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8개월 28일 밤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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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은 성인을 대상으로 한 우화. 근래에 읽어본 가운데 작가와 독자의 합이 이것만큼 결정적으로 영향을 주는 작품은 없는 거 같다. 책을 읽고 나서 마음에 들거나 들지 않거나의 차이가 상당히 클 듯하지만, 만일 별점을 준다면, 살만 루슈디의 스리슬쩍 넘어가는 만연체 글 솜씨가 기본으로 별 세 개는 먹고 들어가는 바람에 다섯 개를 주느냐, 세 개를 주느냐의 갈림길에 서지는 않을까 싶다.
  나는 딱 한 가지 이유, 살만 루슈디가 쓴 새 책이 나왔다는 신간 알림을 받아 2020년 12월 30일에 초판 발행한 책을 보관함에 넣어두었다가 2021년 2월 2일에 주문해 사서, 2021년 4월 27일에 읽기 시작해 다음날 다 읽었다. 읽기 위해 책을 꺼내고서야 2년 8개월 28일이 며칠이나 되는지 계산해봤더니 1,001.333…일 이었다. 그러면 <천일야화>. 잔혹 엽기의 페르시아 샤리알 왕과 자진해서 결혼한 셰헤라자데가 여동생 두냐자데와 왕을 관객으로 두고 1,001 밤 동안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서 목숨을 구하는 전설. 프랑스 사람 앙투안 갈랑이 페르시아의 전설을 취하고 거기다가 원본엔 있지도 않은 알라딘의 요술 램프 등 몇 가지 이야기를 스스로 창작해 덧붙인 작품.
  셰헤라자데 왕비와 왕비 동생 두냐자데는, 존 바스가 자신이 쓴 <키메라>를 통해 주장한 바에 의하면, 천하의 폭군 샤리알 왕에게 옛 이야기를 해주고 밤이 깊으면 왕은 왕비와 잠자리에 들어 은은한 촛불을 켜놓은 상태로 방사를 치렀고, 두냐자데는 같은 방의 작은 침대 위에서 이들의 몸짓과 소리를 라이브로 구경할 수밖에 없었으며, 스스로도 달큰한 광경에 몸이 달아 어쩔 줄 몰랐다고 하는데, 클라이맥스는, 2년 8개월 28일째 밤에, 역시 방사를 치루고 나서 잠에 떨어진 거구의 건장한 왕에게 두 자매가 다가가서 페르시아의 반월도를 꺼내들어, 스윽, 왕의 목을, 참수했단다.
  존 바스가 이렇게 주장하고 어느새 43년이 흐른 2019년, 살만 루슈디는 바스보다 훨씬 거대한 우화를 꺼내 현대인에게 일침을 가하게 된다. 루슈디의 천일 하고도 하루 더는 <천일야화>와 별로 상관이 없다. 그것보다는 이이를 세계적인 스타덤에 오르게 만든 <악마의 시>, 해수면 만 미터 상공에서 공중 폭파된 비행기에서 떨어졌으나 살아남은 두 남자. 생존한 대신 한 명은 머리통에서 거대한 광배가 빛나기 시작하고 다른 한 명은 이마에 뿔이 돋고 발굽이 생겼으며 무지막지한 남근이 달렸다는 이야기와 연결되지는 않을까. 즉, 인간계와 마계가 있었는데 서기력 1195년, 아주 오랜만에 두 세계 사이에 틈이 생겨 인간계로 넘어와 당대 최고의 철학자 이븐루시드와 사랑을 맺어 천일 하고도 하루 동안 세 번 수태를 하고 일곱 쌍둥이, 열하나 쌍둥이, 열아홉 쌍둥이를 출산한 열여섯 살 가량의 외모를 가진 번개공주, 이 공주의 이름이 셰헤라자데의 동생 두냐자데와 비슷한 ‘두니아’와 비슷한 거 말고는 <천일야화>와 그리 잘 연결되는 건 없다.
  페리스탄이라고 들어 보셨나? ‘스탄’이라고 하니까 당연히 나라, 지역, 아니면 한 세계를 칭한다. 어떤 종족들이 사느냐 하면, 마족魔族. 마족의 남성은 진jinn, 여성은 진니아jinnia 또는 지니리jiniri라고 한다. 옛 이야기에서는 악마, 타락천사 루시퍼, 즉 아침의 아들을 마족의 우두머리로 오인하는데, 사실은 우리 인간세계와 베일 한 장 차이로 분리된 자기들의 세계 페리스탄이란 이름의 마계에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대개 괴팍하고 변덕스럽고 음탕하며 매우 빠를 속도로 이동할 수 있고, 심지어 변신도 가능하다. 물론 부도덕한 마족도 많지만 이 막강한 존재들 가운데 일부는 선과 악, 바른 길과 그른 길의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벼락을 마음대로 부리는 마족의 위대한 공주였던 어느 여마신은 위에서 말했듯이 마계와 인간계(하계) 사이의 베일 같은 간극이 살짝 벌려졌던 1195년, 세비야의 재판관이며, 고향 코르도바의 칼리프였던 아부 유수프야쿠브의 주치의이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인간 이성의 열렬한 숭배자였던 철학자 이븐루시드를 사랑해 그와의 사이에 수많은 딸, 아들을 생산했다. 아랍계 스페인 전역에서 역병처럼 퍼지며 날로 막강한 세력을 펼치던 광신도 베르베르 족에게 쫓겨나 유대인이라고 밝히지 못하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저 촌 구석 루세나로 귀양을 가 근본도 모르는 소녀와의 사이에 수십 명의 자손을 두게 된 나이든 철학자 이븐루시드는 숱한 아이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물려주지 않아 전부 사생아로 만들어버리고 귀양살이 2년 8개월 28일 만에 사면이 되자마자 다시 이베리아의 알함브라 궁으로 떠나버리고 만다.
  철학자는 일말의 양심이 남아 있어 하계에 내려와 자신을 사랑해 수많은 아이들을 낳은 신계의 위대한 공주 두니아에게 양육비를 보내주긴 했으나, 철학자에게 사업을 물려받아 항아리 장사를 계속 한 두니아는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아이들은 사막의 자갈들처럼 번성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귓불이 거의 없다는 거. 그리고 3백년의 세월이 흘러 페르난도 왕과 이사벨라 여왕이 무어족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축출하고, 유대인들마저 스페인에서 추방해버렸을 때 유대인이라고 말할 수 없었던 유대인들도 몽땅 추방되었는데, 하필이면 같은 동네인 루세나에서 살았던 이유 때문에, 그게 아니라도 저 선대의 아버지 이븐루시드 역시 무어인이었으니까 모든 두니아들도 카디스와 팔로스데모게르에서 배를 타거나, 도보로 피레네 산맥을 넘거나, 마족의 혈통답게 양탄자나 커다란 항아리를 타고 날아서 세상 방방곡곡으로 흩어진다.

 

  여기까지가 모두 열 개의 장 가운데 첫 번째 장 “이븐루시드의 후손”을 요약한 것이다.
  물론 진짜 중요한 건 아직 이야기하지 않았다. 지금부터 할 테니 주목하시라.
  이븐루시드는 칼라프의 수석주치의였다가, 베르베르 족에 의하여 축출을 당한 전력이 있다. 베르베르 족은 이성은 필요 없고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 믿는 광신도적 성향을 가졌다. 이들에게 종교적 신념을 심어준 인물은 이미 죽어 백골이 진토가 된, 정통 이슬람 신학에 신비주의 사상을 접목시킨, 현재는 이란 동북부의 옛 도시이며 시아파의 성지로 알려진 ‘투스’의 철학자 가잘리였다. 가잘리는 아리스토텔레스 등 그리스 철학자들과 신플라톤주의를 지지했던 이븐시나와 왈파라비를 비판했는데, 이븐시나와 왈파라비의 맥을 이은 후배가 바로 이븐루시드였던 것. 이러면 첫 번째  대결구도가 완성된다. 가잘리와 이븐루시드. 신비주의(원리주의)와 인간의 이성.
  하나 더. 가잘리가 살아생전 우연히 푸른색의 작은 유리병을 하나 주웠다. 가잘리야 말할 것도 없이 당대 최고의 신비주의자였으니 이 푸른색 병의 정체를 몰랐을 리가 없다. 마족에도 백마족과 흑마족이 있는데, 푸른 병 속에 유폐되어 있던 건 흑마족의 우두머리 급 지도자인 마왕 주무루드. 가잘리는 병을 손에 쥔 채 주무루드에게 자신의 요구조건을 이야기한다. 유럽 민화에 숱하게 나오는 세 가지 소원을 들어달라는 것. 그러나 언제 자신이 소원을 이야기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가잘리가 원할 때라고 확정, 맹세한 후에 주무루드를 병에서 해방시켜준다. 그리고 세월은 거침없이 흘러 가잘리는 백골로 돌아가고, 이븐루시드 역시 먼지만 남은 천 년 동안. 주무루드는 당연히 가잘리가 죽었으니 세 가지 소원은 날 샌 걸로 알고 마음 편하게 살아왔는데, 천 년이 흘러 신계와 하계에 다시 웜홀이 생겼을 때, 난데없이 가잘리의 영혼이 등장해 주무르드의 귓가에 소원을 속삭인다.
  “세상에 두려움을 심어주시오. 두려움은 곧 하느님의 메아리라고 할 수 있겠소. 메아리를 들을 때마다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자비를 애원하겠지.”
  주무루드가 대답한다.
  “하느님은 내 소관이 아니니까 모르겠고, 네 소원을 기꺼이 들어주겠다. 다만 조건이 있다. 두려움을 심어주기 위해 여러 가지를 해야 하니까 이 일이 끝나면 세 가지 소원을 다 들어준 걸로 하자.”
  “그럽시다.”
  이렇게 해서 주무루드를 위시한 흑마계의 네 위대한 마신들이 하계로 내려와 깽판을 치기 시작한다. 하계에는 백마계의 위대한 번개공주 두니아와 이븐루시드의 자손들이 깔려 있던 차. 사랑 많고 정 많은 정의의 번개공주 두니아가 다른 보통의 인간도 아니고 자기 새끼들이 주무루드, 어렸을 땐 어울려 사방치기, 다방구, 땅따먹기 했던 동무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꼴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나 어디. 그리하여 인간계에선 흑마계 대표(들)과 백마계 대표와 그녀의 자손들이 한 판 승부를 펼치니 이를 루슈디는 ‘이계전쟁’이라고 일컫는다.
  21세기 어느 날, 이계전쟁은 끝난다. 당연히 착한 우리 편인 백마계가 이긴다는 건 누구나 짐작할 수 있겠다. 그리고 또다시 천 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 인간들은 깊은 사색에 잠긴다.
  여기서 어떤 사색인지는 말할 수 없다. 에필로그까지 따라가야 살만 루슈디 정도 돼야 제시할 수 있는 의문문을 읽을 수 있으니까. 이 재미있는 책을 그저 이계전쟁으로 국한해 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루슈디의 질문을 가장한 주장에 적극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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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4-29 11: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호라... 독자와의 합이 중요한 책이군요.

저는 살만 루슈디가 쓴 새 책이 나왔다는 신간 알림을 받아 2020년 12월 30일에 초판 발행한 책을 보관함에 넣어두었다가 2021년 1월 21일에 장바구니에 담았다가, 2021년 3월 4일에 다시 보관함으로 옮겼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다시 장바구니에 돌아올 수 있을 것인가!

Falstaff 2021-04-29 11:40   좋아요 1 | URL
옙. 루슈디의 동화적 (그러나 어린이 ‘동‘자 대신 옥편엔 없지만 성인 ‘동‘자로 읽어야 마땅합니다. ㅋㅋ) 상상력이 만화처럼 펼쳐지는 게 분명히 몇 몇 독자에겐 불편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ㅋㅋㅋㅋ 도서관 가세요. 이런 거 함부로 낚시했다가 코피 터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ㅋㅋㅋㅋㅋㅋ

유부만두 2021-04-29 15: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신나게 재밌게, 한 판 굿처럼(?) 읽었어요. 독자가 원하면 원하는 대로 억만겁 (이때 중국을 뛰어넘는 인도의 뻥을 확인하고 말이죠)의 시공간을 펼치고 또 접고 하면서 사색과 철학도 하는거고요. 그런데 그런다고 루슈디 작가는 눈썹 하나 까딱할 것 같진 않지만요.
뭣보다도 번역이 좋았어요.

근데, 루슈디 동화책은 두 권짜리로 따로 있습니다. ^^

Falstaff 2021-04-29 15:57   좋아요 1 | URL
그죠, 그죠! 무척 재밌습니다. 이게 합이 맞아서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ㅋㅋㅋㅋ
루슈디 동화 가운데 저는 걍 하룬과 이야기바다 하나만 읽었습죠. 동화인지 소설인지 매우 헷갈렸지만 전 걍 소설로 치부했던 기억이 나네요.

잠자냥 2021-04-29 16:53   좋아요 1 | URL
번역이 김진준이군요. 이 사람 번역 좋아하는 분들이 많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