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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어 벗 포 더
앨리 스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민음사 / 2020년 7월
평점 :
기쁜 마음으로 또 하나의 문제작을 소개한다. 이름도 처음 듣는 스코틀랜드 아줌마 앨리 스미스Ali Smith가 쓴 <데어 벗 포 더>. 작가 앨리 스미스, 스칸디나비아계 선조를 가진 것 같은 외모의 스미스는 1962년 임인년 범띠로 스코틀랜드 인버네스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애버딘 대학을 졸업한다. 85년부터 다시 케임브리지에서 미국, 아일랜드의 모더니즘을 공부하긴 하는데, 희곡을 쓰는데 맛이 들어 학위를 따지는 못하고 다시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로 옮긴다. 이후 약 2년 가까이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다 만성피로증후군 판정을 받아 일을 그만두고 다시 케임브리지로 간 스미스는 웨이트리스, 관광 보조원 등을 전전하며 처음엔 주로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해 주목을 받는다. 맨부커상을 타지는 못했지만 최종 후보short list에 단골로 오르는 작가로, <데어 벗 포 더>는 2011년 가디언 선정 올해 최고의 소설 가운데 하나로 선정된 바 있단다. 사라 우드라는 ‘연인’이 있다고 하는 걸 보니 동성‘결혼’은 하지 않은 것 같다. 책은 총 4부, 각 부의 이름이 데어There, 벗But, 포For, 더The로 되어 있다. 책을 다 읽으면 각 부의 이름이 전체 구조와 어떻게 관련지을 수 있는지 감을 잡을 수 있지만 지금 그걸 밝힐 수는 없다. ‘언제’가 문제일 뿐 소설애호가라면 이 책을 읽으실 터이니.
이제 책 이야기를 해보자.
6월의 런던 올드빅 극장에서는 제대로 된 연극을 만들기가 결코 쉽지 않은 <겨울 이야기> 낮 공연이 있었다. 이 공연에서 특석 바로 뒤, 그러니까 특석을 제외하고 가장 좋은 자리에 두 남자가 나란히 앉아 있는 것에서 <데어 벗 포 더> 이야기는 시작한다. (이건 책의 2장에서 나오는 장면이다.)어차피 세상의 많은 일은 피할 수 없는 우연에서 싹이 돋는다. 레온티즈 왕의 역을 맡은 사이먼 러셀 빌은 실감 나게 점점 광기에 휩쓸려가는 연기를 하고, 우리는 흔히 ‘헤르미온느’라고 발음하는 허마이어니 역을 맡은 젊은 배우 역시 대단히 매혹적이었다. 어려운 연극이 오랜만에 본궤도에 올라 절정으로 치달아, 부당하게 취급을 받은 왕비가 죽음에서 살아나 움직이며, 남편의 손을 잡고, 잃어버렸다가 찾은 딸 페르디타를 향해 몸을 돌려 극 중 처음으로 딸에게 말을 하려고 하는 순간, 무대 바로 앞쪽 좌석 누군가의 휴대전화가 터진다. 비비디 비비디 비디 빕. 비비디 비비디 비디 빕. 비비디 비비디 비디 빕.
그리고는 불과 몇 분 후 연극이 끝난다. 늙은 동성애자 마크 파머는 옆자리에 앉은 전혀 모르는 남자 마일스 가스에게 말한다. “참 절묘한 순간에 전화가 울렸네요.”
맞아요. 남자가 말한다.
나 원 참. 마크가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나는 진심으로 한 말인데요. 그 남자가 말한다. 정말 절묘했어요. 극장이나 영화관에서 휴대전화가 울리는 걸 종종 들었는데 내가 들은 것 중에서 이번이 가장 적절할 때 울렸어요. 무대 위에서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해야 할 말이 정말로 필요한 바로 그 순간에 울린 거예요. 무대 위의 그 장면을 바라보는 관객석에서도 그와 같은 필요성이 있는 거죠. (독자 주석 : 공연 도중에 발생하는 해프닝도 퍼포먼스의 하나로 보는 아방가르드 적 감상법으로 이해함)
이 대화를 시작으로 둘은 극장을 나가 한 잔 하기로 했고, 거기서 서로의 취향을 알아보고 즐거워진 마크 파머는, 예술방식에 관한 독특한 취향을 가진 마일스 가스와의 유대를 잇기 위한 그럴듯한 다음번 만남의 이유를 궁리하다가, 비밀 애인 휴고로부터 초대받은, 얼굴도 모르기는 하지만 그리니치의 제네비브와 에릭 리 부부의 집에서 이번 일요일에 있을 디너 파티를 떠올리기에 이른다. 이렇게 그리니치의 지식인 중산층 가정에서 열릴 파티에 참석하게 된 마일스 가스. 이이는 그곳에서 몇 주 후에 전 영국의 라디오와 TV에 소개가 될 기상천외한 행각을 벌이게 된다.
디너 파티의 참석자는 먼저 호스트와 호스티스인 제네비브와 에릭, 이웃에 사는 연구원 부부 태런스와 버니스 베이우드, 그리고 이들의 아홉 살 먹은 매우 똑똑한 딸 브룩, 리 부부와 사업상 관계가 있는 휴고와 그의 아내 캐롤라인, 마이크로 드론 판매자 리처드와 해나 부부, 그리고 마크와 마일스. 마크는 동성애자인지 사람들이 다 알지만 그의 애인이 휴고란 건 아무도 모른다. 대신 함께 등장한 마일스가 연인일 것으로 짐작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화이트 와인을 곁들여 지식인 중산층다운 담소로 만찬을 시작한다. 여기서 술을 마시지 않는 두 명은, 운전을 해야 하는 채식주의자 마일스 가스와 연구소 다니는 흑인 부부의 딸 브룩. 즐거움은 알코올 흡수를 재촉하고 알코올은 기분을 고양시켜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라면 더 많은 알코올을 불러와 정찬을 다 마쳤을 때는 이미 많이 취한 상태에 달해, 지식이 많건 적건, 부자건 가난뱅이건 알코올 앞에서 만인이 평등한 수준에 이르렀고, 재미없게 이를 바라보던 마일스 가스는 2층으로 올라가더니 도통 내려오지 않는다.
그래 안주인 제네비브가 2층 화장실에 가보니 사용한 흔적이 없어서 비록 예의상 그러면 안 되는 일이지만 슬그머니 가버린 모양이라 단정해버렸다. 이어서 파티를 끝내고 모두 집에 돌아간 다음에 보니 글쎄 마일스 가스의 재킷과 휴대전화와 차의 열쇠가 놓여 있더란 것. 다시 제네비브가 2층에 올라가 확인을 해보니까, 예비 침실 하나에 들어가 안으로 문을 걸어 잠근 걸 발견하게 된다. 키가 크고 정중한 이 남자는 리 부부와 문 아래 틈으로 메모를 적어 소통하며 지내기 시작했는데, 한 집에서 언제 나올지 모르는 생판 모르는 남자와 함께 낮과 밤을 지낸다는 것이 얼마나 큰 스트레스이겠는가 말이지.
리 부부는 마일스의 휴대전화를 열어 저장되어 있는 애나 K.에게 이메일을 보내 자신들의 처지를 설명하고 마일스를 방에서 나올 수 있게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근데 정작 애나는 무려 삼십여 년 전, 방송국에서 글짓기 대회를 통과한 오십 명의 학생을 선발해 유럽 여행을 시켜준 행사에 마일스와 두 주일 동안 함께 한 인연 말고는 없었다는 것. 애나 입장에서도 매우 당황스럽고 일면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그리하여 마일스가 들어간 방 앞에 선 애나, 손을 들어 문을 두드리려다 멈추고, 마일스, 나 애나야. 문 좀 열어줄 수 있을까? 묻지만 방에선 여전히 감감무소식. 별수 없이 다시 집을 나서는 애나에게 제네비브는 지갑이 든 마일스의 재킷을 던지며 이건 당신 책임이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는데 애나라고 뭐 별 수 있겠어?
이제 독자들은 사건의 해법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 책을 읽으면 조금씩 상황을 이해하게 되고, 태런스와 버니스 베이우드의 대단히 똑똑한, ‘똑똑한’을 넘어 햄릿을 인용하기도 하고, 어려운 ‘언어 유희’를 단숨에 이해하고 사용할 줄 알게 되는 아홉 살 난 ‘총명한’ 딸 브룩의 맹활약이 어떻게 마일스와 연결이 되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이 작품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자전거를 타고 뫼비우스의 띠 위를 달리는 카프카”라고 할 수 있는데, 마일스가 스스로 방 안에 갇히는 행위를 카프카의 그레고르와 비교할 수 있을 듯(사실 이건 누구나가 비교할 수 있고, 책에서도 애나가 사건을 듣자마자 카프카를 연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레고르가 방 안에서 회복 불가능한 딱정벌레로 바뀌고 만 것과 다르게 마일스 가스는 다분히 퍼포먼스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제 뫼비우스의 끝없는 순환과 자전거를 왜 난데없이 꺼내는지 말해야 할 것인데, 그건 절대 얘기하지 않겠다. 그게 결론이라서.
나는 이 책이 대단히 매혹적이었다. 당연히 앨리 스미스의 다른 책을 검색했고, 몇 권을 보관함에 넣었으며, 적어도 한 권 이상을 올해가 가기 전에 읽어볼 예정이다. 그러나 조금 조심하셔야 하는 건, 이 작가야말로 독자와 합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나는 읽는 도중 열광해 마지않았는데 다른 독자도 다 나와 같지는 않을 듯하다.
* 한 가지 더. 1894년에 프랑스 출신 테러리스트 마샬 부르탱이 그리니치 천문대를 폭파하기 위한 시도가 있었다. 그리니치. 세계의 표준, 시간과 방위의 표준을 규정하는 곳이라는 상징성이 있는 곳이다. 이에 폴란드 출신 영국 소설가 조지프 콘래드가 이를 소재로 <비밀요원>이란 책을 출간했다. 우리의 총명한 등장인물 어린 브룩이 콘래드의 <비밀요원>을 계속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만일 여건이 허락하면 <데어 벗 포 더>를 읽기 전에 콘래드의 <비밀요원>을 미리 읽으면 더없이 좋을 듯하다. 대산세계문학총서에서 왕은철의 번역으로 나와 있다. 잡화상 주인 벌록 씨를 주인공으로 하는 ’콘래드의 첩보 소설‘이라는 것만 가지고도 독자를 유혹할 수 있을 듯한데 의외로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