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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자 ㅣ 중국전통희곡총서 8
왕런제 지음, 김우석 옮김 / 연극과인간 / 2020년 9월
평점 :
짧은 글이니 <맹자>의 등문공滕文公 하편 10장을 읽어보자. (출처, <맹자집주> 홈페이지. http://www.dubest.net)
“광장匡章이 말하였다. "진중자陳仲子는 어찌 진실로 청렴한 선비가 아니겠습니까? 오릉於陵에 살 때에 사흘을 먹지 못하여 귀가 들리지 않고, 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물가에 자두(李)가 있었는데, 굼벵이가 열매를 반 이상이나 파먹었지만 기어가서 먹어 세 번을 삼킨 연후에야 귀가 들리고 눈이 보였습니다."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셨다.
"제齊나라 선비 중에서 내 반드시 중자仲子를 거벽巨擘(엄지손가락)으로 삼는다. 그러나 중자仲子가 어찌 청렴하다 하겠는가? ①중자仲子의 지조를 충족시키려면 지렁이가 되어야만 가능할 것이다.
지렁이는 위로 마른 흙을, 아래로 흐린 물을 마시나니, 중자仲子가 사는 집은 백이伯夷가 지은 것인가? 아니면 도척盜跖이 지은 것인가? 먹는 곡식은 백이伯夷가 심은 것인가? 아니면 도척盜跖이 심은 것인가? 이것을 알지 못하겠다."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는 몸소 신을 짓고 아내는 삼(麻)을 길쌈을 하여 곡식과 바꿔서 먹고 삽니다"
"중자仲子는 제齊나라에서 대대로 큰 벼슬을 한 집안사람(世家)이다. 그의 형兄 대戴는 합蓋땅에서 받는 녹祿이 만종萬鍾인데, 형의 녹祿을 불의不義의 녹祿이라 하여 먹지 않으며, 형의 집을 불의의 집이라 하여 살지 않고, 형을 피하며 어머니를 떠나서 오릉於陵에 살았다. ②훗날 형의 집에 돌아와 보니 그 형에게 산 거위를 선물한 자가 있었는데, 이맛살을 찡그리며 '이 꺽꺽대는 것을 어디에 쓰려는 것이요?'라고 했다. 다른 날에 그의 어머니가 거위를 잡아서 함께 먹고 있는데 그 형이 밖에서 들어와 말하기를 '이것이 꺽꺽대던 고기이다'하니, 밖에 나가서 토해 버렸다.
어머니가 주면 먹지 않고 아내가 주면 먹으며, 형의 집에서 살지 않고 오릉於陵에서 살았다. 이렇게 해서 자기가 지키는 지조를 충족시켜 내겠는가? 중자仲子 같은 자는 지렁이가 되어야 그 지조를 충족할 것이다."
범씨范氏 '하늘이 낳고 땅이 기르는 것에 오직 사람이 가장 크니, 사람이 위대한 까닭은 그 인륜人倫이 있음으로써다. 중자仲子는 형을 피하고 어미를 떠나서, 친척親戚과 군신君臣과 상하上下가 없으니 이는 인륜이 없는 것이다. 어찌 인륜이 없이 청렴이라 할 수 있겠느냐?'
나 역시 진중자 일화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진중자로 말하자면, 오직 하나. 다른 사람은 모르겠고 자신은 누구보다 순수하고 청렴한 삶을 살겠다고 다짐을 했으며 정말로 신념에 충실하며 사는 인간. 그리하여 이이 진중자는 스스로를 과하게 깨끗한 물, 너무 맑아 한 마리의 붕어, 가재, 개구리도 살 수 없는 초순수deionized water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초순수는 한문으로 超純水라고 쓴다. 물은 수소 두 개와 산소 하나가 결합한 상태. 이런 완전 물을 투명한 폴리카보네이트 상자 안에 담고 물속에 컬러 TV를 빠뜨린 다음, 전원을 연결하면 아주 고급스러운 화질로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감상할 수 있다. 만일 당신이 초고도 변비에 시달린다면 이 초순수를 소주잔으로 한 잔만 마시면 20분 안에 완벽하게 당신의 대장을 청소할 수 있다. 다만 어떤 후유증을 겪을지는 검증해본 적이 없어 문제일 뿐. 이 속에 붕어, 가재, 개구리를 빠뜨린다? 여지없이 즉사.
위에 인용한 <맹자> 등문공 하편 10장에서 맹자가 일갈한 것도, 주인공 진중자가 앞뒤, 좌우, 상하를 가리지 않고 오직 자신 혼자 순수, 청렴하고자 했기 때문. 나도 이 희곡을 다 읽고 나서, 극작가가 어찌 이런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을 썼을까, 상당한 의심이 들었다. 이 정도면 청렴한 수준을 넘어 가히 신경정신과 적으로 편집증 증세가 농후한 인물이라 해야 하겠기 때문이었다.
이건 역자의 해설을 읽어보고 해소되었다. 왕런제는 진중자를 귀엽고 존경스러운 인물, 다른 측면에선 우습고 슬픈 인물로 보고 있다. 과하게 고리타분하고 너무 극단적인 성격과 행위가 두 가지 다, 우습고 슬픈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어, 그럴 수 있겠구나.
두 번째 의문. 극이 평면적이라 재미가 없다. 희곡이 이렇게 재미없는데 성공한 공연이 될 수 있을까. 이건 그냥 의문. 만일 현대 희곡이 재미가 없어서 공연에 실패했다면 우리나라에 번역, 소개했을 턱이 없으니. 그러면 뭐가 문제일까. 내가 이방의 언어로 숨어 있는 코드를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싶은 마음으로 본문을 다 읽었음을 굳이 숨기지 못하겠다. 역시 해설에 나와 있는 힌트. 희곡과 공연 사이의 간극이 정답이었다. 우리는 이 간극, 좁은 틈을 자주 ’연출‘이라고 부른다.
저 위에 소개한 <맹자>에서 ①지렁이가 되어야만 중자의 지조를 충족시킨다고 한 내용 ②선물 받은 거위를 먹고 토하는 장면을 왕런제는 거위의 경쾌한 춤과 지렁이 춤으로 만들어 진중자의 자의식을 놀리고 훈계하는 것으로 표현했는데, 이 역할을 극중 내내 아무 생각 없이 오직 지아비의 뜻을 좇는 아내 역의 배우에게 맡겨 의미심장한 암시를 주었다고 한다. 이 장면은 해설을 읽어야만 알 수 있는 것. 종이 위에 지워지지 않게 검은 잉크로 인쇄된 하드웨어를 무대연출을 포함한 연출과 배우들의 표현을 통한 호소라는 소프트웨어로 만들 때의 다른 점은 오선지 위의 악보와 연주실황 차이보다 훨씬 더 큰 것이 아닐 수 없을 터. 즉각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작품 <진중자>는 내용을 통해 얻는 맹자의 가르침보다는 희곡을 한 버전 업데이트하는 연극으로 전환할 때의 방법과 가능성에 대하여 생각해볼 좋은 기회였다. 맞다. 희곡의 궁극적인 목적은 극이다. 이 분명한 것을 오래 잊고 지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