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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로토닌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7월
평점 :
반으로 쪼개지는 작고 하얀 타원형 알약, 캅토릭스.
초창기에 보급된 항우울제 5-HT1 ’세로플렉스‘나 ’프로작‘은 혈액 내 세로토닌의 비율을 증가시키는 작용을 했으나, 2017년 캅톤 D-L이라는 새로운 세대의 항우울제는 위장 점막에서 생생된 세로토닌의 세포외 유출을 촉진시키는 작용을 했으며 약의 이름을 캅토릭스라고 했다. 이 약의 달갑지 않은 부작용으로는 구토와 리비도 상실 및 성기능 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고 한다. 즉 복용자 전부가 구토와 성기능 장애, 한 발 더 나가서 리비도 상실을 경험하는 건 아니라는 뜻.
그러나 <세로토닌>의 주인공 플로랑클로드 라브루스트는 당년 46세로 우울증 증세가 있어 15mg짜리 캅토릭스를 한 번에 반년 치 처방을 받아 매일 복용하고 있는데 구토는 없지만 아쉽게도 리비도 상실과 발기부전 증세를 피할 수는 없었다. 여태 우엘벡을 읽어온 독자라면, 우엘벡의 작품 속 남자 주인공이 발기부전은 뭐 다른 약물의 도움을 받으면 해소될 수 있으니 그렇다고 쳐도 리비도까지 상실했다는 것은 도무지 믿지 못할 수도 있으며, 심지어 리비도가 빠진 우엘벡을 뭐 하러 읽느냐, 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크게 걱정하지 마시라. 리비도가 충만하지 않아도 플로랑클로드는 만 46세로 할 만큼 했을뿐더러, (할 만큼 한) 지난 세월을 회고할 수 있는 지력이 있으며, 무엇보다 현재의 여인, 소설이 시작하고 얼마 안 있어 그녀로부터 도망해버리기는 하지만 가히 님포매니악Nymphomaniac 수준에 달하는 일본인 애인 유주가 등장해 당신의 기대를 충족시키는데 부족함이 크지는 않을 테니까.
우리가 프랑스, 하면 예술과 패션, 사상 등의 소프트웨어에 집중해서 그렇지 프랑스는 세계 2위의 농산물 수출국이(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와 전 세계적으로 유전자 변형 농업이나 특히 기업형 대규모 농업이라는 추세에는 적절하게 맞춰나가는 것 같지 않다. 이번에 <세로토닌>을 읽으며 알게 된 거다. 땅이 좁은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어마어마하게 크겠지만 상대적으로 기계화되지 못한 프랑스 농업은 세계각지에서 저렴하게 밀려 들어오는 농산물과의 가격 경쟁력에서 밀리고, 국내 대형 유통기업마저 농민들에게 수입농산물과의 가격 차이를 좁히라는 요구하고 있는 처지다. 신자유주의는 농업이라고 예외를 두는 법이 없어 농민들은 힘겨운 구조조정을 요구받고 있다고, 우엘벡은 주장한다.
그리하여 작가는 주인공 플로랑클로드 라브루스트를 대학에서 농학을 전공하고 지금은 농산부에 고용되어 유럽 행정부와 가끔은 더 넓은 범위의 무역협상 테이블의 교섭위원에게 제시할 보고서와 평가서를 작성하며 주로 프랑스 농업의 위치를 규정하고 지지, 소개하는 일을 한다고 설정했다. 위촉직이라서 공무원 연봉을 훌쩍 넘는 고액의 보수를 받아 부족하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으며 지금도 예금통장엔 칠십만 유로가 넘는 잔고를 확보하고 있다. 소설은 이 중년 사내의 예금 잔고가 이십만 유로 수준으로 떨어질 때까지, 일 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15mg에서 20mg의 단위의 캅토릭스로 갈아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첫 장면은 스페인 알메이라의 340번 국도 옆 주유소. ’나‘는 메르세데스 G350 사륜구동차에 경유를 채우고 제로 칼로리 콜라를 홀짝거리고 있었는데 폭스바겐 비틀이 다가오더니 짧은 치마와 핫 팬티를 입은 두 스페인 아가씨가 차에서 내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역시 우엘벡답게 완벽하게 동그란 엉덩이를 가진 탱크 톱 차림의 아가씨들. 이들에게 타이어 공기압을 보충해주고, 보충방법을 일러준 다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고 떠난다. 그러나 이들의 끈팬티와 몇 장의 옷만 든 것 같은 작은 짐꾸러미를 포함해 아가씨들의 동그란 엉덩이에 대한 인상은 앞으로도 근 이백 쪽 이상 가끔이긴 하지만 계속 등장할 예정이다. 젊음과 성, 몸과 관련해서. 2주간 휴가를 받아 스페인에서 지내기로 하고, 비행기로 도착하는 애인 유주를 마중 나가는 길에 잠깐 만난 아가씨들.
유주는 애초에 함께 살지 말았어야 했지만 너무 오랫동안 삶을 주체적으로 결정하지 못해왔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어영부영 동거하게 된 여자. 일본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지금은 파리의 일본문화원에서 일하고 있는데, ’나‘가 경험한 유주의 프로젝트는 만화 전시회와 일본 포르노의 새로운 경향에 대한 박람회밖엔 없다. 모르긴 해도 부모의 알선으로 다른 곳도 아닌 프랑스에서 별정직 공무원 자리를 얻은 것 같다. ’나‘하고는 스무 살 차이가 나서 지금 26세. 유주를 비난해야 할 점은 무척 많은데, 가장 비난해야 할 건 난교파티에 출입한다는 것. 베튄 강변로의 대 저택에서 백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모여 주로 남자 둘에 여자 하나꼴로 여기저기에서 막 관계를 하고, 대체로 보면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어리고 지위도 낮은 듯했다.
’나‘가 결정적으로 유주와의 관계를 정리하고자 하는 마음이 든 건, 유주의 이메일을 볼 기회가 생겨 발견한 동영상 때문이었다. 첫 번째 동영상엔 유주와 열다섯 명의 사내들이 등장해 온갖 방법의 포르노를 실사하고 있었고, 두 번째 영상엔……, 이건 드러워서 내 손으로 자판을 누르지 못하겠다. 궁금하면 읽어보시든지. 하여튼 우엘벡, 미친놈이다, 미친놈. ’나‘가 도저히 참지 못하겠던 것은 첫 번째 동영상을 찍은 장소가 바로 ’나‘의 집 안방이었다는 점과 두 번째 동영상 자체였다. 그리하여 역겨워서 더 이상 보지 못하고 40킬로그램 밖에 나가지 않는 유주를 납작 들고 아파트 창문 밖으로 집어 던져 버릴까, 하다가 유주의 성적 기교의 탁월함 때문인지 하여튼 오늘에 이르렀던 것. ’나‘가 분명히 정상이 아닌 것이, 그러면서 뭐하러 스페인까지 둘이 함께 가기로 하고, 두 주의 휴가를 한 주로 줄이다가, 그것도 중도에 더 빨리 그 먼 길을 운전해 돌아오느냐는 말이지. 하여튼 ’나‘는 그렇게 했다, 파리 15구 토템 타워 30층의 커다란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 도착한 후, 유주와 헤어지기 위하여, 라기보다, 지병처럼 달고 다니는 우울증이 도져서 그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울증에 영향을 준 건 당연히 유주의 문란한 성생활 때문이겠지만 그렇게 생긴 틈으로 ’나‘의 영원한 연인 카미유에 대한 그리움이 자리를 잡는다. ’나‘는 유주로부터 도망하기 위한 방법으로 ”자발적 실종“을 택한다. 실제로 프랑스에선 매년 만이천 명이 가족을 등진 채 사회에서 사라져버린다고 한다. 유주가 가족은 아니니까 양심의 가책도 받을 필요가 없는 ’나‘는 농산부에 가서 아르헨티나로 직장을 옮긴다는 거짓 핑계로 사표를 내고, 거래은행을 바꾸고, 두 주 후에 아파트 월세 계약을 종료시킨 다음, 파리에서 찾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흡연 가능한 메르퀴르 호텔의 니오르 마랭푸아트뱅 지점으로 거처를 옮긴다.
자발적 실종. 자유는 주체성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상부에서 하달된 수칙에 대한 하급자의 반감이나 일종의 불복종, 또는 2차 세계대전 직후에 등장한 다양한 실존주의적 연극에서 이미 묘사된 개인의 도덕심에 대한 반항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나‘의 자발적 실종의 변명.
이리하여 ’나‘ 플로랑클로드는 현상의 사회에서 이탈해 과거로, 주로 과거의 여인들로 퇴행해버리고, 급기야 아무 남자하고 맺은 관계로 낳은 아들 하나를 키우며 사는 ’나‘의 베아트리체, 수의사 카미유를 관찰하기에 이른다.
’나‘는 작품 전체에서, 한 번도 쉬지 않고 사람 사이를 공고하게 만드는 건 몸이라고, 섹스가 없으면 혼인관계는 물론이고 어떠한 남녀, 또는 동성간의 사랑이 계속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반면에 이와 정반대의 중년 남자, 발기부전은 물론이거니와 리비도까지 상실한 남자를 등장시켜 가슴 속의 유일한 연인을 찾게 만든다. 이들 사이엔 죽음이란 깊은 단절이 있는 셈이다. 만일 20mg 단위의 캅토릭스 복용을 통해 세로토닌을 유지하기를 포기하기만 하면 먼저 리비도가 환원이 되고 이어서 발기부전 증세도 없어지겠지만 눈에 띄게 깊어가는 우울증 증세로 어느 날 권총으로 머리통을 날려버리거나 고층 아파트의 창문에서 몸을 던질지 모를 일이다. 사랑을 위해서는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하고, 목숨을 위해선 리비도 망실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나‘ 플로랑클로드. 이 진퇴양난의 까마득한 벼랑 위에 선 남자의 이야기.
● 잘 살기(well being)와 행복감을 유발하는 물질인 세로토닌이 위장 점막에서 생성된다는 점을 명심하자. 역시 잘 먹는 게 최고다. 먹다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고, 58년 개띠 미국 가수이자 영화배우 마돈나는 맛있는 거 먹는 게 섹스보다 좋다고 했다. 당신은 왜 일을 하는가. 다 먹자고 하는 일. 오늘 점심은 봉평장터 가서 돼지 석갈비에 반주 한 병 까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