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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 가치에 대한 탐구
로버트 메이너드 피어시그 지음, 장경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10월
평점 :
“사서 보든 빌려 보든 베껴 보든 빼앗아 보든 훔쳐 보든!”
삶의 근본적 문제에 대해 의심하고 돌아본 적 있다면 볼만한 소설
121군데 출판사가 거절한 베스트셀러
오늘의 소설은 소설 같지 않지만 분명 소설인 소설이다.
제목의 조합부터 이게 소설인가 아니면 철학이나 종교서적인가 하겠지만
그 무엇도 아닌 여행기이기도 한데 또 여행기라기엔 좀 부족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내 마음대로 이 책을 정의하라면 신념에 관한 소설이라고 하겠다.
먼저 소설 주변에 관한 이야기를 알고 가야 할 것 같다.
이 책을 주목하고 읽게 된 건 특이한 제목도 제목이지만 저자의 이력을 훑어보는데 있었다.
9살 때 아이큐 170을 기록했다거나 15살 때 대학 화학과 신입생 과정을 수료했다는 것보다 그가 생화학 분야에서 재능을 보였지만 궁극적 의미를 찾는 데 실패해
학업을 중단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그후 저자는 입대하여 한국에 근무하기도 했고
이를 계기로 동양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갑작스럽지만 당신은 가지고 있는 어떤 신념 같은 게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
나는 어떤 대단한 신념을 말하는 건 아니다. 우리는 각자 어떤 신념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신념이란 것을 몸으로 실천한다거나
인생에 직접 대입해 살아가기는 의외로 어렵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신념이 어떤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 신념이 하찮으면 하찮을수록 흔들려
그만 포기해야겠다 싶을 때 이런 책을 한번 보면 어떨까 싶다.
그렇다고 이 책이 당신에게 용기를 북돋우거나
얄팍한 감상적인 위로를 줄 거라는 오해는 없었으면 한다.
책의 어려웠던 탄생 과정을 소개해 본다.
초판 출간이 1974년이니까 출간된지 좀 오래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1999년 출간 25주년 기념 서문이 실려 있다는 것은 반짝 팔리고 만 책이 아니라
꾸준히 사랑받았을 만큼 책에 힘이 있다는 반증이다.
저자는 이 책의 출간을 위해 122곳의 출판사에 의뢰를 했으나
단 1곳의 출판사만이 긍정적 반응을 보였고 담당 편집자와 4년간의
서신 교환 작업 끝에 책으로 묶을 수 있었다.
서론은 이 정도로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본론의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이렇게 리뷰랍시고 떠들고는 있지만
이 책에 대한 어떤 선입견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기본적인 철학 지식이 없는 사람이 어쩌면 자가당착에 빠진 해석을
떠들어댐으로써 행여나 잘못된 사실의 전달이 있을까 염려되는 것도 사실이다.
800여 쪽에 다다르는 제법 두꺼운 책의 내용 가운데 극히 일부일 따름이다.
제목 이야기부터 해보자면 ‘선’이나 ‘모터싸이클 관리술’에 대한 책인가 싶을수 있지만
내가 보기엔 선 보다는 오히려 서양 고전 철학 가운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이나
플라톤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모터싸이클 관리술이라고는 했지만
거기에 다른 모든 것을 대입해도 무방하다. 무슨 말이냐 하면
논두렁에 앉아 그 마음을 깨끗히 하면 그 사람이 중이고
그 논두렁이 절간이라는 말과 같이 형식에 집착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나는 이 책은 여행기라고 하면서도 신념에 관한 책이라고 했다
책은 크게 두 가지 이야기가 병렬로 배치되어 있다
그 한 가지는 화자가 그의 아들과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미국 미네소타부터 캘리포니아까지 가는 여정이다. 나머지 한 가지는
그 여정에서 이야기 되고있는 이 책에서는 줄곧 ‘질’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이 책의 부제가 ‘가치에 대한 탐구’라는 것을 눈여겨 봐야 한다.
이 책에서 ‘질質quality’ 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비슷한 말로는 다음과 같은 말들이 있다.
덕德, 아레테arete
덕이라거나 아레테 같은 말들이다.
다음은 작품 속에서 질에 대해 설명한 문장이다.
질은 우리를 자극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창조하도록 유도하는
지속적인 자극 요인, 세계의 모든 것을, 어느 한 부분도 빠짐이 없이
세계의 모든 것을 창조하도록 유도하는 자극 요인이다.
p623
이 질이라는 것을 추구하는 삶과 그것이 실현된 대상을 저자는
한국의 성벽에서 발견했다고 하는데 그 부분을 읽어보자.
파이드로스가 한국에서 보았던 성벽은 기술 공학적 행위의 산물이었다.
아름다웠지만, 이는 노련한 지적 기획 때문도 아니었고, 작업에 대한
과학적 관리 때문도 아니었으며, 그 성벽을 “멋들어지게” 하기 위해
과외로 지출한 경비 때문도 아니었다. 그것이 아름다웠던 것은 그 성벽을
쌓는 일을 하던 사람들이 대상을 바라보는 나름의 독특한 방식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초월의 상태에서 그 일을 제대로 하도록
자신들을 유도하던 방식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그들 자신과 일을 따로 분리하지 않음으로써 일을 그르치지 않았던 것이다.
총체적인 해결책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존재한다.
p516
갑자기 무슨 뜬금없이 성벽 이야길 왜 하냐고 할 것이다. 앞뒤 맥락 없이 읽다 보면
이해가 어려운 건 당연하다. 이 부분을 읽고 지나가면서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책 후반부쯤 읽어나가다보면 그게 그 뜻인가보다 하고 자연스레 이해하게 된다. 소개한 부분에서 강조 표시한 단어들을 연결해보면 그나마 짐작할 힌트가 되지 않을까 싶다.
‘자기 초월’과 ‘자신과 일을 따로 분리하지 않음’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쉽다.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극단적인 비유를 나름대로 해보자면
우리는 ‘達人’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다. 사람이 어떤 일을 오래 하다보면
그 일이 몸에 붙어 그 일을 할 때 지금 내가 이 일을 한다는 자각을 하지 않아도
몸이 알아서 실수 없이 해내는 그런 경지에 오르는 것을 달인의 경지라고 한다.
달인이 자신의 일에 몰입해 있는 그 순간을 ‘자기 초월’이라거나 ‘주체와 객체의 합일’
그렇게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이외의 모든 외부 환경을
객체로 인식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교육 받기 때문이다.
거기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과학이라는 합리성을
거의 신봉하고 있는 수준임을 한번 생각해볼만한 말이다.
정서적으로 공허하고, 미학적으로 무의미하며, 영적으로 빈곤한 것,
이것이 바로 우리를 지배하는 합리성의 본래 모습이다.
p211
그렇다고 이 합리성을 포기하자는 게 아님을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합리성을 포기하는 것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아니다 정도가 아닌가 싶어요.
오히려 해결책은 합리성이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도록 합리성 자체의
본질적 경계를 넓힐 때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p305
나와 타자 또는 인간과 사물로 주체와 객체를 나누어 보는
이원론적 시각을 탈피해야 한다는 문장을 소개해 본다.
주체와 객체로 나누어놓는 영원히 이원론적인 모터사이클 접근 방법이
우리에게 올바른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가 이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이는 항상 현실 위에 덧씌워놓은
인위적 해석일 뿐이다.
p500
동양의 모든 종교에서 지고의 가치는 ... “그대가 바로 그것이다” ... 이처럼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의 경계가 없음을 완벽하게 인식하는 것
– 이것이 바로 깨우침의 경지다.
p258
여기까지 살펴보면 이 책은 철학적인 부분에 치우친 게 아니냐 할 수 있다.
앞에서 이 소설은 두 이야기가 병렬로 흐른다고 했다.
아들과 함께 여행을 하고 있지만 이 부자지간은 뭔가 서먹한 관계임이 노출 된다.
파이드로스로 소개 되고 있는 화자 자신과의 불화와 함께 아들과의 갈등과 해소가
이 소설을 소설로써 읽히게 하는 하나의 중요한 줄기이다.
8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이니만큼
여기에서 소개하지 못하는 많은 읽을거리들이 있다.
여행기이기도 한 만큼 여행기에서 공감갈만한 문장들도 있다.
때때로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보다
목적지를 향해 여행하는 것이 더 좋을 때도 있다.
p213
무언가 미래의 목적만을 위해 사는 삶이란 피상적인 삶일 수밖에 없다.
삶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산비탈이지 산꼭대기가 아니다.
바로 여기가 만물이 성장하는 곳이다.
p365
신념에 관한 소설책이라고 나름 장담하면서 이야기해봤는데
정작 제대로 이야기했나 싶기만 하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게
분명 그것이구나 하는 게 있는데 그것을 너무 파편화시켜 이야기한 것만 같다.
단순하게 지루한 철학적 문학소설로 치부할 수 없다는 것은
이 두꺼운 책이 2010년 한국에서 출간된 후
4년만에 7쇄를 찍었다는 것을 참고할 수 있을 것 같다.
삶의 근본적 문제에 대해 의심하고 돌아본 적 있는 당신이라면
일독할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인상적으로 읽었다면 이 책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라일라 –도덕에 대한 탐구>>를 추천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