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안경을 쓰게 된 것은 초등학교(그때당시의 국민학교) 5학년때였다. 그당시 우리집에는 엄마 대신 할머니가 계셨다. 시골의 할머니가 풍맞아 반신을 사용하지 못하시자 엄마는 할머니를 집에 모셔두고 자신이 내려가 직접 농사를 지으셨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할머니와의 생활은 그다지 순탄하지 못했다. 할머니들 특유의 잔소리와 짠순이(?)이 기질이 어린 우리 삼남매를 괴롭혔던 것이다. 그나마 나는 어린 시절부터도 무언갈 참는데엔 익숙해져있었기에 견딜수 있었지만 장남이라는 이유로 이쁨받고 귀하게까지는 아니더라고 나름대로 잘 커온 둘째놈이 반항을 하기 시작했고 집을 나갔다가 들어오곤 했었다. 그럴때면 엄마는 속상해서 항상 우셨지만 시골에 계시는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별로 없었다.

어쨌든, 그건 애써 넘기고 내가 안경을 쓰게된 경위부터 이야기 하자면 눈병이 시작이었다. 당시 눈병이 유행하고 있었는데 내가 덜커덕 눈병에 걸리고야 말았던 것이다. 양쪽다. 그런데 문제는 할머니였다. 절대 병원엘 보내주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며칠을 안약으로 버티다가 결국엔 사단이 일어났었다. 학교 수업중에 한쪽 눈에서 피가 난 것이다. 덕분에 선생님께 혼났었다. 조금 띠거운 듯한 말투로 눈병걸려놓고 병원도 안가니 그렇다고 말했었다.(왜 아직도 이걸 기억하느냐하면 서운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내 기억의 스승님들은 항상 어딘가 나를 속상하게 하신분들이 더 많았다.) 아무튼 덜컥 겁이난 나는 집에 돌아오자 마자 엄마에게 전화했다. 눈에서 피가 났다고. 엄마는 난리가 나서 할머니께 애 빨리 병원에 보내라고 했었나 보다. 그날 혹은 그 다음날이던가. 안과엘 갔다. 심할대로 심해진 눈병에 양쪽다 거즈를 대지 못하고 심한 한쪽(피가난 그눈)에만 거즈를 대고 주사를 맞고 집에 갔다가 다시 다음날 병원에 가서 거즈를 뜯는데... 피가 묻어있었다. (상당히 두껍게 대놔서 잘 몰랐었다.) 그래도 피났다고 한번 더 울거나 하진 않고 넘어갔었는데 문제는 눈병이 다 낳고나서야 발생하였다.

칠판이 잘 안보이는 것이다. 이에 엄마는 나를 데리고 안경점에 갔는데 양쪽 시력이 현저히 낮아진 것이다. 그전까지만 해도 1.5 1.5의 시력을 자랑하던 내 눈이 순식간에 안경이 필요해 질 정도까지가 되버린 것이다. 더군다나 양쪽 시력의 차이가 조금 심했다. 피가 났었던 눈의 시력이 더 많이 낮았던 것이다. 어쨌든 그일이후 엄마는 할머니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금쪽 같은 아들내미가 가출을 밥먹듯이 하는 불량학생이 된 것도, 딸의 눈이 망가진(?) 것도 모두 할머니 탓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내 동생이 소위 말하는 불량학생이 된 것도 내가 눈이 나빠진 것도 전적으로 다 할머니의 탓은 아니었을 테지만 애를 조금만 더 아껴주었다면 그리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엄마는 생각했다. 사실 내 눈이야 병원에만 제대로 갔어도 피가 날 정도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 지금은 돌아가신 할머니. 은연중에 나도 엄마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혹은 나도 그렇게 생각해서인지 나는 할머니를 그렇게 좋아하지않았다. 그래서 병문안도 제대로 가지 않았었는데 후에 조금은 후회를 했었다.

그보다 더 어린 시절 시골에 내려가면 '아이고, 내새끼'하며 반겨주던 할머니가 조금은 많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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