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짐승아시아하기 문지 에크리
김혜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애정하는 출판사 문학과지성사에서 새로운 산문 시리즈를 출간했다.

 

이름하여 <문지 에크리>

에크리란 프랑스어로, 씌어진 것 혹은 쓰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시리즈는 작가에게 최대한 자유로운 글쓰기 방식을 허용하는 데서 시작하고 있다.

작가는 어떤 대상이나 주제와 상관없이 애정하는 관심사에 대해 쓴다. 그래서 이 시리즈의 글은 장르적 경계를 넘는다. 작품을 통해 만나는 작가의 모습에선 볼 수 없었던 좀 더 개인적인 내밀한 영역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 같다.

 

1차분 4권이 출간되었다.

작고한 고 김현 평론가, 시인 김혜순과 김소연 그리고 문학평론가 이광호가 그 주인공들이다.

책 뒷날개에는 출간 예정인 저자들의 이름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그 면면이 기대할만 하다. 예를들면 내가 기대하는 저자를 꼽아보자면, 이제니, 이장욱, 정영문, 진은영, 한유주 등이다.




특히나 평론가 이광호는 자신이 키우는 고양이를 대상으로 한 글을 썼는데 많은 애묘인들이 읽어보면 좋지 않을까 싶었다.

 

책의 크기나 만듦새도 다 마음에 드는데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고 하더라도 문지 에크리 라는 하나의 시리즈 안에 들어가는 책들의 디자인 치고는 좀 쌩뚱맞은게 아닌가 하는 점이다. 특히나 김혜순 시인의 책만 검은색 바탕에 표지 그림도 공통적인 느낌이 없다. 저자의 요청에 의해 특정 화가의 그림을 쓴 것 같은데 아쉽다. 뭐 책덕후들이 흔히 하는 책품평을 조금 해봤다.

 

1차분 네 권 가운데 나는 당연하게도 애정하는 김혜순 시인의 책을 골랐다.

이 산문을 통해 시인 김혜순이 시를 쓸 때 느끼는 바나 자신의 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등을 읽을수 있어 김혜순의 시를 좀 더 가깝게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라면 읽어봐야할 책이라

그 이유는 책머리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어서 한번 옮겨와 봤다.

 

 

ㅡ책머리에

 

나는 시를 써오는 동안 왜 그토록 많은 쥐, 돼지, , 곰 등등과 유령, 여자로서 시 안에 기거했던가?

나는 그것에 대해 쓰지 않고, 그것을 '한다'고 생각했던가?

나는 왜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죽은 자, 사라진 자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던가?

나는 산문을 쓰면서는 왜 그토록 자주 바리공주를 호명했던가?

나는 바리공주가 아버지의 나라를 반쪽 떼어 주겠다는 제의도 거절한 채, 이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 죽은 자를 건네주는 영구적인 직업으로 뱃사공을 선택한 것처럼, 나 스스로의 여행을 떠나보기로 했다.

 

_부분

 

김혜순 시인의 시를 오래 읽어온 독자라면 그의 시 안에서 유독 자주 등장하는 동물 하나를 꼽으라고 할 때 쥐라고 한다면 대개가 수긍하리라 본다. 그리고 바리데기에 대한 책을 쓰기도 한 저자인만큼 김혜순과 바리데기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봐야 한다.

 

여자짐승아시아하기 라는 제목을 이루는 각각의 낱말을 하나씩 떼어낸 다음 그 의미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여자로써 짐승으로써 아시아에서 여러 주체가 되어 하게되는 하기 로써의 글쓰기인 것이다.

 

최근 출간된 저자의 시집 날개 환상통에서 평론가 이광호는 -하기를 통해 김혜순 시를 언급했다. 이처럼 무엇무엇 하기 라는 것은 시인 김혜순이 붙잡고 있는 시적인 화두가 아닐까 싶은데 이 책을 통해 살짝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이 책은 티벳, 인도, 실크로드를 잇는 지리적 환경에서 씌어지는데 그 가운데 특히나 붉음으로 대표되는 실크로드의 출발과 몽골까지 이어지는 여정에서의 글들이 나는 좋았다 그 가운데 한 편의 일부를 소개해 본다.

 

 

붉은 책

 

이것은 해가 지지 않는 책.

내가 서쪽으로 서쪽으로 이 책을 읽어가면 영원히 황혼이 계속되는 책.

이 책은 사막의 영혼, 모래의 날개.

 

당신이란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미칠 지경이다.

당신이란 붉은 책은 한번 펼쳐지면 다시 닫을 수가 없다.

아마 지옥이 그럴 거다, 지옥이란 다시 돌이킬 수가 없는 곳.

당신을 접으려 하면 당신은 읽어라 읽어라 읽어라 펼쳐질 줄밖에 모른다.

당신은 한번 빠지면 실종되려야 실종될 수가 없는 열탕 지옥이다.

이 사막에선 이 세상 사람 모두가 혹은 모래 알갱이 전부가 나만 쳐다보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_부분



앞서 올린 여행생활자 영상에서 이야기 했듯이 나는 사막에 대한 불온한 상상이랄까 로망을 품고 있는데 붉음 으로 묶여진, 심지어 붉은 종이 위에 씌어진 사막과 모래, 태양, 사라진 국가 등 결국 가지 못할 붉은 사막에 대한 문장이 주는 막연한 만족이 주는 체념을 즐기는지도 모르겠다.

책머리를 보면 알겠지만 이 책은 산문이지만 산문의 모래언덕에 발이 빠져가며 오르다보면 저자의 시세계를 마치 신기루처럼 만나지 않을까 싶은 설레임 가득한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행생활자 -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여행기
유성용 지음 / 사흘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결국 여행이란 삶을 등지고 죽음의 냄새를 맡으러 가는 머나먼 길이다.


_96p



소개하는 책들 가운데 가끔 절판된 책들인 경우가 있다. 지금 소개하는 책도 절판된 책이라 너무 아쉽다. 다행히 이 책은 중고서점에 어느 정도는 깔려 있다. 책을 소장용으로 구분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책이란 물건이 한번 나왔다고 계속 나온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 말이다.


지인들에게 여간해서 책을 추천하지 않는 나는 이 책을 읽고 강추한다는 말을 여기저기 날리곤 했었다. 제목을 봐서 짐작하겠지만 여행에 대한 책이긴 한데 여행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 전달의 책이 아니라 티베트와 인도, 스리랑카, 네팔 등지를 떠돌며 느낀 저자의 주관적 감상과 감성적인 글들이 폭발하는 여행서이기에 누군가는 정보가 없다며 불만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라면 여기서 스킵하시라. 본인이 감성적 글들을 좋아하고 잘 빠진다면 이 책을 읽어라, 두 번 읽어라.




나라는 인간은 여행을 그리 즐기는 인간이 아니다. 기껏 여행이라고 가봤자 하루 시간을 내어 지방의 어느 소도시 후미진 뒷골목이나 배회하다 오는 그 정도일 뿐이고 그것마저 수 년에 한 번 갈까말까다. 하물며 나혼자 떠나는 해외여행은 언감생심 거기가 어디라고 가나 싶다.

그런데 여행생활자라니. 여행이 생활이고 생활이 여행이라니 이 무슨 거지발싸개 같은 소린가 싶어 책을 집어 들었고 완전 몰입해서 읽게 되었다.


이 영상은 지극히 사적인 기분에 휩싸인 다소 우울한 영상이다

거기에 여행 자체에 대한 내용 소개는 참새 눈물 만큼도 없다.

그런게 싫은 사람은 여기서 스킵하시라.

고 나는 분명 경고 한다.


여행과 생활이라는 말은 동류항으로 묶일 수 없다.

생활의 냄새가 없는 것이 여행이고 여행이 배제되는 것이 생활이다. 그런데 여행생활자라니. 여행을 생활로 삼는 사람이라니. 하다가 곧바로 아- 그럴 수도 있는 거구나. 했다.

지긋지긋한 생활을 정리하고 여행을 생활로 삼는것. 어떤 강단이 필요한 일인데 그런 게 없으니 내 생활은 더 졸렬하다. 떠날 수 있다면 이까짓 생활쯤이야 하겠지만 여기에 발 묶여 뒤뚱대고 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의 책을 들여다보는 순간 마음이 미쳐 날뛸 수밖에 없다.


살면서 여행 한번 안다녀 본 적 없는 사람은 드물다. 학창시절 수학여행이든 혼자 훌쩍 떠나는 여행이든. 여간해서 여행 같은 거 다니지 않는 내가 딱 한번으로 족하는 여행이 있다. 사막으로 들어가기만 하는 여행이다 그리고 나오지 않는 여행.


생활에 찌든 자들은 산정으로 올라야 하고 죽음에 찌든 자들은

마을로 내려와야 한다. 그리고 분명 그 길은 넓게 열려 있어야 한다.

그 길을 막아두고 자동펌프처럼 생활의 의욕만을 자꾸 밀어붙이는

사회는 참으로 무서운 사회일 것이다.

그대가 생활에 붙박여 있다면 마음속에서나마 저만의 산정 하나쯤

마련해두길 바란다. 그 곳에서 언제라도 세상 끝으로 다가가

다시금 길을 잃을 수 있도록.


_100p



저 말대로라면 나는 산정으로 가야하는 데 자꾸만 마을로 내려가는 사람의 뒤를 따르고 싶다.

'생활의 의욕'을 의무적으로 가져야 하는 여기에서 나는 자꾸만 산정이나 사막을 부질없이 상상한다.



잠시 반짝이고 사라지는 것을 좇아 일생을 사는 일은 그리하여

삶의 대부분을 배반하는 위험한 짓은 아닐는지.


_148p


황폐화 된 삶 위에서 이제는 사라진 그 반짝이던 것들에 대한 기억을 붙잡고 버티기란

여간 힘겨운 게 아니다. 누군가는 변절하고 또 누군가는 포기하고 다른 누군가는 망각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반짝이던 그것을 보던 찰나, 참 행복했노라고, 한 줄 적을수 있다면, 그것으로 됐다. 진창이 된 인생에서 허부적 거리는 것이 오늘과 내일 그리고 끝까지 일지라도 나는 됐다. 서글퍼지지만 뭔가 한번, 하나에 눈 떠 봤으니 그것으로 남은 시간을 달랜다.


여행은 모순이다. 자유 속에서 생활을 꿈꾸는 아둔한 우여곡절이다.

여행의 길은 그저 멀어서 먼 길이 아니고 길을 알면서도 스스로

나아가서 길을 잃고, 멀리 돌아가야 하는 먼 길이다. 그 길은 절대의

빛으로 이루어진 눈부신 천국으로 가는 길이 아니고 동서남북이

없는 눈부신 환한 빛 속에서 어둠을 조적해서 쌓아가는 제 속의

길이다. 여행은 드러냄이 아니고 숨김이다. 함부로 생활의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고 커다란 비밀을 제 속에 품을 때까지 제 몸을

숨기면서 가야 하는 길인지도 모른다.


-172p


돌아올 줄 뻔히 알면서 떠난다는 것도 우습다. 뻔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난다는 얇디얇은 위안으로 무엇을 덮을수 있을까. 다시 또 뻔한 일상을 시작해야 하는 것도 기쁜 일인가 아니면 허무한 일인가. 그래서 나는 여행을 즐기지 않는 인간일지 모른다.

일상을 뒤집을만한 여행이 있다면. 그런 전복을 꿈꾸기엔 여행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적합한 말이 없다면 새로운 말을 만들어서라도 여행이라는 경박한 말을 내팽개쳐야 한다.



꽃들은 자신을 가득 피워서 결국 스스로를 소멸시킨다. -301p


여행에서 돌아오지 않고 자신을 소멸시킨 자들이 있다. 주변 정리를 말끔히 하고 편도 티켓만 끊고 가까운 지인에게 예약 문자나 메일을 날려 그동안의 소회와 안녕을 말하는 사람. 나쁘지 않다. 주변 정 리와 청소가 귀찮아 그렇게 떠나지 못하는 사람이 어딘가에서 그렇게 떠난 사람들을 부러워만 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왜 떠나는 자가 되었을까.

그리고 이제 와서 내 입으로 할 수 있는 몇마디 말은,

상처란 치유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나의 자리를 상처에서 비켜 다시 마련하는 일.

이 말을 의심하지 마라. 그 속에 혹은 그 밖에서 치열함을 묻지도.

_357


상처는 아물겠지만 치유된 건 아니다. 속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상처는 그대로 열려 있다.

부지불식간에 쓰리고 피가 터진다. 다만 내색하지 않을 뿐.

그런 마음을 가진 얼굴로 웃는 웃음은 증오와 같고, 웃게 시키는 사람은 야비하다. 그렇다면 떠나야 한다. 징그러운 생활 따위 시궁창에 처박아 버리고. 화가 나면서 서글프다.


이 책은 여행서이지만 여행서는 아니다. 곳곳에서 폭죽처럼 터지는 저자의 감상들을 따라 가노라면 먹먹한 가슴이 된다. 저자를 이렇듯 고지와 오지 그리고 분쟁지역도 불사하며 떠돌게 한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독자들의 그런 궁금증은 나몰라라 하며 저자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다. 죽음 따위 애초에 작정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 같은 어중이는 각오를 한다해도 못 떠날 것이다.

생활에 무기력하게 붙들려 사는 사람이 이렇게 생활 따위에서 한 켠 비켜나 있는 사람의 이야기 책을 보면 잠시 용기백배한다. 생활을 무찌를수 있을 것 같고 그까짓거 꺼져버려, 하고 내심 큰소리도 쳐본다. 당장 생활을 등지고 여행자가 되지는 않겠지만 생활을 기만하며 살 궁리를 가능케 한다.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여행기' 라는 부제처럼 쓸쓸하게 여기저기를 떠돌며,

휘황찬란한 대도시나 우르르 몰려 다니는 것이 아닌, 죽음의 냄새를 큼큼거리며 좇는 사람의 여행기. 참여행은 혼자 가는 것이다.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게 각자의 인생이듯이. 내가 당신에게 손을 건네 타클라마칸으로 가자 한다면 당신은 갈 수 있는가? 있다고 하는 사람의 뺨을 후려갈기겠다. 그건 거짓말이다. 거짓이 아니라고 해도 스스로의 결정이 아닌 것이다. 갈 수 있다면 스스로 걸어 들어가라 컴컴한 사막으로, 아무 동행 없이.


두근거리고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책장을 넘겼다. 먼저 대여한 누군가의 밑줄을 눈여겨 보기도 했다근자에 읽은 읽을거리 가운데 가장 흥분케 한 책이다. 이렇게 쓸쓸하고 먹먹한 것에 흥분하는 나는 무엇인가. 그것이 더 우울하다.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건 바람 때문이 아니라 너의 마음이 흔들리는 거라던 고승의 일화가 아니라도 강가를 가득 채운 바람보다 더 바람만 가득한 마음을 이 한 권의 책으로 헛헛하게 위무 한다.

뒷표지에 있는 저자의 당부 아닌 당부의 글로 마무리 한다.



세상에는 차를 한 대도 팔지 못하는 자동차 외판원이 있고,

시를 쓰지 않는 시인이 있으며,

여행하지 않는 여행자가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여행하지 않는 여행자는 있다.

사랑을 잃은 자는 사랑의 흔적으로 살고,

여행이 막힌 자는 여행의 그늘 아래 살아가니

여직 길 위에 있는 사람들아,

너무 외롭거나 아프지 마라.

세상 끝에 걸쳐 눈이 눈물처럼 빛나는 그대의 여행은

언젠가 끝이 날 것이다.

사라지지 말고 이 말을 가슴에 새겨다오.

오래오래 당신은 여행생활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걀과 닭 -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소설집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배수아 옮김 / 봄날의책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보르헤스 보다 뛰어난 브라질 소설가

소설가 배수아가 반해서 번역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그의 단편 소설집 달걀과 닭

배수아 작가가 리스펙토르에 빠지게 된 이야기



소설가 배수아가 반한 소설가

 

이 작품집을 안읽기로 했다가 읽기로 한 이유가 있다

안읽어야지 했던 이유는 국내에 처음 번역 소개된 저자의 작품 나에 관한 너의 이야기라는 걸 몇 년 전 구해 읽고 아 이 작가는 내 꽈가 아니구나 싶어 밀쳐 놓았었다.

그랬는데 이건 왜 읽었냐 하면

이 책을 먼저 읽고 있던 어느 분의 소개글과 본문 가운데서 따온 문장들에 대한 감상의 영향이 지대했다. 앞에서 읽었던 그 작품과는 뭔가 궤가 다른 작품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거기에 번역자가 배수아 작가라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긴 했다.

배수아 작가는 자신의 소설 북쪽 거실의 표지 그림을 리스펙토르의 해외 판 표지 화가 그림으로 할 정도로 리스펙토르의 작품에 빠져 있었던 것으로 짐작 된다. 그 사실은 옮긴이의 글을 읽어보면 잘 알 수 있다. 아울러 옮긴이의 말을 읽어나가보자니 좀 더 집중해서 읽어봐야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리스펙토르는 외교관과 결혼했지만 외교관의 아내라는 틀에 박힌 삶을 벗어나

작가로 살기 위해 남편을 떠났다. 두 아들을 키우며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삶을 살았다.


그녀는 현재 브라질에서 여성 카프카라는 타이틀을 달고 현대 브라질 문학의

상징처럼 자리 잡았으나 그녀가 남편과 이혼 후 귀국했을 당시 대다수 출판사들은

그녀의 작품을 외면했다. 남미문학하면 쉽게 보르헤스를 떠올릴 것이다.

클라리시의 작품을 읽고 영어로 번역하여 미국에 소개한 엘리자베스 비숍은 이렇게 말했다.


보르헤스는 훌륭합니다. 하지만 그녀처럼 탁월하게 훌륭하지는 않습니다.”



번역한 배수아 작가의 리스펙토르 작품에 대한 간략한 평이다


예측할 수 없는 부조리와 돌연함으로 가득한 그녀의 글은

구조나 플롯으로 분석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내가 받은 느낌은,

전체 이야기가 하나의 덩어리로, 한꺼번에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녀가 오랫동안 이해받지 못하는 작가, 오해받는 작가였던 것은 이상하지 않다.

클라리시가 죽기 직전에 발표된 마지막 소설 별의 시간에는,


이글은 (독자들이) 읽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작가에 의해) 쓰이고 있다는 진술이 나온다.

내게는 그 말이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글쓰기의 핵심처럼 들렸다.


단 몇 줄의 설명으로 감이 올지 모르겠으나 어떤 독자는 어렴풋이 짐작할지도 모르겠다아 이 작가는 내 꽈구나, 또는 내 꽈가 아니구나 하는.


이 단편집에는 26편의 단편들이 실려있다. 옮긴이의 말을 보자면 '달걀과 닭'이 대표 단편으로 작가 역시 인정한 모양이다. 리스펙토르 생애 단 한 번 있었고 사후에 공개된 인터뷰에서 그는 표제작 달걀과 닭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 작품 중에서 나 자신도 잘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기는 하다 그게 달걀과 닭이다


대부분의 독자는 이 말을 듣고 금방 떠오른 생각이 있을 것이다.

작가 본인이 써놓고 작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다는 건 무슨 궤변이냐 그러면서도 그것이 어떻게 대표작일 수가 있느냐 할 것이다.


옮긴이 배수아는

'달걀과 닭'은 희게 번득이는 빛의 칼날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런 칼날에 베이는 것을 사랑한다. 라고 했다.


'달걀과 닭'의 일부를 옮겨와 본다


그러면 닭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달걀은 닭의 위대한 희생이다.

달걀은 닭이 일생 동안 지고 가야 하는 십자가이다. 달걀은 닭이 영원히 닿지 못할 꿈이다. 닭은 달걀을 사랑한다. 그러나 달걀이 존재한다는 것을 모른다. 자신 안에 달걀이 있음을 안다면, 닭은 스스로 조심하게 될까? 자신 안에 달걀이 있음을 안다면, 닭은 닭으로서의 상태를 상실해버린다. 닭으로 존재함은 생존을 의미한다. 생존은 구원이다. 왜냐하면 삶은 없는 것처럼 보이기에. 삶은 죽음으로 이르는 길이기에. 그러므로 닭이 할 일이란, 오직 계속해서 생존하는 것뿐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생존이란, 죽음으로 이르는 삶에 대항하여 투쟁을 유지하는 것이다. 닭으로 존재한다는 의미는 바로 그것이다. 닭은 우울해 보인다.

12


어떻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나 역시 잘 모르겠다.

그렇다면 여기에 실린 26편의 단편들이 모두 '달걀과 닭'과 같을까? 감히 말하자면 나는 표제작인 '달걀과 닭' 이 한 편을 예외작으로 놓고 싶다. 이 한편 때문에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라는 작가를 리스트에서 지워버리는 건 섣부른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나머지를 모두 읽고 남겨 두던가 아니면 대~충 읽어도 괜찮다고 본다.


귀 너머에는 소리가 있다.

시각의 먼 끝에는 풍경이 있으며, 손가락의 끝에는 사물이 있다-그곳으로 나는 간다.


나의 머나먼 끝에 내가 있다.

, 애원하는, 궁핍을 겪는 나, 매달리고, 통곡하고, 한탄하는 나.

294


다소 시적인 문장을 포함하고 있는 그곳으로 나는 간다 와 같은 작품은 단 두 페이지에 불과 하다. 이처럼 단 몇 페이지에 불과한 작품이지만 충분히 읽어볼 만한 작품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표제작에 지레 겁을 먹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 우화스럽기도 한 이라는 작품에서도 리스펙토르의 특징이 잘 나타난다고 본다.



작품 외적인 이야기로 좀 빠져서, 배수아 작가가 어떻게 리스펙토르에 빠지게 되었나 하는 장면을 요약해서 옮겨와 본다.


브라질 상파울루 공항에 도착했을 때, 검은 표지의 책 한 권이 내게 건네졌다.

G.H.에 따른 수난

열 페이지 정도를 읽을 때까지도, 머릿속에서는 계속, 얼마나 기이한 제목인가, 하는 생각만이 맴돌았다. 얼마나 기이한 문장들인가. 얼마나 기이한, 이야기 없는 이야기인가. 그리고 얼마나 기... 목소리인가. 그리고 고백하자면, 열 페이지 정도를 넘길 때까지는 이 책을 계속 읽어야 할지 아니면 이쯤에서 그만두어야 할지 머뭇거리는 상태였다.

지금 G.H.에 따른 수난은 내 의식에 가장 깊게 달라붙은 책 중의 하나로 내게 어둡고도 둔중한 충격이었다.

지금 G.H.에 따른 수난, 카프카 이래로 가장 신비한 작품이 될 것이다.


그리고 리스펙토르는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포르투갈어 교사가 찾아와서 말하기를, 자신은 G.H.에 따른 수난을 네 번이나 읽었지만,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다음 날, 열일곱 살 난 소녀가 왔다. 소녀는 G.H.에 따른 수난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했다.



배수아 작가의 팬이 아니라도 이렇게 설명되어지는 작품이라면 한번쯤 호기심의 감각이 반짝하지 않나? 하지만 나 역시 힘주어 말해지고 있는 기이하다는 표현에 한편으론 달걀과 닭을 떠올리며 안읽을게 뻔하다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런 생각은 책을 들춰보면 확인되는 일이다. 가까운 시일 안에 번역 출간 된다니 한번 기다려 확인해 볼만한 일이다. 어쨌든 참 궁금하기는 하다.

제발트 번역을 통해 국내에 제발디언 바람을 일으켰던 배수아 작가가 이번에는 리스펙토르 바람을 불러일으킬지 흥미롭다.


참고로 리스펙토르 생애에 단 한번 19772, 상파울루 TV 와의 텔레비전 인터뷰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와 있어서 주소를 올려 놓았다. 이 인터뷰는 작가의 부탁대로 사후에 공개 되었다.


https://youtu.be/ohHP1l2EVnU

 

리스펙토르는 자신의 글에 대해


내가 글을 쓰는 것은 타인에게 어떤 종류든 만족감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라고 했다.

저자의 말과 같이 리스펙토르를 당신이 읽는다면 일반적인 독서를 통해 얻게 되는 만족감 같은 건 얻지 못할 수도 있다. 때론 독서를 통해 불만족 하고 불편한 느낌을 받기도 하는데 그런 작품을 만나는 경험이 오히려 더 즐겁지 아니한가 한다면 이상한 놈이 되려나.


여하튼 뭔가 이야길 하긴 한 것 같은데 딱히 한 것도 없는 것 같지만

낯설기만 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라는 작가의 소개에 작은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부테스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7월
평점 :
품절


들어가기 전에

 

오늘 소개하고 살펴볼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의 작품이 국내에 처음 번역된 것은

1992년으로 보인다. 그때 번역된 한 권 이후 다시 번역, 출간되기 시작한 것은 2001년 문학과지성사에 의해 꾸준히 소개되고 있다.

지금까지 대략 14권의 작품이 출간되었는데 국내에 소개된 기간과 작품 수에 비하면 대중적으로 널리 읽히는 작가는 아닌 것 같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아무래도 일반적 소설의 형식이랄수 있는 서사 위주의 소설이라기 보다 시적인 문장과 관념적 내용으로 일부의 열혈독자층만이 읽는 작가로 매김하지 않았나 싶다. 물론 모든 작품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키냐르 작품을 대부분 출간해온 문학과지성사 편집부에 따르면 국내 파스칼 키냐르의 독자층은 대략 2000명 정도라고 번역가 송의경은 이야기 한다.

 

번역가 송의경은 키냐르 전문 번역가라 할 수 있는데 14권 가운데 11권을 번역했다. 송의경이 말하는 키냐르 작품의 특징은 이따금 탄성을 지를 만큼 아름다운 촌철살인의 문장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때론 작품이 미로와 같아서 길을 헤매기도 하는데 그래서 한 문장 한 문단

아무데나 펼쳐 읽어도 무방하다라는 말도 곁들인다.

씨앗에 꽃이나 나무가 들어가 있듯이 한 문장 한 문단에도 키냐르가 온전하게 들어가 있다는 비유를 했는데 적절한 것 같다.




일단 부테스는 어떤 인물이냐를 알아야 한다. 부테스는 음악 소리에 끌려 물에 뛰어든 자이다

키냐르는 그리스 신화에서 착상하여 음악과 물에 뛰어든다는 행위를 절묘하게 섞어 시를 읽는듯한 소설을 써냈는데 그게 키냐르의 특징이자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런 면이 독자들로 하여금 낯을 가리게 하는 걸 수도 있다.

본 영상에서는 작품 자체에 대한 설명보다 이 작품을 읽은 느낌을 지극히 주관적으로 아무렇게나 떠들어 보겠다. 뭔가 아삼삼한? 읽을 꺼리를 찾는다면 파스칼 키냐르를 추천한다. 물론 모든 작품이 아삼삼한 건 아니다. 특히나 가장 최근 프란츠 출판사에서 출간된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라는 작품은 전통적 소설 방식이라고 하니 그 점 참고 하기 바란다.


먼저 본문의 일부를 읽어 본다.

 

그는 어디로 가는가? 이름들 자체보다 훨씬 더 절박한 음들이 들려오는 곳으로 간다.

 

부테스는 왜 물에 빠져 죽는가?

우리는 마른 데서 태어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 음악의 본질을 성찰하는 제아미의 노에서 침묵의 고수인 노인도 물로 뛰어든다.

그 역시 자살한다. 그 역시 익사한다.

우리가 영위하는 삶이란 희미한 빛 속의 움직임에 불과했던 오래된 바다에 비한다면 낯선 육지와도 같은 것이다.

산다는 것은 오직 포만의 운명을 지녔을 뿐이다.

24p

 

본래의 음악이란 무엇인가? 물로 뛰어드는 욕망이다.29

 

 

이 책을 한마디로 정의 하자면 음악과 뛰어듦에 관한 이야기다

어떤 음악에 꽂혔다고 이야기할 때, 우리는 부테스처럼 음악에 이끌려 어디론가

정신을 팔아버리는 지경에 이르는 경험을 한다. 풍덩 하고 음악에 빠져버린다는 이야기다.

그런 경험을 시적 소설로 형식화한 읽을 꺼리가 궁금하다면 키냐르 꽈인 것이고 무슨 뜬구름 잡는 멍멍이 소리냐 하면 키냐르는 읽지 마시라.

 

어떤 소설은 뭔가를 상상하게 하고 어떤 소설은 인정하게 만든다. 뭔가를 상상하게 만드는 소설은 옆사람에게 뭐라고 추천하기가 쑥스럽거나 어렵다. 왜냐면 뭔가 살짝 제정신이 아니거나 몽상이나 하는 모자란 놈으로 보일까 싶어서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건데 라고 따지듯 물어오는 상대에겐 개뼉다귀 같은 구체적인 걸 던져줘야 물지 않는데 두루뭉술한 걸 보여주면 사정없이 물어버리거나 개무시 당하기 십상이다. 그러니 책추천도 상대를 봐가며 해야하는 것이다.

 

종종 해외 토픽 같은 뉴스를 통해 해안으로 올라와 죽는 고래들을 본다. 물에 뛰어드는 행위나 물 밖으로 뛰어드는 행위나 그 주체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세계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이므로 같은 행위이고 향하는 세계도 결국은 같은 곳일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음악을 듣고 홀리듯 가고자 하는 세계는 고래로 치자면 물 밖이고 인간으로 치자면 물 속인 것이다. 귀소본능이랄까 우리가 잉태된 곳은 양수가 가득한 물속이었으니 그곳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건 당연할지 모르겠다.

 

음악을 듣고자 하는 것은 청각적 감각에 의탁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시각보다 청각에 먼저 귀를 트고 청각이라는 감각은 사망 후에도 가장 오래 살아 있다고 한다.

 

키냐르의 글들을 읽다보면 어느순간 다른 세계로 몽상이나 망상에 빠진다. 내용과 상관없이 내 생각대로 침잠하다 문득 다시 현실의 본문으로 돌아온다. 그런 순간이 나쁘지 않다 오히려 그런 틈이 풍부한 글들을 찾아 이 책 저 책 찾아 헤매는건 아닌지 모르겠다.

 

뛰어들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나눌 때, 뛰어들지 못한 자는 죽을 때 까지 뛰어드는 자와 뛰어 듦에 대한 미련과 연모에 괴로워 한다. 오직 뛰어들지 못한자들만이 무모함이라며 손가락질 하지만 그것은 뛰어들지 못하는 비루함에 대한 자기변명이다.

뛰어든다는 것은 취하는 것이다. 그것에 취해서 정신이 마비되어 빠져버리는 것, 그 순간 자신이 죽는다는 것 조차 감각하지 못하는 것.

키냐르는 자신이 집안 대대 이어온 음악가의 삶을 살지 못했다는 생각을 평생 안고 살고 있다. 그래서 그는 끊임 없이 그 주위를 배회하며 음악에 대한 글들을 썼을 것이다. 그것이 오히려 아름다우며 동시에 "음악혐오"와 같은 작품을 써내게 했다는 것도 아이러니다.

 

나는 앞에서 상상하게 하는 소설이 있다고 했다. 키냐르의 어떤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소설과는 상관없는 상상에 빠진다. 인정해야만 하는 현실의 여기가 아닌 저 어딘가로 몽유병 환자처럼 떠다닌다. 키냐르의 작품은 그렇게 부유하게 한다. 상상으로 뛰어들게 하고 빠지게 하여 부테스가 되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에 미친 바보 - 이덕무 산문집, 개정판
이덕무 지음, 권정원 옮김, 김영진 그림 / 미다스북스 / 200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산문집은 이덕무의 청장관전서(1966) 가운데 책을 사랑하는 마음을 느낄수 있는 글들을 뽑아 정리한 것으로, 책 곳곳에서 이덕무의 인품과 사상을 엿볼 수 있다. 그중 한 구절을 소개한다.


명예와 절개를 세울 수만 있다면, 비록 바람과 서리가 몰아치고

파도가 밀려와 거의 죽게 된다고 할지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또 인간 세상의 쌀과 소금같이 자질구레하지만 사람을 얽매는 물건에 대해서도

거의 초탈하여 깨끗이 벗어버리겠다.

229

 




적절한 비교일지 모르겠지만 이 책을 읽고 드는 이덕무라는 선비의 이미지는

외롭고 높고 쓸쓸했던 시인 백석의 모습이 오버랩 되더란 것이다.

물론 터무니 없는 것일수도 있으나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의 한구절을 옮겨와 본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에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이덕무는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바라보고 있기도 하다


가난해서 반 꿰미의 돈도 저축하지 못하는 주제에 이 세상의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고, 어리석고 둔해서 한 권의 책도 제대로 꿰뚫어보지 못하는 주제에

오랜 세월이 담긴 경전과 역사책과 이야기책을 다 보려고 하는구나. 이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이거나 바보다. , 이덕무야! 아아, 이덕무야!

43


한서논어로 병풍과 이불 삼아 한겨울 밤을 나는 것이나

영양실조로 여동생을 일찍 보낸 그의 가슴속에 어떤 감정이 실려 있었는지

감히 짐작조차 어렵겠지만 막연하게나마 상상해 보기도 했다.

서얼 출신이라는 태생적인 한계와 그로 인한 빈한함에서 오는

장남으로써의 책임감을 다하지 못하는 자괴감이 그 자신 속에 숱한 응어리를

쌓게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일생은 굳고 정한 갈매나무처럼 당당하고 꿋꿋했다.


이덕무는 평생 읽은 책만 2만 권이 넘었고, 직접 베낀 책만 해도 수백 권이 넘는다고 한다. 그만큼 책을 사랑했고, 책을 벗 삼아 일생을 보냈다. 그런 그의 독서에 관한 생각은 조금 남다른데가 있었으니 한번 새겨들어보자.

 

일과로 책을 읽으면서 네 가지 유익한 점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는 지식을 넓히고

깊게 알아서 옛일에 통달하고 뜻과 재주에 도움이 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첫째, 조금 배가 고플 때 책을 읽으면 소리가 두 배로 낭랑 해져서

책 속에 담긴 이치와 취지를 잘 맛보게 되니 배고픔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


둘째, 조금 추울 때 책을 읽으면 기운이 소리를 따라 몸 안으로 흘러들어와

편안해져 추위도 잊을 수 있게 된다.


셋째, 근심과 걱정으로 마음이 괴로울 때 책을 읽으면 눈은 글자와 함께

하나가 되고 마음은 이치와 더불어 모이게 되니, 천만 가지 생각이 일시에 사라져버린다.


넷째, 기침이 심할 때 책을 읽으면 기운이 통하여 막히는 것이 없게 되니

기침 소리가 순식간에 그쳐버린다.

51


이쯤되면 책읽기로 하나의 도를 터득했다고 할만하지 않을까. 우리는 책 한 권을 읽더라도 거기에서 꼭 뭔가에 통하는 법을 얻지 못하면 시간 낭비만 한 것처럼 전전긍긍하지 않나. 물론 몇백 년 전 선비의 책읽기와 현대인의 책읽기는 개인적 상황이나 시대 상황도 비교할 수 없을만큼 다르긴하지만 어떤 필요와 목적성에 치우친 독서라면 한번쯤 돌이켜 볼만할 것 같다.


벗에 대하여


이덕무는 스스로를 평가할 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세상 물정에 어둡고 처세에 졸렬한 나같은 사람을 이해해주는 이를 만나면,

산수를 논하고 문장을 이야기하며 민속과 가요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되풀이하며 말하는 것이다.

40


그리고 여러 서얼 출신과 교우했던 이덕무의 친구에 대한 글을 한 편 소개해 본다


나를 알아주는 벗


만약 나를 알아주는 한 사람의 벗을 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10년 동안

뽕나무를 심고 1년 동안 누에를 길러 손수 오색실을 물들일 것이다. 10일에

한 가지 빛깔을 물들인다면 50일이면 다섯 가지 빛깔을 물들일 수 있으리라.

이것을 따뜻한 봄볕에 내놓고 말려서 여린 아내에게 부탁해 백 번 달군 금침

바늘로 내 벗의 얼굴을 수놓게 하리라. 그런 다음, 고운 비단으로 장식하고

예스러운 옥으로 막대를 만들리라. 이것을 가지고 뾰족뾰족하고 험준한 높은

산과 세차게 흐르는 물이 있는 곳, 그 사이에 펼쳐놓고 말없이 서로 바라보다

뉘엿뉘엿 해가 저물 때면 품에 안고 돌아오리라.



요즘 사람들의 인간관계 기준으로 생각하자면 좀 오버스런 면도 있겠지만

출신의 한계에서 오는 교유하는 사람의 폭이 넓을 수 없었던 이덕무에겐 그만큼 주위 친구라는 존재가 각별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흔히 동호인이라 말하는데 그런 동호인들이 모이면 공통의 관심사가 대화의 소재가 된다. 그런 이야기로는 몇 날 며칠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책 좋아하는 사람 책이야기, 커피 좋아하는 사람 커피 이야기 자전거 좋아하는 사람 자전거 이야기... 나 역시 자전거 타는 사람들과 만나면 어제 그제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해도 시간 가는줄 모른채 몇 년을 그렇게 보내기도 했으니까.

 

마음에 맞는 시절에 마음에 맞는 벗과 만나 마음에 맞는 말을 나누며 마음에

맞는 시문을 읽는 것, 이것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이다. 그러나 어째서

이런 지극한 즐거움이 드문 것인가. 이러한 즐거움은 일생에 단지 몇 번 찾아올 뿐이다.


가만 돌이켜보면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세상에 많지만 세상에 많다고 그 사람들을 모두 만날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하더라도 자의든 타의든 사람들은 늘 떠나고 오기를 반복한다. 그 가운데 주위에 남아 관심사를 오래 논하는 사람을 얻기란 이덕무의 한탄처럼 일생에 단지 몇 번 찾아오는 진귀한 일이 맞다.


책과 쓸쓸함에 대하여


책을 읽는다는 일은 따지고보면 쓸쓸한 일이다.

오로지 혼자 감당해야 하는 일이고 타인이 대신해 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덕무는 이 책읽는 쓸쓸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눈 오는 새벽이나 비 내리는 밤에 다정한 벗이 오지 않으면,

누구와 마주 앉아 이야기할 것인가. 시험 삼아 내 입으로 글을 읽으면 듣는 것은 내 귀요,

내 손으로 글을 쓰면 구경하는 것은 것은 내 눈이라.

내가 나를 벗으로 삼았으니 이제 다시 무엇을 원망하랴.


모름지기 벗이 없다고 한탄하지 마라. 책과 함께 노닐면 되리라.

120


쓸쓸함 따위의 감정은 헌신짝 버리듯 버려서

갖추고 있어선 안되는 것인냥 하는데 어쩌면 쓸쓸함이나 혼자됨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책읽는 행위와 친해질 수 없을지 모른다. 어찌보면 책읽는 즐거움을 알게 된다면 책 읽는 고독한 시간이 오히려 수많은 미지의 사람들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일처럼 흥미진진한 일이 될 것이다.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되겠지만 사람들 속에 있어 쓸쓸함을 느끼지 않는 것이나 책과 함께 책 속으로 들어가 쓸쓸하지 않는 것이나 선택은 각자의 취향과 사정에 따라 하게 될 것이다.

갈수록 책과 멀어지는 시대에, 당장 이 유튜브로 책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어찌보면 아이러니 같은데 이런 시대에 책에 미친 바보 선비를 소개하는 것도 좀 바보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세상에도 이덕무처럼 인생을 건너는 사람이 있다면 모두가 다 바보라고

손가락질하겠지. 그렇다 하더라도 이백여 년 전을 살다간 한 선비와 같은 발자취를

흉내라도 내는 누군가를 만나는 건 실낱 같은 희망이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