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이 그림으로 인해 크게 질탄을 받았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누가 어떤 사람이 성모마리아를 저렇게 그려놓겠는가! 그는 성모마리아마저 자신을 괴롭히는 여자라는 이유로 저리 표현한 것이다. 그는 여자들로 인해 많은 상처를 받고 여자들을 무서워했다고 했던가 경멸했다고 했던가. 그랬다.

저렇게 그리고도 살아남았다는게 신기하다. 하긴, 중세도 아니었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미술의 이해 기말고사를 대비하여 찾은 그림들이 너무 아까워서 올리려고 한다. 게으른 내가 얼마나 올릴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그림은 뭉크의 사춘기인데, 그는 고흐와는 다른 의미로 정신이 불안정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오랫 투병생활후 돌아가신 어머니와 누이 동생 엥게르의 죽음 등이 그를 그렇게 몰고 갔고 보시다 시피 그의 그림의 가장 큰 특징은 암울하다는 것이며 다른 작품들에선 여자들이 거의 악녀수준으로 표시되곤 한다. 그는 여자들을 싫어했다고 한다. 피카소와는 다른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여친소를 봤다. 사실 하도 많은 혹평들을 들은후에 모든 기대를 꺾은 후에 극장에 들어서서 였는지 의외로 재미있게 봤다. 마지막 장면이 좀 많이 깨기는 했지만 뭐, 같이 작품했던 사람들인데 뭐, 하다가도 이게 뭐 엽기를 떠올리게 하려고 넣은 거야, 뭐야. 하며 툴툴대긴 했다.

어쨌든, 영화는 철저히 전지현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라는 말이 맞긴 맞다. 황당할 정도를 너무나 충실히 PPL광고를 때리고 있는 극중 배우들을 보면서 한숨도 잠깐 쉬긴 했다. 긴머리를 휘날리는 전지현이 이쁘게 나오긴 했지만서도... 사실 남들은 다 재미없다고 한 '4인용 식탁'을 난 흥미진진하게 봤다. 물론, 템포가 조금 빨랐다면 하고 아쉽기는 했지만 적어도 그냥그냥 한 영화들보다는 훨씬 나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아 전지현 많이 노력하는구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다시 그 이미지로 돌아와버렸다. 이래서는 안됄텐데. 언제까지 유지하기도 쉽지 않을텐데. 그녀는 그 여전한 이미지로 우리에게 울어봐. 라고 영화 속에서 속삭인다. 플라시보님께서 그러셨듯이 엽기적인 그녀의 '그녀'나 여친소의 '경진'은 닮은 꼴이다. 둘다 엉뚱하고 둘다 막무가내이다. 그리고 그런 그녀들에겐 마치 머슴(?)같은 남자들이 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그런건만 보인 것은 아니다. 시작이야 어찌돼었든 사랑하는 연인이 된 두사람의 모습이 예뻤다. 서로 마주보고 살며시 웃을수 있다는 것. 그저 한줄기의 시에 서로에게 책을 선물하는 모습이. 사랑하는 여자가 검은 건반을 치지 않는 것을 알고 정성들여 하나하나 하얗게 칠했을 건반과 작은 엽서. 책 한쪽 한쪽에 그림을 그려넣은 정성. 그리고 내 남자가 내 여자가 위험하다면 어떻게해서든 도와주고 싶어하는 모습. 서로에게 그런 모습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저 들려오는 작은 소리들에서 내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있는지 알아내어 달려가는 모습. 이 모든 것은 그저 영화이기에 가능할수도 있지만 하지만 사랑이기에 현실에서 일어날수있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감싸고 그 무엇보다도 위대하다고 하지 않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도 사람이고 앞일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렇지만 술 마시고 남자때문에 속상해서 우는 일은 이해가 안간다. 어쩌면 나중에 나중에 내가 좀 더 커서(!) 남자때문에 속상해서 울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앞일은 알수가 없는 것이고 나또한 속상해서 울지도 모르는 일이다. 때문에 그닥 뭐라고 혼낸다거나 뒷담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정말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중의 하나이다. 남자가 뭐길래?

내 인생에서 남자로 인해 울었던 것은 짖궂었던 초등학교 시절 남자아이들의 장난때문에 외엔 전.혀 없었다. 하긴, 남자도 없었으니 당연지사이려나. 하지만 말이다. 꼭 술마시고 울어야 할까? 내 어깨에 기대서 언니, 미안해 하면서 울던 동생에겐 미안하지만 정말이지 이해가 안간다. 사실 제대로 사랑한번 안해본 내가 어찌 그 절박할 심정을 이해할수 있겠는가! 인생사의 인간관계란 정말이지 복잡하다. 의외로 눈치가 없는 나는 그 복잡한 상황의 일말을 잠깐 엿본 기분인데. 나는 남자로 보지 않았던 사람때문에 우는 학교 동생을 보니 새삼스럽기도 하고. 아무것도 모른채 이제 갓 연인이 된 언니와 저쪽 구석에서 사랑의 밀담을 나누는 오빠를 보니 참 이상한 기분이 들긴 하더라. 나에게는 남자로 안느껴진다고 해서(진짜 그렇게 느껴지지 않아서 오히려 여자친구처럼 생각되기도 했었다.) 남자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남자로서 바라보지 않아서 인지 오빠의 매력을 잘 모르겠다. 하긴 사랑에 빠진 사람의 눈에 뭐든 안멋있어 보이려마는...

내 인생에서 꼬인 남정네는 딱 둘이다. 한사람은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헌팅당했었고, 한사람은 채팅은 아니고 메일주고 받기 하다가 알게된 사람이다. 사귄것은 아닌데. 뭐랄까? 조금 이상했다. 좋아하는 마음이 전혀없이 만나서 웃고 떠들고 한다는게 조금 웃기게 생각되기도 했었다. 둘다 고등학교때 알던 사람들이고 둘다 두세번밖에 안만났고 둘다 내가 먼저 연락을 끊었다. 사실 고등학교때 헌팅 당한것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고 난 아무리 생각해도 그사람이 왜 나에게 핸드폰 번호를 알려주었던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어쩌면 그 나이 특유의 어떤 호기심류의 감정이었으려나? 어쨌든, 그 이후론 남자라곤 친구이외엔 엮이질 않아서 인지 아님, 내 성격탓인지 간에 그것은 이해가 안간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른 사람이 생겨서 가슴이 아프다. 정도는 이해한다. 그렇게 해서 울수도 있다. 아무리 나라도 울고는 싶을 것이다. 흔히, 로맨스 소설에서 말하듯이 가슴이 무너지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도 술마시고 하염없이 우는 것은 그닥 좋게 보이질 않는다. 그냥 소리지르고 하염없이 울어버리고 털어버리는게 낫지 않을까? 술마시고 울면 보기도 좋지 않을 뿐더러 안쓰럽다기 보다 나중엔 조금 무감감해 진다. 보는 사람이. 나야 차라리 울고 털어버려라 하면서 내비 두었지만 학교 언니는 그만 울라고. 뭐, 그런사람때문에 우냐고. 혼냈었다. 간신히 진정했나 싶다가도 또 울고 울고 또 울고. 눈물이 끊기지도 않는지 울어댔지만 조금 서글프다. 사랑이 이렇게 힘든거라면 난 사랑 하고 싶지 않을 것 같다. 하긴 이정도는 힘든 축에도 안드려나? 아니다. 사랑에 힘들고 안들고가 어디있겠는가. 모조리 힘들고 상처일테지...

나도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헷갈리지만 조금 그렇다. 난 울고 싶지 않다. 울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남앞에서 그렇게 사랑때문에 울어대고 싶진않다.(그게 사랑이 아니더라도.) 사실 그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친한 사람들도 아니고 그저 대학에서 만나서 즐기는 사이일 뿐일텐데. 적어도 그렇게 울려면 아주 아주 친한 친구들앞에서만 가능할것같다. (물론, 아무리 친해도 그렇게 울어대고 싶진 않다. 그래도 운다면 그 친구들 앞에서만 울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내가 안경을 쓰게 된 것은 초등학교(그때당시의 국민학교) 5학년때였다. 그당시 우리집에는 엄마 대신 할머니가 계셨다. 시골의 할머니가 풍맞아 반신을 사용하지 못하시자 엄마는 할머니를 집에 모셔두고 자신이 내려가 직접 농사를 지으셨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할머니와의 생활은 그다지 순탄하지 못했다. 할머니들 특유의 잔소리와 짠순이(?)이 기질이 어린 우리 삼남매를 괴롭혔던 것이다. 그나마 나는 어린 시절부터도 무언갈 참는데엔 익숙해져있었기에 견딜수 있었지만 장남이라는 이유로 이쁨받고 귀하게까지는 아니더라고 나름대로 잘 커온 둘째놈이 반항을 하기 시작했고 집을 나갔다가 들어오곤 했었다. 그럴때면 엄마는 속상해서 항상 우셨지만 시골에 계시는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별로 없었다.

어쨌든, 그건 애써 넘기고 내가 안경을 쓰게된 경위부터 이야기 하자면 눈병이 시작이었다. 당시 눈병이 유행하고 있었는데 내가 덜커덕 눈병에 걸리고야 말았던 것이다. 양쪽다. 그런데 문제는 할머니였다. 절대 병원엘 보내주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며칠을 안약으로 버티다가 결국엔 사단이 일어났었다. 학교 수업중에 한쪽 눈에서 피가 난 것이다. 덕분에 선생님께 혼났었다. 조금 띠거운 듯한 말투로 눈병걸려놓고 병원도 안가니 그렇다고 말했었다.(왜 아직도 이걸 기억하느냐하면 서운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내 기억의 스승님들은 항상 어딘가 나를 속상하게 하신분들이 더 많았다.) 아무튼 덜컥 겁이난 나는 집에 돌아오자 마자 엄마에게 전화했다. 눈에서 피가 났다고. 엄마는 난리가 나서 할머니께 애 빨리 병원에 보내라고 했었나 보다. 그날 혹은 그 다음날이던가. 안과엘 갔다. 심할대로 심해진 눈병에 양쪽다 거즈를 대지 못하고 심한 한쪽(피가난 그눈)에만 거즈를 대고 주사를 맞고 집에 갔다가 다시 다음날 병원에 가서 거즈를 뜯는데... 피가 묻어있었다. (상당히 두껍게 대놔서 잘 몰랐었다.) 그래도 피났다고 한번 더 울거나 하진 않고 넘어갔었는데 문제는 눈병이 다 낳고나서야 발생하였다.

칠판이 잘 안보이는 것이다. 이에 엄마는 나를 데리고 안경점에 갔는데 양쪽 시력이 현저히 낮아진 것이다. 그전까지만 해도 1.5 1.5의 시력을 자랑하던 내 눈이 순식간에 안경이 필요해 질 정도까지가 되버린 것이다. 더군다나 양쪽 시력의 차이가 조금 심했다. 피가 났었던 눈의 시력이 더 많이 낮았던 것이다. 어쨌든 그일이후 엄마는 할머니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금쪽 같은 아들내미가 가출을 밥먹듯이 하는 불량학생이 된 것도, 딸의 눈이 망가진(?) 것도 모두 할머니 탓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내 동생이 소위 말하는 불량학생이 된 것도 내가 눈이 나빠진 것도 전적으로 다 할머니의 탓은 아니었을 테지만 애를 조금만 더 아껴주었다면 그리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엄마는 생각했다. 사실 내 눈이야 병원에만 제대로 갔어도 피가 날 정도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 지금은 돌아가신 할머니. 은연중에 나도 엄마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혹은 나도 그렇게 생각해서인지 나는 할머니를 그렇게 좋아하지않았다. 그래서 병문안도 제대로 가지 않았었는데 후에 조금은 후회를 했었다.

그보다 더 어린 시절 시골에 내려가면 '아이고, 내새끼'하며 반겨주던 할머니가 조금은 많이 그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