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방명록 - 니체, 헤세, 바그너, 그리고...
노시내 지음 / 마티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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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게 어떤 나라를 여행하고 싶냐고 물으면, 나는 스위스라고 답하곤 했다. 내 대답을 들은 상대방은 왜 스위스를 가고 싶냐고 다시 물었다. 나는 스위스라고 대답할 때보다 더 확신에 찬 말투로 이렇게 대답했다. 명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보고 싶어서 라고.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명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처음 접한 뒤로 지금까지 나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만큼 빠져든 작품이 없다. 어두운 배경에서 한 줄기 빛을 받고 있는 소녀. 고개를 살짝 돌려 어깨 너머로 화면 너머를 바라보고 있는 그 시선이 나를 사로잡았다. 이 작품을 두고 네덜란드의 모나리자로 부른다지만, 나는 이 작품을 통해 사람들이 왜 그리도 모나리자를 좋아하는지 알았다. 이렇게도 마음에 드는 작품이 또 있을까 싶었다. 그래서 이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마우리츠하이스 왕립미술관에 가고 싶었고, 그 미술관은 스위스에 있었기 때문에 단순하게 스위스가 가고 싶었던 것이다. (베르메르의 국적은 네덜란드이고, 네덜란드의 황금시대인 17세기를 대표하는 세 명의 대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화가이지만 오로지 그 작품이 스위스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네덜란드가 아니고 스위스였던 것이다. 하하.)

 

그랬던 스위스는, 조조 모예스의 장편소설 미 비 포유를 읽으면서 새롭게 다가왔다. 바로, 소설의 화두였던 조력자살때문이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 윌 트레이너가 선택한 그 길. 나 역시 그를 간병하면서 사랑에 빠지게 된 루이자에게 감정이입해서, 그가 선택을 되돌렸으면 하고 바랐지만, 결국 그는 스위스로 떠난다.

소설을 읽던 당시에는 스위스를 그저 조력자살이 허용되는 나라로만 생각했고, 소설의 전개에 빠져서 잘 몰랐다. 이 책 스위스 방명록존엄한 탈출 : 조력자살부분을 읽으면서 조력자살에 관해 전반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중 가장 흥미로웠던 사실은, 스위스의 리버럴한 조력자살 정책은 정부나 의료계가 주도권을 쥐고 정식으로 합법화하고 양성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자세한 법률이 부재하는 모호한 틈새에서 비영리단체들이 고통 없이 죽을 권리를 원하는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내고 지역정부와 의료계의 협조를 받아 약 30년에 걸쳐 일종의 관행으로 정착시킨 것이다. (p.351)

 

이를 비롯해서 스위스에서의 조력자살에 관한 이야기를 온전하게 읽게 됨으로써 나 역시 이 문제에 깊이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이 구절이다.

 

자기를 아끼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 그래야만 하는가. 이 세상으로부터의 탈출이 그리도 절박한가. 그러나 오로지 주변사람을 위해 고통을 감수하고 살아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애도가 두려운 자의 이기심일지도 모른다. (p.349)

 

조력자살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해보자. 미국에서 8, 일본에서 4, 오스트리아 빈에서 4, 그리고 지금은 스위스 베른에 옮겨가 2년째 머물고 있는 저자의 독특한 이력이 눈에 들었다. 그런 그녀를 두고 영원한 여행자이면서 성실한 시민이라 수식한 것도 마음에 들었다. 소속된 내부자이면서 바깥에 선 관찰자로, 누구도 몰랐던 스위스 사회의 감추어진 이면을 들여다보는 책.

 

국민들의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 외국인이 정착하기 좋은 나라, 삶의 수준이 높은 나라라는 객관적인 스위스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 아니라, 스위스에 누가 살았으며 그들이 무엇을 일궜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책이어서 좋았다.

 

니체의 안식처였던 실스마리아 챕터를 시작으로, 반평생을 스위스에서 보낸 헤르만 헤세의 이야기를 반갑게 읽고 취리히에서 요절한 천재, 혁명가이자 의사였고 문인이었던 게오르크 뷔히너 이야기를 지나, 존엄한 자살 조력자살을 거쳐 바그너의 스위스를 끝으로 이 책을 덮으면서 공감했다. 이 책을 재밌게 읽었다는 사람들의 별 5개 만점 후기를.

잘 몰랐고, 몰라서 관심을 두지 않았던 스위스는 내게 그저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보기 위해 가고 싶은 나라였지만 이 책을 통해 제대로 탈바꿈했다. 누구보다 뜨겁게 시대를 살았고, 누구보다 뜨겁게 싸웠고 사랑했던 사람들의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스위스로 말이다.

 

프롤로그에서 작가는, 비스위스인들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 언급하며 이런 구절을 덧붙인다.

 

이들은 모두 스위스에 머물렀던 경험을 통해 세상에 중요한 유산을 남겼으며, 그들은 스위스에, 스위스는 그들에 빚지고 있다.’ (p.16)

 

. 에필로그를 읽고, 다시 앞장을 펼쳐 프롤로그를 다시 읽으면서 나는 깨달았다. 그들은 스위스에, 스위스는 그들에 빚지고 있는 가운데 나는 이 책을 쓴 노시내 작가님과, 이 책을 출간한 출판사 마티 그리고 이 책을 읽을 수 있게 기회를 준 인터파크 신간리뷰단에 빚졌다고. 다소 과한 표현일지라도, 이렇게 표현할 정도로 좋은 책이었다.

 

우리가 못 보고 지나치는, 혹은 스위스가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 보물을 한 가득 담은 책을 감사하게 챙겨 읽은 기분. 덕분에 나는 책을 읽는 내내 낯설었지만 새로웠고, 행복했다. 이 책의 에필로그 속 구절처럼 그 보물들 뒤에는 늘 인간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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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들개이빨은 데뷔 전부터 부지런히 문화를 다루는 공간에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왔다. 이 작품 또한 꽤 오래전부터 연재한 작품이다. 특히 그 하나하나의 의미를 찾아내는 작가 특유의 통찰력은 세상을 향해 돌직구를 던지듯 일갈하는 주인공의 화법을 통해 더욱 빛이 난다.

주인공 유양은 회식자리에서 무리하게 술을 권하는 사장에게 ‘굴’을 뱉는 바람에 회사에서 잘린다. 마침 회사도 사장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터라 갑작스런 해고도 쿨하게 받아들이지만, 곧 새로 구한 직장에서조차 적응하지 못하고 진짜 백수가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갔던 클럽에서 마성의 추남 박병을 만난다. 한 번의 만남으로 연을 끊고자 했으나 잊을 만하면 떠오르는 그 ‘마성의 추남’은 유양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데…

가진 거라곤 성깔뿐인 그녀가 자신만의 방식대로 삶을 우려내기위해 선택한 방황의 나날들. <먹는 존재>는 그 속에서 꼬박꼬박 찾아오는 삼시세끼와, 그것의 당연함을 외면하지 못하는 욕망과, 그것의 소중함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

 

3권 표지 보고 혹해서, 이 책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화 된다던데, 일단 책부터 읽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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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기 활동 마감 페이퍼를 작성해 주세요!

 

이번 신간평가단 마감페이퍼는 조금 남다르다.

책 읽고 글쓰기 바빴던 지난 활동과는 다르게, 같은 책을 함께 읽고 그에 대한 글을 쓰는

다른 신간평가단 분들의 글을 읽고 싶어서 지원한 파트장 활동.

기대 이상으로 많은 것을 얻었다.

 

굳이 파트장이 아니더라도, 다른 분들의 글을 읽을 수 있지만

2기수째 내 글 쓰기도 벅차했던 걸 잘 알고 있었기에,

나를 움직이는 뭔가가 필요했다. 그러던 차에 15기 에세이파트장을 맡게 되었다.

누군가의 글을 읽고 내 글을 쓰게 되면, 순수한 내 글보다는 어딘가 영향을 받은 글을 쓰는 경향이 있어서

피해왔던 것도 있다. 내 글을 쓰고 다른 분들의 글을 읽어야 했으니, 전보다 좀 더 부지런해졌고

그렇게 다른 분들의 좋은 글을 읽으면서 성장했다는 생각이 든다.

 

 

좋은 책을 읽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 책에 대한 좋은 글을 읽는 일.

신간평가단이 아니면 경험해보지 못했을 일이다.

 

 

이제는 익숙한, '내맘대로 좋은 책 베스트 5' 고르기.

15기에서 만난 12권 중 손에 꼽는 5권.

 

거꾸로, 순위를 매겨 정리해본다.

 

 

5위. 김혜남 『오늘 내가 사는 게 재미있는 이유』

 

 

이 책이 내 손에 들어오기 며칠전, 읽어보지 않았지만 좋은 책일 거라 믿고 선물한 적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 선택이 옳은 선택이었음을 깨달았다.

김혜남 작가님이 쓴 그 어떤 책보다 나는 이 책을 최고로 꼽고 싶다.

 

 

 

 

4위. 416 세월호 참사 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금요일엔 돌아오렴』

 

 

나는 외면하고 있었다.

 

언론매체가 보도하지 못했던 유가족들의 애타는 마음,

힘없는 개인이 느끼는 국가에 대한 격정적인 분노와 무력감,

사건 이후 대다수 가족들이 시달리고 있는 극심한 트라우마 등

 

세월호 참사의 진짜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알 것 같아서 최대한 외면하고 있었다.

이 책을 시작하는데도 한참이 걸렸지만, 이 책은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로,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심정을 애써 표현하여 기록하고자 했던 그들의 노력을.

그들의 노력 앞에서 애써 이야기했던 그들의 진실을.

 

신간평가단이 아니었으면, 이번에도 외면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은 순위와는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3위. 손홍규 『다정한 편견』

 

 

이 책에 대한 글은, 이 책을 읽고 쓴 서평 서문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3기수째 알라딘 신간평가단을 활동해오면서, 내가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인생이 보다 넓어졌다는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책을 접하게 되었던 게 가장 컸다.

그런 책을 접하더라고 그냥 읽고 마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글을 쓰는 과정에서 내 안에 어떤 것들이 쌓이고,

굳어지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읽게 된 또 한 권의다정한 편견을 받아들고 잠깐 구경했는데, 이번에도 좋은 책이구나 싶었다. 그리고 내 예감은 정확히 맞았다.

 

 

 

2위. 박상미 『나의 사적인 도시』

 

 

정말이지, 신간평가단이 아니었으면 내가 이 책을 접할 수 있었을까?

12권 중 내가 이 책을 읽을 줄 몰랐다, 싶은 책 중에 1위라면 단연 이 책이다.

누군가 매일 쓴 글을 이렇게 집중있고, 흥미있게 읽은 건 이석원의 『보통의 존재』이후로 오랜만이었다.

 

한동안은 '뉴욕'하면 이 책이 떠오를 것 같다.

 

 

 

1위. 임경선 『태도에 관하여』

 

사람을 만나는 것도 타이밍 중요하지만, 책을 만나는 것도 타이밍이 중요하다.

이 책은 내가 몇달 간 홀로 고민하고, 생각이 많았던 때에 만났다.

그 어떤 책도 위로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공감하는 구절 앞에서 격하게 공감했고,

새롭고 낯선 구절 앞에서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스스로 마주하고 답을 내야 할 저마다의 '태도'에 관하여 생각할 수 있었고

여전히 생각하고 있다. 하루아침에 완성고, 그게 쭉 이어지면 좋겠지만 그건 영원한 로망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고 쓴 서평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하면서,

지극히 개인적인 '내가 꼽은 BEST 5'를 마무리한다.

 

 

 

 

 

이렇게 좋은 책이라면 얼마든지 위로가 되고 힘이 될 수 있음을 이제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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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편견
손홍규 지음 / 교유서가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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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기수째 알라딘 신간평가단을 활동해오면서, 내가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인생이 보다 넓어졌다는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책을 접하게 되었던 게 가장 컸다. 그런 책을 접하더라고 그냥 읽고 마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글을 쓰는 과정에서 내 안에 어떤 것들이 쌓이고, 굳어지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책 다정한 편견을 받아들고 잠깐 구경했는데, 이번에도 좋은 책이구나 싶었다. 그리고 내 예감은 정확히 맞았다.

 

긴 글은 실력으로, 짧은 글은 노력으로 쓴다는 형철쌤의 추천사 속 글처럼 노력으로 쓰인 한 편 한 편의 글을 나는 내 일상 곳곳에서 읽었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읽었고, 잠자리 머리맡에 두고 이 책을 읽다가 잠에 들었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머리를 하기 위해서 미용실에 챙겨 가서 읽은 일이었다. 이 사람 저 사람의 말소리와 적당한 소리를 내며 미용실을 가득 채우던 라디오의 소리 틈에서 이 책을 읽었다.

사람의 소리는 결코 소음이 될 수 없다는 그의 글처럼, 그날 미용실에서의 소리는 내게 결코 소음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잘 읽혔던 것 같다. 마침 내가 읽던 부분이, 작가의 따뜻한 심성이 엿보이는 가족과 고향 이야기들로 담긴 1시간이 지날수록 초라해지는 목록과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의 삶이나 사회에 관한 성찰과 희망의 메시지를 들려준 2선량한 물음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아직 남의 것에서도 대충 쓴 것은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몰라도, 왜 글을 쓰고, 무엇을 쓸 것이며,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등등 문학을 대하는 태도와 책 읽는 자세에 관해 말하는 3바느질 소리역시 참 좋았다.

칼럼을 연재하는 내내 그를 괴롭혔던 원고지 4.5매 내외라는 분량은, 그에게 단상에 가까운 생각들을 붙잡아둘 수 있게 했고 단어를 고르거나 문장을 다듬는 일에 더 주의를 기울이게 만들었던 덕분에, 나는 복에 겨울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덕분에 감사하게도, 이리 여운 있는 글들을 한 편 한 편 곱씹어가며 읽을 수 있었고 이 책이 함께한 일상은 다정하고, 따뜻했다.

 

좋고, 또 좋았던 글 중에서 나는 이 구절을 베스트로 꼽아본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독서에서 경탄과 경이로움이란 번쩍 하며 찾아오는 게 아니다. 그것은 기나긴 몽상의 끝에 찾아온다. 그 과정은 지루할 수도 있고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얼마나 느리게 읽느냐가 중요하다. 창조적 몽상의 대가인 가스통 바슐라르는 이를 두고 아예 '느린 독서'라고 이름 지었다. 완전한 독서를 위해 우리가 준비할 것은 경이로운 것들 앞에서 기꺼이 감탄할 자세 하나면 된다. 마치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그렇다면 언젠가 우리는 책 너머의 것들에 감탄하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p.167 '독서의 자세' 중에서)

 

왜냐하면 나의 독서도 그렇기 때문이다. 가스통 바슐라르의 말처럼, 느린 독서를 하는 날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매일 읽으려고 노력한다. 이 책을 읽은 것처럼 미용실에도 챙겨가 잡지 대신 읽고, 가끔은 커피포트에 물을 올려두고 읽고, 대중교통을 기다리고 오고가는 시간에 읽고. 틈이 나면 어떻게든 읽으려고 노력하는데, 그러려면 책이 늘 손에 들려있어야 한다. 그래서 내 가방은 늘 무거운데, 그렇게 챙겨 다니는 책들을 때때로 한 자도 읽지 못하고 돌아올 때도 있다. 그래도 그렇게 읽은 책들이 쌓여서, 이제는 정말 자유롭게 읽는다. 조르바처럼. 어느 날은 정독하고, 속독하고, 때때로 완독하지 못하지만 매일 읽어나간다. 이렇게 읽어나가면, 나도 언젠간 책 너머의 것들에 감탄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을까.’

 

라는 글을 쓰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미용실에서, 머리에 약을 바르고 시간이 가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책을 덮고 위의 글을 썼다. 손에 쥐고 있던 스마트폰의 메모 앱을 열고, 라디오에서 흐르는 노래를 듣다가, 다시 책을 들여다봤다가, 나른해서 졸기도 하면서 이 짧은 글을 썼다. 짧은 글은 실력으로 쓴다는 형철쌤의 말에 공감하며.

 

누구나 가슴에 문장 하나쯤은 품고 산다. 그 문장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이든 상관은 없다. 책에서 읽은 것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직접 들은 말일 수도 있으며, 혹은 스스로 고안해낸 것일 수도 있다. 또한 남들에겐 하찮을 수 있어도 자신에겐 소중한 그 무엇일 것이다. 그 문장은 우리가 어떤 위기에 처했을 때 불려나온다. 평소에는 가슴속 깊이 웅크리고 있다가 제 주인이 절망하여 쓰러지기 직전 스스로 걸어 나오기도 한다. (p.156 '가슴속 문장 하나' 중에서)

 

가슴에 품고 싶어서 필사해 둔 그의 문장들이, 위 구절처럼 내가 어떤 위기에 처했을 때 불려나오고, 평소에는 가슴속 깊이 웅크리고 있다가 절망하여 쓰러지기 직전 스스로 걸어 나올 것임을 믿는다. 이건 어디까지나 이 책을 감사히 읽은 나의 다정한 편견이고, 이런 편견이라면 나는 백번이고 사랑한다 말할 수 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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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 - 이오덕과 권정생의 아름다운 편지
이오덕.권정생 지음 / 양철북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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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손편지를 쓰는 일에 소원해졌지만,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손편지를 자주 쓰곤 했다. 그런 나와 손편지를 자주 주고받았던 친구 모모와 언제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나중에 이 편지들을 묶어서 책으로 만들면 재밌겠다. 그치?”

정말 책으로 출간해야지라기 보다는, 그땐 친구와 그렇게 편지를 주고받는 일이 영원할 줄 알았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의 편지는 지극히 감상적이었고, 결정적으로 편지를 주고받는 일에 소원해지면서 한때의 추억으로 남았을 뿐이다. 그렇지만 참 소중했던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한 건 이 책 선생님, 요즘음 어떠하십니까덕분이다.

 

1973118, 아동문학가 이오덕은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무명 저고리와 엄마를 쓴 동화작가 권정생을 찾아갔다. 이오덕은 마흔여덟이었고 권정생은 서른여섯이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만났다. 그때부터 이오덕과 권정생은 2003년 이오덕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30년을 함께하며 편지를 주고받았다. 어른, 아이 모두 권정생의 작품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권정생을 세상에 알린 이오덕, 그리고 온 힘을 다해 동화를 쓴 권정생. 이 책은 그런 둘의 만남과 삶을 엿볼 수 있는 편지를 가려 뽑아 오롯이 실어낸 책이다. ‘오롯이라는 부사의 정의 그대로 두 사람의 삶은 이 책을 통해 모자람이 없이 온전하게 내게 전해졌다.

 

소설이나 시를 쓰는 사람들이 여가 선용이나 취미로 하지 않듯이, 우리 아동문학도 온 생애를 바쳐 쓸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저같이 병들고 무능한 인간이 아닌, 건강하고 역량 있는 작가가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한 편의 동화를 빚어내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뜨거운 작가가 나와야만이, 아동문학이 구원을 받고 또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p.224)

 

권정생 작가님의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왜 그리도 이오덕 선생님이 권정생 작가님의 작품을 많은 사람들이 읽어야 한다고 말했는지 알았다. 자신같이 병들고 무능한 인간이 아닌, 건강하고 역량 있는 작가가 있어야 한다고 쓰셨지만, 그 누구보다 아동문학에 온 생애를 바쳐 쓰신 분이라는 걸 안다. 이오덕 선생님은 그런 권정생 선생님을 빨리 알아보셨던 게 아닐까.

 

선생님 동화집 아직 가지고 있는데, 이웃 학교에 동화 공부하는 사람이 더러 있어 나눠 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서울에도 보낼 곳이 있습니다. 이런 훌륭한 작가가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필요하면 다음 서울 가서 세종문화사에 원가로 몇 권 사서 적당한 곳에 보내겠습니다. (중략) 선생님 가지고 계시는 책은 될 수 있는 대로 모두 파십시오. 절대로 함부로 책을 공짜로 주지 마십시오. 그냥 준다고 좋은 것 아닙니다. 피땀 흘려 쓰고 만든 책인 것을 아는 사람이 드뭅니다. (p.84)

 

권정생 작가님의 작품을 참으로 귀하고 값있는 것으로 아꼈고, 이런 훌륭한 작가가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라면 제 돈으로 책을 사서 흔쾌히 나눠주었던 이오덕 선생님. 교사로, 아동문학가로, 우리 말 운동가로 평생을 아이들과 일하는 사람들이 주인으로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썼고, 온 삶을 아이들과 함께 산 선생님이 곁에 계셨기에 권정생 작가님이 온 힘을 다해 동화를 쓰실 수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편지를 쓰는 그 시간은 물론이고, 편지가 오고 가는 시간에도 서로를 위하고 아끼는 마음이 편지 곳곳에서 묻어났기에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참 행복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정한 교감이 얼마나 아름답고 그걸 전해 받은 이에게는 얼마나 따뜻한 위로가 되는지, 진정으로 알 수 있었다.

 

한 가지 일에만 전념할 수 있는 사람이 가장 행복할 것이라던 권정생 작가님의 말처럼, 아동문학이라는 한 가지 일로 만나서 서로에게 편지 쓰는 일에 전념했을 두 분을 생각하면 내가 괜히 흐뭇해졌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내보이고, 또 귀 기울여 들어 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온전히 만날 수 있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까.

 

197328, 권정생 작가님이 이오덕 선생님에게 쓴 편지의 첫 구절을, 죄송하지만 멋대로 조금 바꾸어 이렇게 쓴다.

 

두 분이 주고받으신 편지, 잘 읽었습니다. 왠지 눈시울이 화끈 더워지고, 가슴 한 구석이 먹먹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사랑이 무엇이고, 어떤 것이라는 것을, 두 분의 글월에서 느꼈습니다. 그리고 뒤늦게 깨닫습니다. 어린 시절 읽었던 작가님의 작품이 이다지도 피땀 흘려 쓰고 만든 값진 작품이었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마지막으로, 희망합니다. 두 분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저 역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내보이고, 또 귀 기울여 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말입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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