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오지 않는 것들 - 최영미 시집 이미 1
최영미 지음 / 이미출판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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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멸렬한 고통


내게 칼을 겨눈 그들은

내 영혼의 한 터럭도 건드리지 못했어


피를 흘리지는 않았지만

눈물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지리멸렬한 고통이 제일 참기 힘들지



최영미 시인의 신작 시집이 나왔다

이미 뜨거운 것들(실천문학사 20133) 이후 6년 만이다.

이번 시집은 지금까지의 시집과는 제작과정의 결이 좀 다르다. 눈치 빠른 독자는 알아챘겠지만 출판사 이름이 참 낯설다. 한국의 문학 시집들이 출간되는 출판사는 몇몇 군데로 한정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어떤 출판사의 이름도 달고 있지 않다.



시인이 원고를 여러 출판사에 출간 문의를 해보았으나 그 어떤 곳에서도

수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랬기 때문에 시인이 직접 출판사를 등록하여

독립출판 개념으로 시집을 출간했다고 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현재 최영미 시인은 어떤

시인과 법정 다툼에 있다. 그 시인과의 다툼 때문에 기존 출판사들이

출간을 꺼려 하지 않았을까 하는건 합리적인 의심이라 할 것이다.

이 의심이 사실이라면 진짜 좀 빡친다. 그래서 지금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유난히 더 크기만 하다. 다다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시집은 더 특별하다고 할 수 있고 더 많은 독자들이

이 시집을 주목해야할 이유가 되기도 한다. 아울러 최영미 시인이 꼭

승소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최영미 시인하면 자동적으로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는 시집이 떠오를

것이다. 나 또한 그 시집으로 최영미 시인을 처음 읽었다. 그리고

돼지들에게란 시집을 통해 신랄한 시들을 접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다시 최영미 시인의 시집을 찾아 읽게 된 건 우연히

듣게 된 한 편의 시에 꽂혔기 때문이다. 우선 그 시부터 소개해 본다.



내버려둬


시인을 그냥 내버려둬

혼자 울게 내버려둬


가난이 지겹다 투덜거려도

달을 쳐다보며 낭만이나 먹고살게 내버려둬

무슨무슨 보험에 들라고 귀찮게 하지 말고

건강검진 왜 안 하냐고 잔소리하지 말고

누구누구에게 잘 보이라고 훈계일랑 말고

저 혼자 잘난 맛에 까칠해지게 내버려둬

사교의 테이블에 앉혀 억지로 박수치게 하지 말고

편리한 앱을 깔아주겠다,

대출이자가 싸니 어서 집 사라,

헛되이 부추기지 말고

집 없이 떠돌아다니게 내버려둬

헤매다 길가에 고꾸라지게

제발 그냥 내버려둬



특히나


달을 쳐다보며 낭만이나 먹고살게 내버려둬

저 혼자 잘난 맛에 까칠해지게 내버려둬

집 없이 떠돌아다니게 내버려둬

헤매다 길가에 고꾸라지게

제발 그냥 내버려둬


같은 문장들이 시인이라는 이들의 모습을 잘 나타내는 것 같아 좋았다.

시인이란 그런 사람들 같다 결국엔 길가에 고꾸러질걸 뻔히 알면서도

시를 짓겠다는 사람들. 미쳐야 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최영미 시인은

생활고에 쫓겨 기초 수급자가 되기도 했다는 기사도 있었다.


이번 시집에는 어머니를 간호하며 쓴 시 수건을 접으며를 비롯,

1993년 발표한 '등단소감'이라는 시도 실려 있다. 물론 싸움의 중심에

서게 만든 괴물이라는 시도 수록 되어 있다.

최영미의 시는 스트레이트 잔에 따라 마시는 위스키 같다. 뭔가가

한 방에 후욱 하고 치고 들어온다. 이번 시집의 많은 시들이 그렇다.

애둘러 말하지 않는다. 쏘맥처럼 아무렇게나 말아 마셔도 좀처럼

취하지 않는 흐리멍텅한 시가 아니다.


내가 그의 삶을 알면 얼마나 알까마는 그의 삶도 스트레이트 하지

않을까 싶다. 부러질지언정 굽히지는 않겠다 싶은 삶 말이다. 이 바람에

이렇게 저 바람에 저렇게 휘어져야 사는게 편하다고, 편한대로 사는게

장땡 아니냐고 우리는 아니 나는 전전긍긍하지 않나. 그렇기 때문에 굽히지

않는 시퍼런 시는 우리 아니 나를 불편하게 한다. 가난은 불편한 것이지

죄악은 아니란 말이 있지만 언젠가부터 가난은 죄가 되어 우리 앞에 돌아

왔다. 가난한 시인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가슴 속에 뭔가가 차올라 이내

묵지근하고 뜨거워진다. 결코 가난할 수 없다.



밥을 지으며


밥물은 대강 부어요

쌀 위에 국자가 잠길락말락

물을 붓고 버튼을 눌러요

전기밥솥의 눈금은 쳐다보지도 않아요!

밥물은 대충 부어요. 되든 질든


되는대로

대강, 대충 살아왔어요

대충 사는 것도 힘들었어요

전쟁만큼 힘들었어요


목숨을 걸고 뭘 하진 않았어요

(왜 그래야지요?)

서른다섯이 지나

제 계산이 맞은 적은 한 번도 없답니다!



다시 오지 않는 것들이라는 시집의 제목을 보며

나는 다시 올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

다시 올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서글픈 상념에 빠졌다

다시 올 수 있는 게 단 하나라도 있을까.

단 한 순간도 시간은 거꾸로 흐르지 않았다. 시간은 모든걸 휩쓸고 갔다.

그 가운데 어떤 하나가 시간을 거슬러 다시 올 수 있을까

단 하나도 없다

그 답밖에 없다.

다시 오지 않는 순간에 대한 시인의 말을 읽어보며 영상을 마친다.

 

 

시인의 말

 

내 생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며,

정신이 사나워져 시를 잊고 살았다. 길을 가다 번뜩 떠올라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주 멋진 구절이었는데, 나중에 아까워했지만…… 가슴을 두드렸던 그 순간은 다시 오지 않았다. 다시 오지 않는 것들, 되살릴 길 없는 시간들을 되살리려는 노력에서 문자 예술이 탄생하지 않았을까.

어느 봄날, 봉긋 올라온 목련송이를 보며 추억이 피어나고 노래가 나를 찾아왔다. 사랑을 떠올릴 수 있는 동안은 시를 영영 잃지 않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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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나나 - 2010 제18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박형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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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회의주의자의

잊히지 않는 어떤 소설에 관한 상념

부제 : 작정하고 만들어 보는 장광썰


어떤 소설은 읽고 나서도 한동안 또는 꽤나 오랫동안 읽은이의 내부에

침잠해 있다가 한번씩, 이를테면 언제 불어올지 알 수 없는 바람처럼

일어나 읽은이를 소설 속의 거리, 소설 속의 사람들에게 데려간다.

그런 경우의 대부분은 이유가 없다. 소설의 어떤 부분이 자신과 맞닿아

쉽게 지워지지 않고 오래 남아 마음속의 얼룩이 되었는지 설명할 수는 없다.

다시 한번 그 작품을 꺼내 그들의 안부를 묻고 싶거나 그곳의 거리, 거리

가운데 있었던 골목은 잘 있나 돌아보고 싶은 것이다.


새벽의 나나를 다시 꺼내든 것도 특별한 이유는 없다. 다만 그들과

그곳은 잘 있나 비록 어떤 등장인물은 부재하지만 그 부재를 확인하고

긴 골목길을 돌아 나오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소설 새벽의 나나는 태국의 나나역을 중심으로 뻗어 있는 매춘의 거리

소이 식스틴이라는 공간에 관한 소설이랄수도 있으며 최종 목적지를

아프리카로 정하고 여행길에 올랐지만 태국에 머물고 있는 레오가 만난

플로이와 그 주변 사람들에 대한 소설일 수도, 그 모두에 관한 것일수도 있다.

그런데 소설을 덮고 나면 그 모두에 관한 것은 희미하게 사라진다. 사라지면서

남기는 얼룩 같은 느낌이 있는데 그것을 선명한 무늬처럼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그리고 어떻게 이야기하려고 이러고 있냐

할 것이다. 소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대신 유난히 옮겨적은 문장이

많았던 소설이기에 그 문장들을 읽고 그 문장들에 대한 답장같은 것으로

대신하려고 한다.


이번 영상은 보여주기 위해 만든다기 보다 그냥 말하기 위해 만든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몇 년에 한번 들춰볼까말까 하는 책인데도 먼지를

듬뿍 뒤집어 쓰고 있는데도 버리지 못하고 살아남은 책 몇 권은 다들

가지고 있지 않나. 그런 경우라고 해두자.


태국이든 어디든 동남아라곤 한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딱 한 번,

곳을 가본다면 태국으로 날아가 나나역에 내려 서보고 싶지만 막상

티켓을 끊으라면 거기가 아닌 그 반대편 어딘가로 가버릴 것 같다.

그래야만 소설 새벽의 나나가 증발하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레오는 15년 전의 그 거리로 돌아갔다. 그렇게 돌아가게

만드는 어떤 영향력이랄까 이렇게 대본을 쓰게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일

것이다. 전체 4부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시간 순서에 따라 나열하자면

1부가 가장 뒤쪽에 위치 한다.


지금쯤 성질 급한 누군가는 대강의 줄거리를 찾아보고 있을 것인데,

주인공 레오와 플로이를 비롯 그곳을 스쳐가는 다양한 인물들이 있고

매춘과 매춘부에 관한 소설이네라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겉껍질일 뿐이다. 나나역이 가까운 태국 수쿰빗 소이 식스틴이라는

거리의 짧은 일대기라고 해두자. 그리고 작가의 말처럼 선택에 관한

이야기라고도 해두자.


지금 다시 읽는다고 같은 문장을 불러낼까 싶지만 그때로 돌아가 다시

한번 문장들에 심었던 감상들을 만나본다.


그리고 남들은 재미없겠지만 이 소설에는 두 번 반복되는 문장이 두 개

있는데 만약 이 책을 읽게 된다면 그 두 문장을 찾아보는 것도 나름의

재미라면 재미일 수도 있겠다. 정 못찾겠다면 살짝 알려줄 수도 있다.

내가 찾은 건 두 개지만 또 모르지 않겠는가 더 있을지도.



어디론가 가는 건 그곳에 꼭 가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곳에

더 이상 머물지 못하기 때문이다._14

 

여기 지금이 너무나 싫어서 여기만 아니면 지옥이라도 낫겠다는

심정이 들어 떠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은 있었을 것 같다. 한두

번이 아니라 매 순간이 그런 사람도 있을 것 같고 전혀 그런

심정을 이해못할 사람도 있겠지.

그런데 그렇게 떠나 도착한 곳이 여기와 똑같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지옥이라도 상관없다고 했으니 여기와 판박이처럼 똑같더라도

당신은 여기를 벗어나는 떠남을 선택할건지 한번 물어보고 싶다.

그럼 너는 어떻게 할 거냐고 묻고 있을 것인데, 떠난다는 것의

의미는 다른 곳에 간다는데 있지 않고 여기를 벗어난다는 그

움직임에 있다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에 매번 똑같은 곳에

당도한다는 걸 알더라도 나는 매번 떠나겠다. 똑같은 곳이라고

주저앉아 있는 것보다 같은 곳에 간다해도 일단 한 걸음 한 걸음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싶으니까. 시시포스 신화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인간은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일테니까.



우연과 운명은 거의 정반대의 의미를 가진 단어지만, 레오가

소이 식스틴에서 욘을 만난 건 우연이자 동시에 운명이었다. 45

 

의미만 놓고 보자면 두 단어는 서로 등을 돌리고 있지만 그

등이 서로 맞붙어버려 떼려야 뗄 수가 없는 샴쌍둥이와 같은

거라고 할 수 있다. 우연과 운명 뒤에 곧잘 오는 것 가운데

하나가 만남이라는 것인데, 우리의 만남은 운명이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건 운명도 아니고 우연도

아니라고. 다만 만났을 뿐인 것이라고.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는건 

운명인가 우연인가? 둘 다 아니다 그냥 우주가 그런 것이다. 그냥 

만나는 것이고 그냥 스쳐가고 헤어지는 것일 뿐이다.



믿었다 후회하느니 의심했다 사과하자. 64

 

믿고 싶은 모든 것을 의심하라고 어느 철학자는 말했다.

종교적 믿음과 같은 절대적 믿음이나 사적인 믿음이나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인간만이 믿음을 가져야 하지만

과연 인간이란 존재가 후회를 마음 한 곳에 티끌만큼이라도

두지 않고 쓸어낼 수 있을까? 나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내일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나 자신조차 믿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나 자신의 외부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어떤 믿음을 줄 수 있을까.

 


어쩔 수 없는 거야. 가난하다는 것과 여자라는 건 저주야.

플로이처럼 가난하게 태어난 여자는 이중의 저주를 뒤집어

쓰고 사는 거지. /.../

너와 나는 남자야. 그 저주를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거지.

그러니까 이해한다고 말하지 마. 131


여기에서의 키워드는 가난과 여자 또는 남자가 아니라 이해라는

키워드다. 좀 과격하게 말하자면 나는 이해라는 낱말은 국어사전

에서 사라져야할 만큼 써서는 안될말이라고 생각한다. 정 써야

한다면 부정적 의미일 때만 쓸 수 있는 말일 것이다.

다른 관계에선 몰라도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 나는 너를 이해

한다는 말만큼 새빨간 거짓말도 없다. 인간은 절대로 타자를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한다는 것은 온전히 타자의 입장이 된다는

것인데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특히나 가까운 사이일수록 이해의 벽은 높고 단단하다. 이해라는

말을 쉽게 쓰는 사람일수록 믿을 수 없는 사람이다.



, 또 놀러 와. 그건 이별에 붙어 다니는 공연한 소리였다.

의사소통의 7퍼센트만이 언어로 이루어진다. 돌아보지도 않은

채 또 놀러 와라고 말한 건 7퍼센트뿐이었다. 나머지 93퍼센트는

다신 돌아오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었다.159


흔히 립 서비스라고들 한다. 상대방을 위해 하는 말이 아닌

자신의 입장이 뻘쯤할까봐 가림막처럼 둘러대는 말. 안해도 되는데

하자니 하나마나한 말. 그 말을 듣는 사람도 그것이 립 서비스란

걸 안다. 흘려 듣지만 때론 흘려지지 않고 걸러져 찌꺼기처럼

찜찜하기도 한 말. 그런 빈 말을 남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차라리 말하지 않음으로 받는 오해를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곧 죽어도 빈 말은 안하겠다는 사람의 진심은 쉽게 발견 되지

않고 곧잘 오해되기 쉽다. 곧 들어도 뻔한 빈 말을 남발하는

사람에게 나 역시 건성으로 대한다. 물론 나 역시 밥 한번 먹자

같은 빈 말을 얼마나 남발했던가 하면 할 말은 없다.



스쳐 지나가는 낯선 풍광은 삶에 너무 깊이 끼어들지 않기로,

개연성 없는 농담처럼 유쾌하기로, 후에 돌아갈 남루한 진짜

생활을 위 하여 사진첩의 얇은 낭만에 머물러주기로 미리

약속되어 있다. 173 353


여행 중의 이동하는 길 위에서 차창에 머리를 기대거나 시선을

기댈 때 바라보는 창밖의 풍광에 넋이 빠져 멍할 때가 있다. 마냥

이대로 길 위에서 흘러 가기만 했으면, 다시 돌아가지 않고 길

위의 여행자가 되었으면 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 풍광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면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대부분의 유혹은

미약해서 우리들 대부분은 무사 귀가를 안도하며 기쁜 마음으로

돌아온다. 떠나고 싶었던 만큼 여기로 돌아오고도 싶은 것이다.

돌아가고 싶다는 귀소의 본능이 낯선 풍경들을 뿌리치게 한다.

그런데 여기에 내린 뿌리가 병들었거나 뿌리 내려야 할 땅이

너무 척박할 땐 쉼없이 떠나는 것을 상상한다. 여기가 아닌 저기,

지금이 아닌 언젠가에 마음이 빼앗겨 그는 여기에 머물고 있지만

부적응자가 된다.



그 자신이 무겁게 가라앉은 연기의 일부로, 스쳐 지나가는

바람의 일부로, 한없이 가벼운 대기의 일부로 변해 이리저리

흘러 다니는 느낌, 그저 세상에 가득한 먼지의 일부로 날아

다니는 느낌, 내가 나 자신이 아닌 느낌, 아무래도 좋은 느낌,

우주에서 불어온 바람이 나를 붙들어 어디론가 데려가는 느낌,

그곳에서도 역시 나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래도 좋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318


반복되는 듯한 일상에서 나는 나라는 이름으로 나름의 역할에

붙들려 있어야 한다. 그런 반면 여행자가 되는 순간부터 여행지를

돌아다니는 여행객이 되면 나는 일상의 내가 아니어도 된다.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여행지에서 평소 하지 않던

행동을 하거나 옷차림이 과감해지는건 그런 이유다. 하지만 이런

일탈은 시한부 일탈이다. 길어야 몇 박 며칠 아니면 몇 달 그도

아니면 몇 년. 인생은 여행이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인생을 여행

처럼 사는 사람은 흔한 말처럼 흔치만은 않다.

일상을 벗어던지고 이상으로 가는 길 위에 맨발을 얹는 사람만이

진정한 일탈의 여행자라 불릴 수 있다. 몸이 일상의 속박으로부터

풀려날 때 마음도 풀려나기 쉽다. 물론 일상 속에서 마음의

자유에 도달하는게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그것은 하나의 경지다.

진흙탕에서 연꽃을 피워내는 것과 같은 경지. 감히 말하지만 나를

포함 대부분은 못한다. 그래서 몸을 먼저 건져내야 하는 것이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나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란 말이 괜히 나온게 아니다.

대부분의 우리는 몸따라 살게 되어 있다.비록 일상에 함몰 되어

나락으로 침몰하는 와중에도 우리 중의 누군가는 쉼없이 이상을

꿈꿀수 있다 =는 것이다. 다행이라면 그것밖에 없다.

 


조금씩 침몰해가는 느낌이었다. 엔진이 멈추었고, 선미는 물에

잠긴 지 오래다. 구하러 오지 않아도 돼. 죽도록 내버려두어도

좋아. 한 가지만, 내가 그곳에 가려고 했다는 것만 기억해줘. 308

 

기억해 주지 않았으면. 아무도 나를 기억해 주지 않기를 바란다.

바라지 않아도 오래지 않아 아무도 기억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딱히 기억될 만한 사람이 아니니까. 우리들을 얕보는 건 아니지만

우리 가운데 과연 오래 기억될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그런데 그렇게 기억에 남는 일은 과연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일일까.

그렇다고 잊어달라고 하는 것도 기억해 달라는 말이나 마찬가지므로

떠날 때는 말없이 라는 철지난 유행가 가사처럼 말없이 가야 한다.

 


사랑이 식을까 봐 걱정하는 건 행복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미

사랑을 얻고 있기 때문이고, 아직 사랑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랑이 식을까 봐 걱정하는 건 사랑의 여러 단계 중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일지 모른다. 309

 

달구어진 건 식는게 세상 순리다. 또 식어야만 한다. 안 식으면

증발해 버릴테니까. 그런데 자신이 끓고 있어서 뜨거운 상태에선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다. 끓어넘쳐 불이 꺼져야 식는다.

물론 말은 쉽다. 나 역시 하루에도 열두 번 천불이 나는 걸

어찌할 수가 없으니까.



언어라는 건 몹시 불완전한 체계여서, 아무리 명징한 단어가

있다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아름다운 긴 털의 눈부신

새하얀 따위의 수식어를 주렁주렁 달아야 한다. 심지어 그런

식으로 사전에 존재하는 모든 수식어를 갖다 붙인다 쳐도,

지향하는 대상 자체에는 끝내 도달할 수 없다. 조금 더

가까워질 뿐이다.337


전적으로 동감하는 말이다.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설一物日語說

역시 타당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언어가 불완전하다는 건

여러 민족들의 언어를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모든

언어의 장단점을 통합해 완벽한 언어를 만든다해도 생각이나

마음이라는 추상적이고 무형의 것을 딱딱하고 한정된 언어로

형상화 한다는 것은 허공을 잘라내 육면체를 만들어내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말을 끝없이 갈구한다.

특히나 타인으로 부터의 말을 고파한다.

그 말이란 것은 쥐에겐 독인데 쥐약이라고 불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영혼은, 인간은 그 자체로서 각각 하나의 우주다. 같은 태양계라

해서 화성이 지구를 이해할 수는 없다.392

 

중고서점에서도 곧잘 발견되는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을 알만한 사람은 모두 알 것이다. 한때 지구인들은

화성인이라는 외계인을 문어와 비슷한 모습으로 상상했을만큼

다른 별의 생명체에 대해 이질적인 존재로 여기고 있다.

그렇듯이 남자와 여자는 각각의 별에서 왔다고 할만큼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비유한 말인데 이건 남자 여자의 문제가 아니라

앞에서도 말했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해에 관한 문제다.

남자와 여자 사이만 이해가 안되고 있는게 아니란 말이다.

나를 이해하는 사람도 없고 당신을 이해하는 사람도 없다. 다만

우리는 누군가를 해석하려 들고 있을 뿐이다. 외국어 한 문장을

해석해도 제각각이고 심지어 모국어로 대화를 해도 말이

안통한다고 하는데 해석이 낳는 숱한 오류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적당히 속이고 속고 있을 뿐이다.

 


수년 전 지인의 권유에 의해 박형서 작가의 소설을 처음 접한 것이 새벽의

나나였다. 잘 썼네 하며 읽고 덮어두었다가 몇 권의 책을 내다 팔 때 함께

딸려나갔다. 그렇기 때문에 책이 없어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어떤 책은 빌려

읽고 소장해야겠다 싶어 굳이 읽은 책을 다시 구입하기도 하는데 도서관에서

빌려오며 이 책을 다시 사서 가지고 있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다고 다시 펼쳐볼리는 없다는 걸 나는 잘 안다.

어쩌면 수중에 없고 멀리 떨어져야 그리움이 더해지는 것처럼 이 책은 부재해야

더 오래 기억할 그런 책이어야 할 것 같아 끝내 재구매는 하지 않겠지 싶다.


더 많은 문장들이 있겠지만 몇몇 문장들을 불러와 그것과는 상관없는 동문서답식의 

말을 해봤다. 어떤 말들이든 자꾸만 말을 걸어오는 소설들이 있는데 그런 소설들은

쉽게 잊히지 않는 것 같다. 새벽의 나나는 오히려 내가 자꾸만 말을 걸고 싶어진다.

거긴 어떠냐고 여전히 여전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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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그리고 저녁
욘 포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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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그리고저녁 #욘포세

21세기의 베케트‘ ?
그리고 침묵과 여백, 베케트의 ‘제2의 언어‘ 어쩌구, 죽음과 삶이 어떻고 하는 것만 보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들고와 읽었다

낚였다

이 작품에 한해, 어디가 베케트인건지? 옮긴이의 의견엔 한 오라기의 터럭만큼도 공감할 수 없었다. 괜히 옮긴이의 말 부터 읽어서 한껏 어떤 기대가 하늘을 찔렀나 싶다

지금 부터 스포일 수 있음



한 사람이 태어나는 장면의 초반부와 거기서 훌쩍 뛰어넘어 그가 죽어 보내는 한 나절의 이야기
딱 그게 다다

삶과 죽음이라는 거대한 이야길 너무 순진하게만 그려내는 것도 그렇고 동어반복이 수없이 이어지는것도 그렇고 짧은 분량임에도 지루했다

아니 이 작품에서 마침표가 어떻구 하는게 작품이 가지는 의미나 형식적으로 따져봤을때 어떤 의미가 있나? 그걸 옮긴이는 언급할 필요가 있나 싶다.

작가의 산문적 특성을 과감히 생략했다는 영어판본의 편집자가 맞다고 느낀다.
작가의 독특한 문체와 실험적 면모를 원문에 가깝게 되살렸다는 독어판을 중역했다는데 솔직히 그런 특징을 살려야 했는지 의문이다

신노르웨이어라는 원어를 읽을수 없으니 문체적 특징이 어떻고 해봤자 부질없는 일이다 다만 번역서 가운데 외국의 방언을 나타낸다고 그걸 한국의 경상도나 전라도 사투리로 번역하는 어처구니 없음의 경우는 없어야 한다 그건 번역자의 쓰잘데 없는 오지랖이다.

내가 딱 싫어하는 그런 꽈의 읽을거리에 어쩌다 낚여서
누굴 탓하리
다 내 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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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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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잠깐 잡담을 좀 한다.


루시아 벌린을 비롯 많은 예술가들이 생존하는 당대에는 지독하게 무명이다보니 경제적 빈곤으로 인해 처참한 생활을 하다 아무도 모르게 생을 마감 한다. 그렇게 죽어간 예술가들 가운데 일부는 사후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가로 재평가 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고흐나 카프카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고흐는 살아생전에 단 한 점의 작품을 팔았다고 하며(동영상 맨트가 틀렸습니다), 카프카 역시 유언을 지켜주지 않은 친구 덕분에 오늘날의 카프카가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에게 고흐나 카프카가 없다한들 바뀔 건 하나도 없다. 그들을 알았기에 그들이 없었다면 이라는 가정이 성립할 뿐이다. 사후에 유명해지지 않아도 좋으니 더 많은 예술가들이 살아서 자신의 작품으로 인정 받는 일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술가 당사자들의 생각은 어떨까 궁금하다. 당대에 인정 받다가 사후에 잊혀지는 것과 당대의 무명을 보상받듯 사후에야 비로소 인정 받고 오래 기억되는 것, 과연 예술가들은 어느 쪽을 택할까. 예술의 예자도 모르지만 나는 당대에 영광을 누리고 자연스레 잊혀지는 쪽을 택하겠다. 나 없는 세상에서 내 작품으로 인정 받아 내 작품이 수억원 하면 뭐하고 전세계인들의 필독서가 되는게 무슨 소용인가 싶다 그 말이다.


최근 이야기 한 리스펙토르나 오늘 이야기 할 루시아 벌린이나 사후에 인정 받았다는 공통점 때문에 한번 이야기해 봤다.



우선 도대체 이름도 생소한 루시아 벌린이란 작가가 누구냐부터 알아봐야 할 것 같다


루시아 벌린 Lucia Berlin 1936~2004


알래스카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여러 광산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전쟁에 참전했던 아버지가 돌아온 후 칠레의 산티아고로 이주한다. 10살에 척추옆굽음증 진단을 받았고 평생 고통스러운 상태가 따라다녔다.


3번 결혼했지만 모두 이혼했으며 네 아들을 부양하기 위해 다양한 일을 해야 했다. 평생 76편의 단편을 발표했다.『향수』(1991) 『안녕』(1993) 『내가 지금 사는 곳』(1999) 과 같은 단편집을 발간했다. 2004년 태어난 날인 11월 12일 사망했다.


지금쯤 이 작가가 또는 이 책은 어떤가 싶어 온라인 서점을 검색해보고 있을 시청자도 있을 것이다. 소설가 김연수의 띠지 카피가 눈에 띈다.


“그동안 루시아 벌린을 몰랐다고 해도 괜찮다. 지금이라도 읽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나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카피긴 하다. 해외 작가들의 작품 가운데 일단 번역 된다는게 어디냐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니까. 원서로 먼저 읽은 어떤 독자는 혼자만 알고 싶은 작가라고 후기를 남겨 놓기도 했다. 그럴 때 원서를 읽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은 뭔가 억울한 기분이 들게 마련이다. 그러할 때 김연수의 말처럼 지금이라도 읽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 말이다.



검색해보면 알겠지만 이 책에 쏟아진 찬사는 실로 휘황찬란하다못해 눈이 부실 지경이다. 그런 찬사들을 보고 있노라면 작품의 좋고 나쁨을 떠나 이제야 그렇게 호들갑을 떨고 있는 모든 매체들이 좀 꼴사나운 것도 사실이다. 도대체 그동안 눈 감고 있다가 작가 사후 11년이나 지나서야 온갖 미사어구를 갖다붙이는 건 스스로 책을 알아보는 안목의 어두움을 드러내는건 아닌가 그 말이다.



막연한 느낌이지만 평생 쓴 76편 가운데 43편이 소개 된 만큼 나머지 작품들이 소개될 것 같진 않다. 그렇다고 했을 때 아마 이 책은 입소문을 거치고 거쳐 절판된 후 다시 발간 되기도 한 앤드루 포터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과 같은 책으로 남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좋은 작품집이란 얘기다.



43편 모두를 이야기할 수는 없고 표제작 청소부 매뉴얼 중심으로 작가와 작품에 대해 살펴본다.


원제는 자살 유언 쓰기 매뉴얼 인데 바꾼 제목이 더 낫다는 생각이다.

작가들 자신이 지은 제목보다 출판사에서 지어주는 제목이 대부분의 경우 더 나은 경우를 많이 본다.


제목 그대로 각 가정으로 방문해 청소부 일을 하고 한편으론 수면제를 모으며 보고 느낀 점들과 그 과정에서 얻게 된 노하우 그러니까 청소부 매뉴얼이 소설의 주요 이야기다. 그 이야기의 틈새에 살짝살짝 주인공의 이야기를 한두 문장씩 넣은 게 소설을 더욱 빛나게 하는 지점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수면에 선명하게 반사되는 풍경이 청소부 이야기 이고 수면 밑으로 희미하게 보일 듯 말듯한 물의 흐름이 한 문장씩 툭툭 들어가 있는 자신만의 이야기다. 그것을 캐치하여 연결해보는 것도 재밌었다.


그 문장들을 모아봤다



내가 실제로 훔치는 건 수면제뿐이다. 47p

술 취한 인디언이 이제는 내 얼굴을 익히고 항상 이렇게 말한다.

“그대여, 인생이란 그런 거라오.” 52p

이들의 집에서 일하며 모은 수면제가 이제 서른 알이다. 52p

나는 수면제를 모은다. 57p

테리, 사실 나는 전혀 죽고 싶지 않아. 64p

나는 마침내 울고 만다. 64p


어쩌면 이 문장들을 쓰기 위해 청소부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포장했는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나의 억측일 것이다. 물론 이 문장들 외에 살을 붙인 몇몇 문장들은 시청자들을 위해 꺼내지 않고 남겨둔다. 여러 청소부 이야기들과 이 문장들이 전혀 이질적이지 않게 적절한 타이밍에 치고 들어와 있다.


소설가 마다 저마다의 전략과 전술이 있을 것이고 각자 특기와 장기가 있을 것이다. 잘 나가는 작가라면 당연히 있게 마련이다. 루시아 벌린의 전략이랄까 특기는 이런데 있지 않나 싶다.


직접 말하기 방식의 소설이 아닌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의 소설을 좋아하는 나로써는 양적으로는 단편의 분량 속에서 여러 장면 장면으로 조합된 하나의 완성된 이미지가 읽은 다음에 떠오르게 하는 루시아 벌린 이라는 작가를 접할 수 있어 아주 흡족한 독서가 되었다.


소설의 디테일은 경험과 취재에서 올 수 있을텐데 루시아 벌린의 소설은 다분히 저자의 경험에서 왔을 것이다. 이를테면 술주정뱅이 외할아버지의 모습이 단편 ‘모이니핸 치과’에서 살짝 드러나는 것처럼 경험 아니면 쓸 수 없는 디테일들이 있다. 그런 면에서 단편 ‘청소부 매뉴얼’의 어디까지가 상상이고 어디까지가 경험담일지 한번쯤 상상해 보는 것도 소설을 읽는 또다른 포인트 일 수 있다. 물론 우리가 그 모습들을 전부 알아챌 수는 없을 것이다.


벌린이 사망한 후 네 아들 중 한 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어머니의 단편들은 실화입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자전적이라는 건 아니지만 대충 가깝다고 할 수 있죠.”


역자 후기에서 옮긴이는 루시아 벌린과 레이먼드 카버의 작가적 성패를 언급하고 있다. 카버는 당대에 성공한 작가가 되었지만 벌린은 사후 11년이 지난 2015년에서야 베스트셀러 작가로 대중에게 알려졌다. 역자는 카버와 비교를 하며 벌린이 당대에 성공하지 못한 것은 결국 작가 자신의 성향에서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진단을 한다. 생전에 벌린은 “자신은 안정된 삶에 저항했다.”라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벌린은 일찍이 예술기금에서 지급하는 지원금을 받았지만 그 돈을 여행하는데 모두 써버렸고 그후로는 어떤 지원금이나 보조금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 기질의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성격을 주체하지 못해 좋은 기회가 되리라는 예감을 불안하게 외면하며 막다른 곳으로 돌진하는 사람들. 불운한 천재들의 특징이다.


루시아 벌린이라는 생소하지만 아주 인상적인 작가가 이제 막 국내에 소개 되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벌써 더 이상 씌어지지 않았다.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소설들에 휩쓸려 루시아 벌린이라는 이름을 놓치는 일은 당신이 소설을 사랑하는 독자라면 좀 많이 안타까운 일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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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짐승아시아하기 문지 에크리
김혜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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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하는 출판사 문학과지성사에서 새로운 산문 시리즈를 출간했다.

 

이름하여 <문지 에크리>

에크리란 프랑스어로, 씌어진 것 혹은 쓰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시리즈는 작가에게 최대한 자유로운 글쓰기 방식을 허용하는 데서 시작하고 있다.

작가는 어떤 대상이나 주제와 상관없이 애정하는 관심사에 대해 쓴다. 그래서 이 시리즈의 글은 장르적 경계를 넘는다. 작품을 통해 만나는 작가의 모습에선 볼 수 없었던 좀 더 개인적인 내밀한 영역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 같다.

 

1차분 4권이 출간되었다.

작고한 고 김현 평론가, 시인 김혜순과 김소연 그리고 문학평론가 이광호가 그 주인공들이다.

책 뒷날개에는 출간 예정인 저자들의 이름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그 면면이 기대할만 하다. 예를들면 내가 기대하는 저자를 꼽아보자면, 이제니, 이장욱, 정영문, 진은영, 한유주 등이다.




특히나 평론가 이광호는 자신이 키우는 고양이를 대상으로 한 글을 썼는데 많은 애묘인들이 읽어보면 좋지 않을까 싶었다.

 

책의 크기나 만듦새도 다 마음에 드는데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고 하더라도 문지 에크리 라는 하나의 시리즈 안에 들어가는 책들의 디자인 치고는 좀 쌩뚱맞은게 아닌가 하는 점이다. 특히나 김혜순 시인의 책만 검은색 바탕에 표지 그림도 공통적인 느낌이 없다. 저자의 요청에 의해 특정 화가의 그림을 쓴 것 같은데 아쉽다. 뭐 책덕후들이 흔히 하는 책품평을 조금 해봤다.

 

1차분 네 권 가운데 나는 당연하게도 애정하는 김혜순 시인의 책을 골랐다.

이 산문을 통해 시인 김혜순이 시를 쓸 때 느끼는 바나 자신의 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등을 읽을수 있어 김혜순의 시를 좀 더 가깝게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라면 읽어봐야할 책이라

그 이유는 책머리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어서 한번 옮겨와 봤다.

 

 

ㅡ책머리에

 

나는 시를 써오는 동안 왜 그토록 많은 쥐, 돼지, , 곰 등등과 유령, 여자로서 시 안에 기거했던가?

나는 그것에 대해 쓰지 않고, 그것을 '한다'고 생각했던가?

나는 왜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죽은 자, 사라진 자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던가?

나는 산문을 쓰면서는 왜 그토록 자주 바리공주를 호명했던가?

나는 바리공주가 아버지의 나라를 반쪽 떼어 주겠다는 제의도 거절한 채, 이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 죽은 자를 건네주는 영구적인 직업으로 뱃사공을 선택한 것처럼, 나 스스로의 여행을 떠나보기로 했다.

 

_부분

 

김혜순 시인의 시를 오래 읽어온 독자라면 그의 시 안에서 유독 자주 등장하는 동물 하나를 꼽으라고 할 때 쥐라고 한다면 대개가 수긍하리라 본다. 그리고 바리데기에 대한 책을 쓰기도 한 저자인만큼 김혜순과 바리데기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봐야 한다.

 

여자짐승아시아하기 라는 제목을 이루는 각각의 낱말을 하나씩 떼어낸 다음 그 의미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여자로써 짐승으로써 아시아에서 여러 주체가 되어 하게되는 하기 로써의 글쓰기인 것이다.

 

최근 출간된 저자의 시집 날개 환상통에서 평론가 이광호는 -하기를 통해 김혜순 시를 언급했다. 이처럼 무엇무엇 하기 라는 것은 시인 김혜순이 붙잡고 있는 시적인 화두가 아닐까 싶은데 이 책을 통해 살짝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이 책은 티벳, 인도, 실크로드를 잇는 지리적 환경에서 씌어지는데 그 가운데 특히나 붉음으로 대표되는 실크로드의 출발과 몽골까지 이어지는 여정에서의 글들이 나는 좋았다 그 가운데 한 편의 일부를 소개해 본다.

 

 

붉은 책

 

이것은 해가 지지 않는 책.

내가 서쪽으로 서쪽으로 이 책을 읽어가면 영원히 황혼이 계속되는 책.

이 책은 사막의 영혼, 모래의 날개.

 

당신이란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미칠 지경이다.

당신이란 붉은 책은 한번 펼쳐지면 다시 닫을 수가 없다.

아마 지옥이 그럴 거다, 지옥이란 다시 돌이킬 수가 없는 곳.

당신을 접으려 하면 당신은 읽어라 읽어라 읽어라 펼쳐질 줄밖에 모른다.

당신은 한번 빠지면 실종되려야 실종될 수가 없는 열탕 지옥이다.

이 사막에선 이 세상 사람 모두가 혹은 모래 알갱이 전부가 나만 쳐다보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_부분



앞서 올린 여행생활자 영상에서 이야기 했듯이 나는 사막에 대한 불온한 상상이랄까 로망을 품고 있는데 붉음 으로 묶여진, 심지어 붉은 종이 위에 씌어진 사막과 모래, 태양, 사라진 국가 등 결국 가지 못할 붉은 사막에 대한 문장이 주는 막연한 만족이 주는 체념을 즐기는지도 모르겠다.

책머리를 보면 알겠지만 이 책은 산문이지만 산문의 모래언덕에 발이 빠져가며 오르다보면 저자의 시세계를 마치 신기루처럼 만나지 않을까 싶은 설레임 가득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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