소라는 소프트웨어로 만들 때의 다른 점은 오선지 위의 악보와 연주실황 차이보다 훨씬 더 큰 것이 아닐 수 없을 터. 즉각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작품 <진중자>는 내용을 통해 얻는 맹자의 가르침보다는 희곡을 한 버전 업데이트하는 연극으로 전환할 때의 방법과 가능성에 대하여 생각해볼 좋은 기회였다. 맞다. 희곡의 궁극적인 목적은 극이다. 이 분명한 것을 오래 잊고 지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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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어 벗 포 더
앨리 스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민음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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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쁜 마음으로 또 하나의 문제작을 소개한다. 이름도 처음 듣는 스코틀랜드 아줌마 앨리 스미스Ali Smith가 쓴 <데어 벗 포 더>. 작가 앨리 스미스, 스칸디나비아계 선조를 가진 것 같은 외모의 스미스는 1962년 임인년 범띠로 스코틀랜드 인버네스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애버딘 대학을 졸업한다. 85년부터 다시 케임브리지에서 미국, 아일랜드의 모더니즘을 공부하긴 하는데, 희곡을 쓰는데 맛이 들어 학위를 따지는 못하고 다시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로 옮긴다. 이후 약 2년 가까이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다 만성피로증후군 판정을 받아 일을 그만두고 다시 케임브리지로 간 스미스는 웨이트리스, 관광 보조원 등을 전전하며 처음엔 주로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해 주목을 받는다. 맨부커상을 타지는 못했지만 최종 후보short list에 단골로 오르는 작가로, <데어 벗 포 더>는 2011년 가디언 선정 올해 최고의 소설 가운데 하나로 선정된 바 있단다. 사라 우드라는 ‘연인’이 있다고 하는 걸 보니 동성‘결혼’은 하지 않은 것 같다.  책은 총 4부, 각 부의 이름이 데어There, 벗But, 포For, 더The로 되어 있다. 책을 다 읽으면 각 부의 이름이 전체 구조와 어떻게 관련지을 수 있는지 감을 잡을 수 있지만 지금 그걸 밝힐 수는 없다. ‘언제’가 문제일 뿐 소설애호가라면 이 책을 읽으실 터이니.

  이제 책 이야기를 해보자.

  6월의 런던 올드빅 극장에서는 제대로 된 연극을 만들기가 결코 쉽지 않은 <겨울 이야기> 낮 공연이 있었다. 이 공연에서 특석 바로 뒤, 그러니까 특석을 제외하고 가장 좋은 자리에 두 남자가 나란히 앉아 있는 것에서 <데어 벗 포 더> 이야기는 시작한다. (이건 책의 2장에서 나오는 장면이다.)어차피 세상의 많은 일은 피할 수 없는 우연에서 싹이 돋는다. 레온티즈 왕의 역을 맡은 사이먼 러셀 빌은 실감 나게 점점 광기에 휩쓸려가는 연기를 하고, 우리는 흔히 ‘헤르미온느’라고 발음하는 허마이어니 역을 맡은 젊은 배우 역시 대단히 매혹적이었다. 어려운 연극이 오랜만에 본궤도에 올라 절정으로 치달아, 부당하게 취급을 받은 왕비가 죽음에서 살아나 움직이며, 남편의 손을 잡고, 잃어버렸다가 찾은 딸 페르디타를 향해 몸을 돌려 극 중 처음으로 딸에게 말을 하려고 하는 순간, 무대 바로 앞쪽 좌석 누군가의 휴대전화가 터진다. 비비디 비비디 비디 빕. 비비디 비비디 비디 빕. 비비디 비비디 비디 빕.

  그리고는 불과 몇 분 후 연극이 끝난다. 늙은 동성애자 마크 파머는 옆자리에 앉은 전혀 모르는 남자 마일스 가스에게 말한다. “참 절묘한 순간에 전화가 울렸네요.”

  맞아요. 남자가 말한다.

  나 원 참. 마크가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나는 진심으로 한 말인데요. 그 남자가 말한다. 정말 절묘했어요. 극장이나 영화관에서 휴대전화가 울리는 걸 종종 들었는데 내가 들은 것 중에서 이번이 가장 적절할 때 울렸어요. 무대 위에서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해야 할 말이 정말로 필요한 바로 그 순간에 울린 거예요. 무대 위의 그 장면을 바라보는 관객석에서도 그와 같은 필요성이 있는 거죠. (독자 주석 : 공연 도중에 발생하는 해프닝도 퍼포먼스의 하나로 보는 아방가르드 적 감상법으로 이해함)

  이 대화를 시작으로 둘은 극장을 나가 한 잔 하기로 했고, 거기서 서로의 취향을 알아보고 즐거워진 마크 파머는, 예술방식에 관한 독특한 취향을 가진 마일스 가스와의 유대를 잇기 위한 그럴듯한 다음번 만남의 이유를 궁리하다가, 비밀 애인 휴고로부터 초대받은, 얼굴도 모르기는 하지만 그리니치의 제네비브와 에릭 리 부부의 집에서 이번 일요일에 있을 디너 파티를 떠올리기에 이른다. 이렇게 그리니치의 지식인 중산층 가정에서 열릴 파티에 참석하게 된 마일스 가스. 이이는 그곳에서 몇 주 후에 전 영국의 라디오와 TV에 소개가 될 기상천외한 행각을 벌이게 된다.

  디너 파티의 참석자는 먼저 호스트와 호스티스인 제네비브와 에릭, 이웃에 사는 연구원 부부 태런스와 버니스 베이우드, 그리고 이들의 아홉 살 먹은 매우 똑똑한 딸 브룩, 리 부부와 사업상 관계가 있는 휴고와 그의 아내 캐롤라인, 마이크로 드론 판매자 리처드와 해나 부부, 그리고 마크와 마일스. 마크는 동성애자인지 사람들이 다 알지만 그의 애인이 휴고란 건 아무도 모른다. 대신 함께 등장한 마일스가 연인일 것으로 짐작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화이트 와인을 곁들여 지식인 중산층다운 담소로 만찬을 시작한다. 여기서 술을 마시지 않는 두 명은, 운전을 해야 하는 채식주의자 마일스 가스와 연구소 다니는 흑인 부부의 딸 브룩. 즐거움은 알코올 흡수를 재촉하고 알코올은 기분을 고양시켜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라면 더 많은 알코올을 불러와 정찬을 다 마쳤을 때는 이미 많이 취한 상태에 달해, 지식이 많건 적건, 부자건 가난뱅이건 알코올 앞에서 만인이 평등한 수준에 이르렀고, 재미없게 이를 바라보던 마일스 가스는 2층으로 올라가더니 도통 내려오지 않는다.

  그래 안주인 제네비브가 2층 화장실에 가보니 사용한 흔적이 없어서 비록 예의상 그러면 안 되는 일이지만 슬그머니 가버린 모양이라 단정해버렸다. 이어서 파티를 끝내고 모두 집에 돌아간 다음에 보니 글쎄 마일스 가스의 재킷과 휴대전화와 차의 열쇠가 놓여 있더란 것. 다시 제네비브가 2층에 올라가 확인을 해보니까, 예비 침실 하나에 들어가 안으로 문을 걸어 잠근 걸 발견하게 된다. 키가 크고 정중한 이 남자는 리 부부와 문 아래 틈으로 메모를 적어 소통하며 지내기 시작했는데, 한 집에서 언제 나올지 모르는 생판 모르는 남자와 함께 낮과 밤을 지낸다는 것이 얼마나 큰 스트레스이겠는가 말이지.

  리 부부는 마일스의 휴대전화를 열어 저장되어 있는 애나 K.에게 이메일을 보내 자신들의 처지를 설명하고 마일스를 방에서 나올 수 있게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근데 정작 애나는 무려 삼십여 년 전, 방송국에서 글짓기 대회를 통과한 오십 명의 학생을 선발해 유럽 여행을 시켜준 행사에 마일스와 두 주일 동안 함께 한 인연 말고는 없었다는 것. 애나 입장에서도 매우 당황스럽고 일면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그리하여 마일스가 들어간 방 앞에 선 애나, 손을 들어 문을 두드리려다 멈추고, 마일스, 나 애나야. 문 좀 열어줄 수 있을까? 묻지만 방에선 여전히 감감무소식. 별수 없이 다시 집을 나서는 애나에게 제네비브는 지갑이 든 마일스의 재킷을 던지며 이건 당신 책임이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는데 애나라고 뭐 별 수 있겠어?

  이제 독자들은 사건의 해법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 책을 읽으면 조금씩 상황을 이해하게 되고, 태런스와 버니스 베이우드의 대단히 똑똑한, ‘똑똑한’을 넘어 햄릿을 인용하기도 하고, 어려운 ‘언어 유희’를 단숨에 이해하고 사용할 줄 알게 되는 아홉 살 난 ‘총명한’ 딸 브룩의 맹활약이 어떻게 마일스와 연결이 되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이 작품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자전거를 타고 뫼비우스의 띠 위를 달리는 카프카”라고 할 수 있는데, 마일스가 스스로 방 안에 갇히는 행위를 카프카의 그레고르와 비교할 수 있을 듯(사실 이건 누구나가 비교할 수 있고, 책에서도 애나가 사건을 듣자마자 카프카를 연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레고르가 방 안에서 회복 불가능한 딱정벌레로 바뀌고 만 것과 다르게 마일스 가스는 다분히 퍼포먼스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제 뫼비우스의 끝없는 순환과 자전거를 왜 난데없이 꺼내는지 말해야 할 것인데, 그건 절대 얘기하지 않겠다. 그게 결론이라서.

  나는 이 책이 대단히 매혹적이었다. 당연히 앨리 스미스의 다른 책을 검색했고, 몇 권을 보관함에 넣었으며, 적어도 한 권 이상을 올해가 가기 전에 읽어볼 예정이다. 그러나 조금 조심하셔야 하는 건, 이 작가야말로 독자와 합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나는 읽는 도중 열광해 마지않았는데 다른 독자도 다 나와 같지는 않을 듯하다.


  * 한 가지 더. 1894년에 프랑스 출신 테러리스트 마샬 부르탱이 그리니치 천문대를 폭파하기 위한 시도가 있었다. 그리니치. 세계의 표준, 시간과 방위의 표준을 규정하는 곳이라는 상징성이 있는 곳이다. 이에 폴란드 출신 영국 소설가 조지프 콘래드가 이를 소재로 <비밀요원>이란 책을 출간했다. 우리의 총명한 등장인물 어린 브룩이 콘래드의 <비밀요원>을 계속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만일 여건이 허락하면 <데어 벗 포 더>를 읽기 전에 콘래드의 <비밀요원>을 미리 읽으면 더없이 좋을 듯하다. 대산세계문학총서에서 왕은철의 번역으로 나와 있다. 잡화상 주인 벌록 씨를 주인공으로 하는 ’콘래드의 첩보 소설‘이라는 것만 가지고도 독자를 유혹할 수 있을 듯한데 의외로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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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4-26 09:2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자전거를 타고 뫼비우스의 띠 위를 달리는 카프카˝라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ㅎㅎ
저도 이 작품으로 처음 앨리 스미스를 접했는데요, 몇 권 더 읽어 보려고 장바구니에 담아뒀습니다. 아마 저도 올해 가기 전에 한 권은 더 읽어 볼 것 같아요. 그러나 폴스타프 님 말씀처럼 독자와의 합이 중요한 작가인 것 같습니다. ㅎㅎㅎㅎㅎ

암튼 낚시줄 잘 무셨네요. ㅋㅋㅋㅋㅋㅋㅋ 그나저나 저는 콘래드의 <비밀요원>을 물어갑니다. 감사합니다.

Falstaff 2021-04-26 09:31   좋아요 4 | URL
ㅋㅋㅋㅋ 콘래드 <비밀요원>이 재미는 별로 없어요. 19세기 사람이 쓴 거라서 요즘 작가들 같은 서스펜스, 스릴 이런 게 덜합니다.

<데어 벗 포 더>의 경우엔, 제대로 낚시하신 잠자냥 님에게 고마움을 표해야 마땅합니다. 고맙습니다!!!!!!

coolcat329 2021-04-26 10:1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일단 <비밀요원>을 읽어봐야겠네요. 기대를 안하고 읽으면 또 재미있을 수도 있겠다고 기대를 해보는것도 또 기대...이니 그냥 아무 생각없이 읽어야겠습니다.
이 리뷰도 호기심 많은 물고기님들의 많은 입질이 예상되네요. ㅎㅎ

Falstaff 2021-04-26 10:15   좋아요 3 | URL
기대를 안 하신다면야 ㅋㅋㅋㅋ
게다가 대산세계문학총서. 판형이 조금 크고 글자가 빽빽한 책이라 페이지 넘기기 쉽지 않다는 매력도 있습지요. 이렇게 써놓고 보니 좋다는 얘긴지, 아니라는 얘긴지 저도 잘 모르겠구먼요. ㅋㅋㅋㅋㅋ
<데어 벗 포 더>는 하여튼 합만 맞으면 대박입니다. 안 맞으면 코피 수준일 수도 있을 듯하니 조금 신중을 기하시는 것도 괜찮을 듯합니다.

유부만두 2021-09-13 00: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기가 막히게 재미있었어요!!!! 브룩이 어째 유색인종 같다는 느낌이 들면서 독자도 자꾸 책과 현실을 견주게 되더라고요. 브룩 쉴즈 언급도 반가웠고요.
멋진 책 추천에 다시 또 감사드립니다.

Falstaff 2021-09-13 08:47   좋아요 1 | URL
그죠, 그죠?
ㅋㅋㅋㅋ 이런 댓글 읽을 때가 기분이 제일 좋습니다!!
오히려 제가 더 고마울 정도로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