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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6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9년 9월
평점 :
1 ‘실존’이냐 ‘본질’이냐
2 ‘이유’냐 ‘원인’이냐
3. 그래서 우리는
뫼르소 같은 인간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당신의 친구나 애인이 뫼르소라면?
소설 “이방인”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아마
눈부신 태양 때문에 살인을 했다는 것과
“오늘 엄마가 죽었다”로 시작되는 첫문장 일 것이다
소설 이방인의 줄거리 요약 같은 건 필요 없을 것 같고
이방인 리뷰 영상들은 넘쳐나니까 찾아보면 되겠다
롤랑 바르트는 소설 “이방인”을 ‘건전지의 발명’과 맞먹는 사건이라고 했다
그런 소설을 이렇게 짧은 리뷰로 말한다는 건 분명 어불성설이긴 하다
그럼에도 두어 가지만 콕 찝어 이야기해 보려 한다
1. 실존이냐 본질이냐
뜬금없는 질문 하나 해보자. 돼지의 본질은 무엇인가?
극단적인 예가 되겠지만 구제역이 발생할 때 우리는 생매장 되는 돼지나 소 같은 가축들을 볼 수 있었다. 병의 전염 우려도 있겠지만 생매장 되는 이유는 병의 감염으로 인한 가축으로서의 가치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돼지의 본질은 인간에게 고기를 제공해주는 것이다. 물론 돼지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질은 무엇일까? 아니면 당신의 본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돼지가 돼지답게 돼지고기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하듯 인간은 인간다워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인간답다’는 누가 정의하는 것일까? 그런 정의가 있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 정의를 따라야 할까?
인간의 본질은 몇 가지로 간단하게 규정지을 수 없고 그런게 있다고 하더라도 돼지처럼 쉽게 매장 시킬 수도 없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인간은 기투된 존재’라고 했다
이 말은 인간은 세상에 그냥 던져진 존재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해야 된다는 게 없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로써의 ‘실존’이 인간으로써의 ‘본질’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뫼르소가 보여주는 말과 행동들을 살펴보면 뫼르소는 인간으로써 ~해야 한다는 당위에 해당하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장례식에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거나 어머니의 나이를 모른다거나 장례식 다음날 해변가에서 만난 여자와 함께 밤을 보낸다거나 등등 관습적 사고에 익숙한 많은 사람들은 뫼르소의 그런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어처구니 없게도 뫼르소의 사형은 아랍인을 죽였다는 살인 때문이 아니라 이해못할 행동들 때문이란 건 읽어본 독자는 누구나 알 수 있다
관습적인 사고는 우리 인간이 의미를 부여한 결과일 뿐이다
카뮈는 “이방인”을 각색 하겠다는 독일 독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뫼르소에게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거부의 자세가 있다
그것은 결코 ‘마땅히 ~이어야 한다’는 당위를 따르는 게 아니라 오로지 ‘사실이 ~이다’라는 존재의 실상을 따를 뿐이다.
이 소설 안에서 뫼르소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뫼르소의 행동을 있을 수가 없는 행동이라고 본다. 자신들이라면 결코 할 수 없는 행동을 뫼르소는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으니 그들 눈에 뫼르소는 ‘이방인’으로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뫼르소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판사나, 검사, 방청객 심지어 그의 변호사까지 그들의 관습에 따라 판단했기 때문에 사형을 당하는 부조리가 발생하는 것이다
본질과 실존 사이에서 나나 당신들은 어떤 기준에 따라 판단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내가 뫼르소의 처지가 된다면 나는 어떤 말과 행동을 할까
이방인의 마지막 문단 일부를 옮겨와 봤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도록,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_136p
부조리한 세계를 인정하지 않고 반항하는 방식 가운데 뫼르소가 선택한 것처럼 죽음도 그 한 방법인 것이다. 세계에 대한 냉소나 풍자 또는 빈정거림 역시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죽음에 굴복하여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서 사형을 피하는 건 뫼르소의 방식이 아닌 것이다. 자살이 아닌 사형수가 되어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죽음에 대한 반항이기도 한 것이다.
그 사형장에 많은 구경꾼들이 오기를 바라는 것 또한 부조리에 대한 반항의 한 방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2 ‘이유’냐 ‘원인’이냐
잘 알려진 것처럼 뫼르소Meursault라는 이름에는 죽음을 뜻하는 모르mort와 태양을 뜻하는 솔레유soleil가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카뮈가 주인공의 이름을 뫼르소라고 지었을 때 이미 죽음과 태양이 소설의 주요 사건과 주인공의 운명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살짝 딴 얘기일 수 있지만
이런 식으로 주인공의 이름에 작품의 의미를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예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흔하기 때문에 그렇게 놀랄 것도 아니다. 몇년 전 인기리에 종방한 드라마 “나의 아저씨” 5화에서 아이유가 연기했던 극중 인물 이지안의 이름이 ‘이를 至’ ‘편안할 妟’이라는 장면이 나온다
이지안 이라는 이름에서 현재의 불안과 미래의 평안에 대한 갈망 등을 살짝 엿볼 수 있겠다 싶었다 나는 그 장면에서 작가가 너무 직접 들이대는게 아닌가 싶었지만 대중 드라마라는 전달되는 매체의 특성상 어쩔수 없겠구나 싶기도 했다. 아마 소설이라면 좀 더 은유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을까 뭐 그런 생각을 했다
이 경우와는 좀 결이 다르지만 신경숙의 소설 “깊은 슬픔”의 세 주인공의 이름은 각각 '은서' '완' 그리고 '세'인데 작품을 읽어본 입장에서 이름이 풍기는 뉘앙스가 곧 캐릭터의 성격과 비슷했다고 느꼈다.
다시 이방인에서 태양은 여러모로 작용을 하고 있는데 무엇보다 뫼르소가 살인을 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뫼르소는 재판장의 물음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다
“나는 빨리 좀 뒤죽박죽이 된 말로, 그리고 우스꽝스러운 말인 줄 알면서도, 그것은 태양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장내에서 웃음이 터졌다.“
_115p
국내 번역은 ‘때문이었다’ 라고 되어 있는데 글자 그대로 직역하면 ‘그것은 태양이 원인이었다’라고 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어떤 사건이 발생했다면 그것의 ‘원인’과 ‘이유’를 살펴봐야 한다
태양이 원인이었지 이유는 아니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 뫼르소의 살인은 우발적이었지 개인적 원한에 의한 계획적 살인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뫼르소가 방아쇠를 당긴 그날 그 순간 비가 왔거나 흐렸다면 어쩌면 뫼르소는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어쨌든 살인이라는 결과는 바뀌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계획된 것인지 우연인 것인지 그점은 짚고 넘어갈만 하다는 것이다
‘이유’가 개인적이고 내부적인 것이라면 ‘원인’은 개인을 넘어서는 외부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뫼르소가 태양 때문에 살인을 했다는 것은 방청객의 웃음을 살만큼 엉뚱한 대답일 수도 있지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이야기 하는 뫼르소 식의 대답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이유와 원인으로 구분해봐야 하냐면 한국말로 ~ 때문에 라고 읽기는 읽어도 작가가 그 말을 쓸 때 원인으로 썼느냐와 이유로 썼느냐를 알고 읽을 때 좀 더 깊이 있는 작품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3. 그래서
우리는 뫼르소 같은 인간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당신의 친구나 애인이 뫼르소라면?
우리는 제3자로써 객관적인 거리에서 소설을 읽을 수 있다
이방인이라는 소설 속의 뫼르소라는 인간이 하는 행동과 말들, 그리고 그 주변인물들을 살펴보며 각자의 생각과 기준에 따라 판단한다
앞에서 간단하게 이야기했지만
다음과 같은 행동들에 대해 판단해 보자
1. 어머니의 부고를 받고 무덤덤 하다
2. 매장 전에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보겠느냐는 제안을 거절한다
3. 어머니의 나이가 많았냐는 질문에 대해 얼버무릴만큼 어머니의 나이를 모른다
4. 어머니의 시신이 있는 방에서 거리낄 것 없이 담배를 피운다
5. 장례식이 끝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실컷 잠잘 수 있겠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낀다
6. “일요일이 또 하루 지나갔고, 엄마의 장례식도 이제는 끝났고, 내일은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하겠고, 그러니 결국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7. 장례식 다음날 수영을 하러 갔고 거기서 만난 여자에게 영화를 보자고 제안하고 또 그녀와 함께 밤을 보낸다
이 외에도 소설 속의 다양한 상황에 따른 뫼르소 식의 자기 표현이 있다
그 모든 행동들에 대해 소설에서는 바로 전날 어머니 장례를 치른 사람의 행동이라고 보기 어렵다,라고 간주하고 있다
장례를 치러봤거나 장례식장에 가봤다면 장례식장의 풍경은 그 가족의 사정에 따라 천차만별이란 걸 알 수 있다.
이방인을 읽은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번 물어보고 싶다
소설 속 인물들처럼 뫼르소를 이해못할 인물로 간주하고 사형을 구형하는데 동의하는지 아니면 다른 생각을 하는지
그러는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뫼르소의 행동이 비난 받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사형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뫼르소는 자신의 욕구에 따라 솔직하게, 어머니의 죽음에 무관심하게 행동하며
자신의 행동이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지에 관심 없다
자기가 하는 말과 행동이 자기에게 유불리할지 상관하지 않고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거짓 없이 있는 그대로 말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거짓 없이’ 있는 그대로 곧잘 이야기 하는 사람이 내 지인이거나 애인이라면 어떤가. 또는 내 자신이 뫼르소와 닮은 면이 있다고 생각되는 점은 없나
거짓이 있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지만 우리는 ‘착한 거짓말’이라는 이유를 들어 때론 듣고 싶은 거짓말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방인 가운데 다음 장면을 한번 보자
52p
저녁에 마리가 찾아와서, 자기와 결혼할 마음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마리가 원한다면, 그래도 좋다고 말했다. 그녀는 내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알고 싶다고 했다. 나는 이미 한 번 말했던 것처럼, 그건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지만 아마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뫼르소는 상대방이 자기의 말을 듣고 어떻게 생각할지 개의치 않는다
마리가 자기 말에 상처받지 않을까 염려되어 속에 없는 말을 일부러 꾸며내지 않는다. 자신의 실제 감정에 따라 직접적으로 자기 생각을 말하는 뫼르소는 그래야만 자신과 상대방에게 진실하고 떳떳하다고 생각하는 인간인 것이다
그를 찾아온 변호사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뫼르소의 변호사는 그가 어머니의 장례식 날 무심한 태도를 보였다는 사실을 법정에서나 예심판사의 방에서는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라고 다그쳤다.
자신의 말이 몰고 올 파장에 무관심한 태도, 진실을 말하는 그의 태도가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려주는 대목이다.
우리는 마땅히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고 목소리 높여 쉽게 말한다. 하지만 진실이란 생각하기는 쉬워도 그것을 내 입 밖으로 꺼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 발설이 초래할 위험을 대개의 사람들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본질이니 실존이니 등등 골치 아픈 이야기를 두서 없이 했지만
그래서 니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데? 한다면
우리는 뫼르소 같은 인간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당신의 친구나 애인, 자식이 뫼르소라면?
나는 뫼르소가 훌륭한 인간이라는 것도 아니고 그와 같은 인간이 되자,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것도 아니다
우리 주변에 뫼르소가 있다면 그를 위험 인물 또는 가까이 지내기에 꺼릴 수밖에 없는 이웃으로 치부하고 멀리하지는 않을까?
만약 세상 모든 사람이 뫼르소로 가득 찬다면 그 세상은 또 어떤 모습의 세상일까?
뫼르소가 없는 세상에서 서로 적당히 속이고 속아주는 그렇고 그런 세상을 바라고 있지는 않을까?
소설 속 뫼르소를 죽였듯이 어쩌면 이웃의 뫼르소를 우리도 처단해왔는지 모른다
그 결과가 좋고 나쁘고를 따질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