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멀리 있다 우루는 늦을 것이다 ㅣ 입장들 4
배수아 지음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9년 10월
평점 :
1. 들어가기 전에 잡썰
2. 간단한 줄거리와 작품에 대한 썰
2-1 그리고 어떤 한 문장
3. 마치며 하는 잡썰
4. 책 만듦새와 오탈자에 대한 빡침 이야기
1. 들어가기 전에 잡썰
어쩌다보니 배수아 작가의 책이 12권이 되었다. 참고로 모든 책을 가지고 있는건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배수아 작가의 열혈 독자냐 하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오해는 금지) 절판된 책을 중고로 구입한 것도 있고 신간이 나오자마자 구입한 것도 있다. 그 가운데 반 정도 읽고 반 정도 안읽은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책은 여전히 인상 깊게 남아 있고 또 어떤 책은 읽긴 읽었지만 무얼 읽었는지 모르겠는 것도 있다.
한편으론 단지 배수아 번역이라는 이름 때문에 구입한 번역서들도 눈에 띄고 단지 배수아 작가가 호평했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고 읽게 된 외국 작가, 이를테면 토마스 베른하르트나 제발트 그리고 페소아. 최근 읽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까지 있으니 이쯤 되면 배수아 열혈 팬 맞네 라고 하겠지만 다시 한번 거듭 말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다만 뜨뜨미지근한 관심을 두고 있다는 데에는 인정하겠다.
어떤 작가를 말할 때 마니아적인 작가라고 한다면 그런 평판은 작가에게 긍정적일까 부정적일까. 그와 상관없이 나는 배수아 작가가 일반적으로 두루두루 읽히는 작가는 아니라고 본다. 일군의 확고한 지지를 보내는 독자층을 가진 작가가 아닐까 하는데 왜냐하면 당연한 소리지만 그 작품들이 가지는 독특한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이야기 할 <<멀리 있다 우루는 늦을 것이다>> 역시 그러했다.
2. 간단한 줄거리와 작품에 대한 썰
책을 읽기 전에도 그랬고 읽고 난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과연 제대로 읽고 제대로 작가의 의도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다. 아무리 책읽기가 주관적 영역이라 해도 너무나 얼토당토 않은 말을 할 수는 없다. 지금처럼 자꾸만 변죽만 울리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어디로 들어가고 나와야 할지 입구도 출구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코끼리를 손으로 더듬는 정도가 아니라 울음소리만 듣고 코끼리를 안다고 하는건 아닌지 싶다. 눈 밝고 귀 밝은 독자들은 부디 코끼리 등에 직접 올라타 그 느낌을 체험하기를 바란다.
이 소설은 전체 3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는 모든 기억을 까맣게 잊은채 여행지 숙소에서 잠에서 깨어난 두 남녀가 어떤 무녀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2부는 1부와는 상반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여행에서 돌아온 듯한 여자와 그의 손님으로 등장하는 남자가 서로의 기억에 대해 이야기 한다. 3부에서는 우루라는 여자가 보고 기억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하는데 1부와 2부의 이야기들이 혼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이 소설을 읽는다면 어쩌면 1부로 돌아가 다시 읽어야만 아 이게 그건가 하는 것들도 있을 것 같다.
아주아주 후려친 줄거리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 소설은 주인공이 뭘 하느냐 같은 줄거리는 중요하지 않다. 굵직굵직한 서사의 줄기를 따라가며 등장인물과 사건의 전개를 기대하지 않는게 좋다.
어떤 문장이나 문단이 주는 의미를 곱씹어 본다거나 추상적 의미 속으로 자신이 밀려가는 독서체험이 재미라고 느낀다면 소설가 배수아의 애독자가 될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개인적으로 꼽아본 몇 문장을 읽어보고 이야기해보는 것이 이 소설의 리뷰가 되겠다. 인용하는 문장에 대한 코멘트는 소설적 맥락과는 상관이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 첫 번째 문장이다.
하지만, 어디 있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찾아갈 수가 있나요?
당신은 그 사람에게 가지 않아. 그 사람을 찾지도 않아. 그 사람과 마주치는 거지. 그래서 그 사람을 알아보는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의미가 없어.
_26p
굵은 글씨체는 본문에서 강조된 것이다.
나는 이 문장에서 강조된 말들 가운데 ‘마주치는’ 이라는 것에 생각이 쏠렸다. 이 마주침에 엮어볼만한 본문 가운데 일부를 읽어보기는 하겠지만 납득을 바라는 건 아니다.
유일한 일, 눈부신 일, 압도하는 일,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느낌으로 비범한 일, 매혹하는 일, 오래오래 기억에 남아 있거나 혹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때가 되면, 불현듯 기나긴 망각을 깨고 터져 나오게 될 일, 의미 있는 일, 혹은 아무런 의미를 찾아낼 수 없는 채로, 모든 의미를 몰아내 버리는 일, 의미와 모순되는 새로운 의미를 만드는 일, 오직 예감으로 이루어진 일. 그 일이 지금의 나 자신과 어떤 맥락을 형성하는지 절대 알 수는 없겠지만, 나 자신의 존재가 그 일이 있기 위한 어떤 맥락이었음을, 지금 현재 분명히 직관하는 일. 그 일은 잃어버린 시간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갖는 것은 삶의 가장 놀라우며 신비한 사건에 속한다. 그런 일이 있었다. 낯설고 놀라운 일이. 믿을 수 없는 일이. 범상하지 않은 일이. 거의 신비에 가까운
일이. 그런 일이 있었다. 그런 일이 일생의 달빛처럼 내 위를 희게 지나갔다.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나를 관통하면서 지나갔다. 그것은 내게 일어났고, 동시에 그 일은 내게서 유예되었다. 나는 그것을 모르지만, 그것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이미 일어난 일이겠지만, 그것이 다가오는 예감을 항상 느낀다. 나는 그것을 오직 모르면서 안다. 망각으로서만 그것을 기억한다. 그러다 아주 뒤늦게, 믿을 수 없을 만큼 지연되어 효력이 나타나는 수면제처럼, 그것이 불현듯 내 위로 떠오를 때가 있다. 유예된 효력이 언제 나타나는지, 나는 절대로 알지 못한다. 냉장고 문을 열다가, 길을 걷다가, 책을 읽다가, 양파를 썰다가, 심지어는 잠을 자던 중에도, 그것이 의식의 표면을 찢어발기며 떠오른다. 그런 일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모르면서 안다! 마치 어느 날 문득 마주친 어떤 사물을, 어떤 대상을, 어떤 느낌이나 이야기를, 스스로 이유를 모른 채 물끄러미 주시하게 되고, 그것과 연관을 맺기를 간절히 원하다가, 마침내는 그것이 세상의 다른 어떤 우물도 아닌, 바로 나 자신으로부터 나왔기를, 간절히 그리워하고, 상상하고, 믿고, 마침내 알게 되는 것처럼.
그런 일이 있었다.
_83p
인용한 부분에는 네 번의 ‘그런 일이 있었다’라는 말이 있는데 나나 당신들 역시 그런 일이 있었지... 하며 딸려 나오는 어떤 일이, 사람이 있을 것이다. 작가의 표현대로 모르면서 알고 망각으로서 기억하는 일들은 굳이 몰라도 그만이고 안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그런 일들은 부지불식간에 ‘길을 걷다가’ ‘양파를 썰다가’ 마른 하늘에 번개가 번쩍 하고 빛나듯이 기억 속에서 튀어나오는데 그럴 때면 가던 걸음이 썰리던 양파가 모두 정지 된다.
나는 앞에서 ‘마주치는’ 이라는 말에 생각이 쏠렸다고 했다. 길을 가다 누군가를 마주치든 아니면 어떤 생각을 마주치든 이 마주침은 어디서 오는 것이며 왜 오는 것인지 어쩌자고 무방비로 마주쳐야 하는 것인지 같은 생각이 들 때 마다 대책은 속수무책임을 느낄 뿐이다.
그렇게 내던져질 뿐이다. 우리가 이 세계 안에서 존재하는 것은 기억으로 시작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이 기억을 잃은 남녀로 시작해 각자의 기억에 대해 이야기 한다는 것도 우연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 소설이 기억에 관한 소설은 아니다. 소설의 오독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앞뒤 맥락도 없이 문장을 인용하고 어줍잖은 말들을 늘어놓았는데 여기에 무슨 소설적인 줄거리와 사건이 있겠는가. 이 영상에서는 이 정도의 말들만 꺼내겠지만 한 문장을 마주치고 한 문단을 마주치고 잠시 책을 내려놓고 어떤 블랙홀 같은 세계로 빠져들면 거기에 시간이란 정지가 아니라 시간이 없는 세계가 되버린다. 생사를 넘나드는 찰나를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엔 공통적으로 그 짧은 순간에 지금까지 자신의 인생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고 하지 않는가. 그것과 같은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과 사건이 전개되는 줄거리를 따라가느라 정신이 쏙 빠지는 그런 소설도 좋겠지만 나는 딱히 그런 소설에 손이 잘 가지 않는다. 어떤 몰입이 되었든 각자 즐기면 그만인 일이겠지만 내 안에 있는 뭔가를 건드리고 떠올리게 하거나 마주치게 하는 어떤 것들을 찾는 일 가운데 하나가 글자를 읽어대는 일 같다. 여하튼 이제 시작인데 이렇게나 지루한 말하기를 시키고 있으니 이 소설 읽기는 나름대로 대박이랄 수도 있겠다. 한편으론 흥행과는 거리가 먼 영화를 만들고 있는 대책없는 감독의 심정이 이 비스므리 한건가 싶기도 하다. (편집은 뭐 어쩌려고 이렇게도 지껄여대나)
두 번째 문장을 읽어 본다.
당신은 놀라운 일, 혹은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일을 경험한 적이 있나요?
사실, 잘 생각해 보면 그런 일은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주 일어난다고 손님은 대답한다.
그런데 그것은 대개 불완전한 파편의 형태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 삶의 그림을 완성하는 데 불필요한 조각처럼 보이고, 그래서 우리의 의식은
그것이 무엇의 예감인지 알지 못하는 채 대개 그것을 기억하지 않고 파기해 버린다.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일, 우리의 삶과 논리적 맥락을 이루지 못하는 이질적 파편들을 우리는 그렇게 부른다.
_106p
인간이 지속적으로 과학 기술을 발전시켜나가는 근원에는 설명하고자 하는 욕망 때문일 것이다. 과거에는 설명할 수 없었던 많은 일들이 이제는 과학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이 설명의 범주 안에 포함되었는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이 설명의 범위가 어디까지 가 닿을지는 모르겠지만 끝내 설명될 수 없는 미지의 영역도 남겨지긴 할 것 같다. 어쩌면 그래야만 한다. 우주의 끝의 끝을 넘어서까지 명명백백하게 밝혀져 그야말로 모든 것이 설명 가능해진 다음의 인간에게 남겨진 것은 무엇일까. 더이상 설명할 티끌 하나 남아 있지 않은 인간은 아마 신이 되었을텐데 그땐 무엇을 할까.
일상이라고 이름 붙여지면 놀랄 것도 이상할 것도 없는 일들의 연속이다. 연속이라하지만 연속이 아닌 한 장의 평면이다. 설명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평면은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설명의 대상은 밝혀지지 않는 것, 밝혀지고 있는 것인데 한 눈에 간파되는 평면은 설명이 불필요한 세계인 것이다.
뭐 이런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귀신이 씨나락 까먹는 소릴 하게 하는 인용문장이었으므로 이 또한 만족한 독서의 한 증거라고 할 수 있겠다.
삼 세 번이라고도 했으니 지겹고 어처구니가 없어도 세 번째 문장까지는 가자.
나는 그 사진이 나 자신과 깊게, 이 세상의 다른 무엇보다도 더욱 깊게 연관되어 있음을 안다.
구체적으로 어떤 연관인지는 설명할 수 없다.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보는 순간 그냥 알게 되는, 휘발되는 향기와 같은 앎이 있다.
_121p
직관이라고 하면 맞는지 모르겠지만 이해와는 상관없이 그냥 알게 되는 순간이 있다. ‘휘발되는 향기와 같은 앎’ 이라는 감탄을 부르는 표현에 역시나 소설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학습을 통하여 습득하는 지식으로 아는 앎이 아니라 살아오고 견뎌온
어떤 순간 찾아오는 예감으로써의 앎도 여기에 포함된다고 한다면 왜 그런 앎은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풍경으로 흐를까. 어쩌면 모든 예감이란 것은 다분히 결과론에 걸러지고 남은 과거의 확인일 뿐인걸까 싶다. 순식간에 휘발되는 증기를 붙잡을 수 없듯이 모든 앎이란 과거지향적일 수밖에 없다.
앵콜 요청도 없지만 내 맘대로 하나 더 추가해 본다.
오래전 처음으로 요나스 메카스의 영화를 본 다음, 우루는 그에게 짧은 편지를 썼다.
우루는 자신이 발견했다고 믿는 어떤 아름다움에 대해 몇 줄 언급한 다음,
의례적인 작별의 인사말도 없이, 그런데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요? 하는 질문으로 돌연히 편지를 마쳤다.
/.../ 그는 우루의 질문에 대해 문득 떠오른 답을 전해 주기 위해 엽서를 보낸다고 했다.
그는 썼다.
“아름다움이란 후회하는 것입니다.”
_134p
실재 인물인지 검색을 해봤다. 참고로 요나스 메카스Jonas Mekas 는 리투아니아 계 미국인 영화 감독이자 시인으로 종종 "아방가르드 영화의 대부"로 불렸다고 한다. 1922년 12월 출생하여 2019년 1월 미국 뉴욕에서 사망했다.
인용한 문장의 상황이 실재인지 소설적 상황인지 확인하고 싶지는 않지만 실재로 엽서를 보내고 받았다는 것에 내기를 하라면 걸겠다. 감독의 작품 가운데 아름다움 이라는 키워드로만 짐작해보자면 2000년 작품인 <<우연히 나는 아름다움의 섬광을 보았다>>가 아닐까 짐작만 해본다.
아름다움이란 후회하는 것이다, 라는 말을 한참이나 붙잡고 있어 봤다.
아름다움과 후회는 일란성 쌍둥이 같은 것이겠구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처럼 영원한 아름다움은 없을 테니 아름다움이 시들고 나면 아름다움의 자리엔 후회가 차지하는 거구나 뭐 그런 생각을 하자니 후회할 아름다움이라면 가지지 않는 게 나은 건가, 후회할 값이라도 한번 아름답게 피어보는 게 나은 건가. 해보고 후회하자 주의와 후회할 걸 왜 하냐는 주의로 나눠볼 때 나는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라서 저 말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가 싶었다.
2-1 그리고 어떤 한 문장
상점 깊숙한 안쪽에서 백발의 여인이 낯선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
우루는 자신도 모르게 한 손을 뺨으로 가져갔다. 그 모습이 악기 상점의 유리창에 비치며,
우루의 얼굴이 안에서 연주하는 백발 여인이 얼굴과 순간적으로 겹쳐졌다.
아니 처음부터 그것은, 우루가 아닌 백발 여인이 얼굴이었던가.
그리고 그날, 나는 죽는가? 이런 의문이 들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오늘은 위대한 날이므로. 희미하게 반사되는 유리창 너머로
우루는 미소지었다. 아니 그것은, 우루가 아닌 백발 여인의 미소였던가.
_132~134
이 문장만 따로 뺀 이유는 문장을 조금만 주의 깊게 읽어보면 알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왜 따로 설명을 붙이지 않는지도 알 것이라 억측을 해본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뭐... 별 것도 아닌 이런들 어떠리요 저런들 어떠리요인 것이다.
딱 한 마디 붙이자면 좀 오묘한 문장이란 것이다. 내 말은 여기 까지다.
3. 마치며 하는 잡썰
소설 리뷰를 빙자하여 소설과는 하등의 상관도 없는 장황한 자뻑 독백을 구구절절 해봤다.
이런 것도 따지고보면 소설이 주는 영향력임은 분명하다. 주인공이 어떻고 반전이 어떻고 하는 소설이었다면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고 끝냈지 이런 어처구니 없는 썰은 풀지 못했을 것이다.
4. 책 만듦새와 오탈자에 대한 빡침 이야기
이 작품은 출판사 워크룸프레스에서 ‘입장들’이라는 이름으로 출간하고 있는 한국문학 시리즈 가운데 4번째 작품이다. 이 시리즈의 책 만듦새에 관해 이야기를 안할 수가 없다.
보는 바와 같이 이 시리즈는 앞표지에 독특한 그림만 있고 저자 이름이나 제목 조차 표시하지 않고 있다. 책등, 업계 용어로는 세네카에 그런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좀 쌩뚱맞다고 해야할까 무려 비니루!가 씌어져 있다는 것인데 난 이건 좀 아니올시다 같다.
본문의 편집도 양끝맞춤이 아닌 낱말 기준 왼쪽맞춤이다. 이런저런 디자인적인 면에 공을 많이 들이긴 했지만 디자인을 위한 디자인 같기만 해서 썩 달갑지만은 않은 시리즈이지만 네 권까지 나온 현재 나는 세 권을 구입했고 한 권은 읽다 말고 내다 팔았고 두 권을 가지고 있고 다음에 나올 다섯 번째 작가의 애독자라서 내심 기다리고 있기도 하다. 선정된 작가들의 면면만은 인정하겠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분노폭발 까진 아니지만 읽으면서 짜증을 유발케 한 것은 눈 침침한 독자가 보는데도 160여 페이지 짜리 단행본 한 권에 무슨 오탈자가 8개나 발견 되는가 하는 것이다. 오탈자의 위치는 밝혀놓겠다. 한두 개는 애교로 봐주고 서너 개 까지는 뭐 그렇다 치겠다.
500 페이지 600 페이지 짜리 벽돌책이라면 이렇게 대놓고 뭐라 하지도 않겠다. 3교가 아니라 2교만 봐도 발견하고 고칠 수 있는 정도의 오자가 특히나 중후반 부에 몰려 있다는 건 그만큼 교정자가 안이했다는 것이다. 출판사를 탓해야 하나 외주 교정자라면 한 개인의 부주의를 탓해야 하나. 답답할 뿐이다. 최근에 읽은 500페이지 짜리 소설에서도 여서일곱 개 오탈자가 있던 탓에 보이는 과잉반응인가. 아 진짜.
21p 위8 생각이 날거라고 더붙였다. : 더 -> 덧
79p 위7 후추과 소금을 : 과 -> 와
102p 위6 산으로 올라갔다고 했요. : 했요 -> 했어요
102p 밑12 남아 있었고 우리를 그것을 : 우리를 -> 우리는
123p 위11 역겨움으로터 : 터 -> 부터
141p 위9 우루는 승려는 따라가던 : 승려는 -> 승려를
149p 위7 교실의 차들은 : 교실의 창들을 또는 교실과 차들을(확인 필요)
158p 위8 소년는 : 는 -> 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