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
비프케 로렌츠 지음, 서유리 옮김 / 레드박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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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누구에게나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가 있다. 나의 경우에는 가장 가깝게 지난 화요일에 있었던 일인데,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이 내게 상처 되는 말을 하는 자리에서 어떤 반박도 하지 못하고 허허실실하며 앉아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받은 상처보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에 내내 우울해했다. 되돌릴 수 있다면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올 것이고, 가능하다면 지우고 싶은 기억. 이 기억을 지우고 나면 나는 우울하지 않은 한 주를 보낼 수 있었을까?

 

2.

여기, 그런 과거를 지우게 된 여자가 있습니다. 거침없는 성격에 제멋대로 사는 쾌락주의자 찰리. 부모님 몰래 대학을 때려치운 뒤 아르바이트를 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그녀는 첫사랑의 트라우마로 인해 서른 살 가까이 되도록 제대로 된 남자 친구를 사귄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과거의 저지른 창피하고 민망한 실수들 때문에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죠.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미스터리한 헤드헌팅 회사로부터 과거를 지워주겠다는 은밀한 제안을 받게 되고, 전혀 예상치 못한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는데…… 『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는 다시 돌아옵니다!

 

이 책 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출발 비디오 여행(feat.김경식) 영화 대 영화처럼 줄거리를 풀어보았다. 대체 어떤 흑역사를 만들었기에 찰리는 과거를 그다지도 지우고 싶었을까.

 

찰리에게 있어 지워버리고 싶은 사건 Worst 5를 소개하자면 이렇다.

첫 번째로, 옆집에 사는 절친 줄리의 남자 친구와 잔 일.

두 번째로, 유부남과 사귄 일. 그 남자에게는 심지어 애도 있었다. 그것도 쌍둥이.

세 번째로, 운전면허 시험 도중 속도 측정 장치를 들이받고 도망간 일.

네 번째로, 완전 취해서 자전거 타고 가다 넘어졌을 때 출동한 경찰한테 반항한 일 (“뭘 봐! 이 멍청한 짭새 새끼야!”했다)

다섯 번째로, 어떤 남자의 머리를 맥주병으로 내려친 일(그 남자가 몸을 더듬어서 그랬는데, 그 술집은 그날 이후 나를 출입 금지시켰다)

 

찰리는 여기에 마음의 소리를 저버리지 못하고 6개를 더 쓰는데, 음 확실히 지울만한 사건들이다. 찰리가 기억을 지워준다는 헤드헌팅 회사의 제안을 받기 전까지, 현재의 이야기가 꽤 나와서 새로운 인생은 어떨까 궁금했다.

 

3.

여기부터는 스...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찰리는 헤드헌팅 회사의 도움으로 흑역사를 지우는데 성공한다. 과거를 지운 찰리의 현재는 완벽해 보였다. ‘보였다라는 과거형으로 쓴 건, 흑역사를 쌓아온 찰리의 기억만큼은 찰리에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흑역사이긴 했어도 그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이 있었고, 들어온 음악이 있었으며, 느낄 수 있는 행복이 있었는데 그 기억들을 가지고 새로운 인생이라니.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찰리는 겉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보이지만, 속으로는 헛헛한 삶을 살게 된다. 영혼 없는 하루하루가 계속되고 찰리는 있는 그대로의 찰리를 바라봐주고, 찰리의 행복을 온전히 응원해주었던 드링크스&모어 사람들을 찾아 헤맨다.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을 때려치우고 개업한 드링크스&모어의 주인이자 찰리를 놀리는 재미로 사는 것 같은 팀과, 충격을 덜 받기 위해 늘 오래된 신문을 읽는 게오르크 아저씨. 인연은 인연인지 찰리는 새로운 인생에서도 둘을 만나는데,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둘을 대하는 찰리의 태도가 인상 깊었다. 이후의 이야기는 소설로 읽기를 권하고 싶은 마음에 생략한다.

 

4.

이쯤에서 다시 내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나 역시 지난 화요일의 과거를 지우게 되면 우울해하지 않게 될까? 이 소설대로 과거를 지운다면, 상처 받았던 기억은 남고 과거만 지우게 되는 것이니 나의 우울은 여전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상처 주는 말에 한 마디 받아치지 못하고, 속으로만 담아두다 우울해 하는 이 성격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앞으로도 이런 일들은 계속될 것이다.

 

그때마다 과거를 지우고 싶다, 하기 보다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책을 통해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을 배우고, 상처받은 나를 위로해주는 친구들을 만나서 훌훌 털어버리고, 이렇게 재밌는 책도 읽으면서 버티기로 했다. 흑역사로 가득했던 찰리의 지난날도 그저 어둡기만 한 건 아니었으니까. 찰리의 곁에는 좋은 사람이 있었고, 즐겨 들었던 음악이 있었고, 찰리 나름대로의 행복한 하루가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5.

여기서 끝내기 아쉬우니까 여담을 조금 풀어보자.

만약 이 소설을 영화화한다면 주인공 찰리는 마고 로비였으면 좋겠다. 다른 배우는 생각나지 않았다.

이 책의 저자 비프케 로렌츠는 샤를로테 루카스라는 필명으로 당신의 완벽한 1해피엔딩으로 만나요를 펴낸 작가였다. 아직 읽어보지 못했지만 제목을 들어본 책이었는데, 같은 사람이었다니. 두 권의 책을 읽어봐야겠다, 싶게 만들어준 책이었다.

이번 리커버 버전의 표지가 워낙 마음에 들어서, 들고 다니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이래서 리커버, 리커버 하는구나 했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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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천 할머니 스콜라 창작 그림책 59
정란희 지음, 양상용 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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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치의 만행이 극에 달했던 1944,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시체들을 처리하기 위한 비밀 작업단 존더코만도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가 있다. X자 표시가 된 작업복을 입고,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오직 시키는 대로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는 존더코만도 사울의 앞에 어린 아들의 주검이 도착한다. 처리해야 할 시체더미들 사이에서 아들을 빼낸 사울은 랍비를 찾아 제대로 된 장례를 치러주기로 결심한다.

 

그런 사울의 뒤를 따라 홀로코스트를 체험하게 하는 이 영화를 보고 나는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영화가 사울이라는 한 사람에게 집중한 것처럼, 기억이란 어쩌면 한 사람을 기억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 사람을 기억하게 만들어,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른 잊지 못할 역사와 그곳하게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을 기억하게 한다.’

 

사울은 어디까지나 허구의 인물이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난 후로 홀로코스트를 떠올리게 될 때면 나는 으레 사울부터 떠올리곤 했다.

 

 

2.

폭도들을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다 죽여 버려!”

어두운 밤, 마을에 들이닥친 토벌대는 총을 쏘기 시작했다. 아영의 가족은 그날 밤 토벌대를 피해 몸을 숨겨야만 했다. 누군가는 하얗게 뿜어져 나오는 입김을 감추려 검은 흙에 얼굴을 묻었고, 누군가는 들키지 않으려고 우는 아이의 입을 틀어막았다. 집이 불타고 있었음에도 누구 하나 불을 끄러 달려 나가지 못했다. 오늘 밤 마을이 불타 사라진다 해도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나았으니까. 그저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무사히 날이 새기만을 바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영은 집이 걱정 되었다. 엌에 있는 곡식 항아리가 아른거린 나머지 아영은 몸을 일으켜 집으로 뛰어 들었고, 소리를 잘 듣지 못하는 아영을 향해 아버지는 안 돼! 위험해!”하고 소리쳤다. 무사히 부엌에 들어가 곡식 항아리를 품에 안은 아영은, 담장을 빗기는 달빛이 마을 텃밭들을 밝게 비춘 그 순간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때 !’하고 총성이 울렸고, 아영의 얼굴은 거대한 쇠몽둥이에 휘둘려 맞은 듯 뒤로 확 꺾였다. 곡식 항아리가 저만치 날리며 퍽퍽 부서졌다. 와두두두, 곡식이 쏟아졌다. 아영이 턱을 잃은 밤이었다.

 

아영은 제주 4·3 중에 북제주군 한경면 판포리 집 앞에서 경찰이 무장대로 오인하여 쏜 총에 턱을 맞고 쓰러졌다. 총탄에 너덜너덜해진 턱을 가위로 잘라 내고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평생 약 없이는 견딜 수 없는 끔찍한 고통 속에 살았다. 흉측해진 얼굴을 하얀 무명천으로 가리고 외로움과 슬픔을 견뎌내야 했다. 턱을 잃어버려 말을 할 수도,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도 없었다. 간혹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게 될 때면 자신의 흉한 얼굴이 보일까 봐 몸을 돌리고 구석에서 혼자 먹어야 했던 나날들. 언니가 사는 월령리로 거처를 옮긴 후에도 밖에 잠깐이라도 나갈 때면 집 안의 모든 문을 자물쇠로 꼭꼭 잠가 두어야 마음을 놓았고, 끔찍한 고통과 아픔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홀로 외롭게 살다 하늘로 떠났다.

 

 

3.

이 책 무명천 할머니는 말을 할 수 없어 모로기(‘언어 장애인의 제주 방언)할망이라 불렸던 진아영 할머니의 이야기가 담긴 그림책이다. 어린이를 위한 창작 그림책 시리즈 <그림책 마을>에서 제주 4·3 사건 70주년을 맞이하여, 18번째 테마로 아이들에게 평화와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줄 수 있는 책을 준비했다고 한다. 그림책답게 마지막에 제주 4·3은 무엇이고, 왜 일어났고, 당시에 어떤 일이 있었으며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 설명해준다. 역사를 배우기 시작한 고학년을 비롯하여 제주 4·3을 처음 접하는 이에게 좋은 입문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앞서 이야기했듯 역사를 기억하는 일은, 어쩌면 한 사람을 기억하는 것에서 시작되기도 하니 말이다. 턱이 없어 고생했던 일보다, 그날의 참상을 평생 말하지 못하고 살아야 했던 아픔이 더 컸을 진아영 할머니의 삶은 내게 제주 4·3을 더욱 깊이 알고 싶게 했다.

 

때마침 KBS에서 지난 3일에 제주 4·3 사건 70주년 역사특강을 방송해줘서 챙겨보았다. 4·3을 배우기 위해 필요한 배경지식으로 시작해서, ‘제주 평화 기념관에 있는 백비(아무것도 새겨져 있지 않은 빈 비석)의 설명으로 마무리한 강의였다.

 

언젠가 이 비에 제주 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

 

아직도 정명(正名)되지 못한 아픈 역사. 설쌤의 마지막 말처럼 이제는 말할 수 있고, 추모할 수 있고, 이 비극을 함께 나눌 수 있다. 노랗고 빨갛고 푸르른, 찬란한 제주. 아름다운 섬으로만 기억하기보다는 슬프고 무섭더라도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아픈 역사도 함께 기억했으면 한다. 많은 사람을 기억하기 어렵다면, 한 사람을 기억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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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들이 절대 하지 않는 40가지 습관 - 상위 1% 부자 3,000명에게 배운, 평생 돈 걱정 없이 사는 법
다구치 도모타카 지음, 안혜은 옮김 / 21세기북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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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 부자들이 절대 하지 않는 40가지 습관을 접했을 때, 내가 이 책을 읽고 싶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하지 않는데 있었다. 하는 데에도 이유가 있겠지만, 하지 않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더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책의 제목이 그냥 부자들의 40가지 습관이었다면 내가 이 책을 궁금해 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이전의 책들과 비슷한 책이겠거니 넘겼을 것이 분명하다.

 

2.

저자 다구치 도모타카는 앞일을 생각하지 않고 낭비를 일삼다가 28세 때 파산 직전에 이를 정도로 많은 빚을 지게 되었지만, 철저한 절약과 자산 운용으로 불과 몇 년 만에 모든 빛을 청산한다. 이후 수입의 복선화’, ‘코어 앤 세틀라이트 투자방식으로 자산을 불려... 뭐라뭐라 설명하지만 어려우니까 요약해서 말하자면 수많은 부자들을 인터뷰하면서 발견한, 그들만의 공통적인 철학을 알리고자 이 책을 집필한 작가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말하는 공통적인 철학은 책의 제목에 실린 것처럼 습관을 뜻하고, 습관은 곧 자기관리로 이어진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책에 실린 것보다 더 많은 습관들이 있겠지만, 그중 40가지 습관을 식사-투자--관계-교제라는 다섯 가지의 카테고리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이 습관들 중에 내가 인상 깊게 읽은 두 가지 습관에 대해 이야기 해볼까 한다.

 

먼저 식사에 관한 습관. 똑똑한 부자는 메뉴 선택을 고민하지 않는다. 메뉴 결정이 빠르다는 것은 명확한 선택 기준이 있다는 증거. 예를 들어, 칼로리를 생각해서 고기보다는 생선을 고르고, 덮밥보다는 음식 가짓수가 많은 정식을 고르는 등의 명확한 판단 기준이 있기 때문에 고민 없이 고를 수 있는 것이다.

 

고작 메뉴 선택인데 너무 확대 해석 하는 것 아니야?’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메뉴 선택 시 기준이 없는 사람은 대부분 업무와 생활에서도 기준이 없다. 돈이 안 모이는 것도 명확한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p.55)

 

단순히 메뉴 선택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저축을 하거나 다이어트를 할 때 등등 전반적으로 명확한 기준을 가지는 습관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였다.

 

두 번째로, 투자에 관한 습관. 똑똑한 부자는 돈을 모으는 데만 집중하지 않는다. ‘돈을 써야 할 때 제대로 쓴다는 것은 단순히 저축액을 늘리는 게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돈을 불린다는 생각을 갖는 것이다. 부자가 되어 이상적인 인생을 손에 넣은 사람은 예외 없이 인생의 한 지점에서 투자의 위험을 감수한 사람들이라는 것 또한 인상적이었다. 저축은 중요하지만, 저축만 해서는 이상적인 인생을 얻을 수 없다.

 

3.

하지 않는 습관을 통해서 부자가 되는 자기 관리를 하게 되는 것. 하나하나 따지면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습관으로 들이면 자기 관리의 과정을 즐기게 된다는 것이 이 책의 제일 큰 핵심이 아닐까 싶다.

 

나는 부자를 원한다기 보다는 낭비 없이 알뜰하게 돈을 관리하고 싶은 마음에 이 책을 읽었다. 습관으로 들이기는 쉽지 않겠지만, 이 책에서 설명하는 습관들을 통해 전보다 자기 관리를 즐기는 사람으로 거듭나고 싶다. 이것이야 말로 어쩌면 부자가 되는 것만큼 중요한 수확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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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냥이로소이다 - 웬만해선 중심을 잃지 않는 고양이의 바깥세상 참견기
고양이 만세 지음, 신소윤 옮김 / 21세기북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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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마리의 필냥이가 있다. 중성화한 수컷 고양이로, 20112월 서울의 한 가정집에서 태어났다. 코리안숏헤어터키시앙고라의 피를 반반씩 물려받아 얼굴과 체형은 코리안숏헤어, 털색은 터키시앙고라의 흰색이다. 팔다리를 뻗어 만세하듯 보이는 동작이 특기라 이름도 만세가 된 고양이. 반려인 1이 기사 쓰는 걸 돕던 중 덜컥 기자가 되었고, 사냥에 나갔다 죽은 줄 알았던 반려인 1이 작고 낑낑거리는 생명체를 가슴에 품고 돌아오던 날부터 육아냥을 겸업하게 되었다. 이 책은 그런 만세가 바라 본 요즘 세상, 요즘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부산스러운 반려인 둘과 시끄럽지만 사랑스럽고, 귀엽지만 얄미운 사람 아기와 치와와 제리 형님과 함께 살지만 걱정 없이 늘상 여유로운 만세는 모두가 깊이 잠든 칠흑같이 까만 밤에 원고를 쓰며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의 기쁨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고양이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인간의 정서다. 하지만 나날이 이어지는 수많은 걱정과 고민 끝에 조금 더 나은 내일을 만들려는 그들의 삶의 방식을 폄하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내가 사랑하는 인간들이 내일 걱정을 위해 오늘밤 잠자리를 뒤척이는 오류는 범하지 않았으면. 어떤 날에는 고양이처럼 하루 종일 별일 없이 시간을 보내면서 무엇에도 맘 졸이지 않는 하루를 지내봤으면. (p.146)

 

별 하나에 걱정과 별 하나에 또 다른 걱정을 하는 인간들을 생각한다. 또 만세는 비가 내릴 것 같은 밤이면 길고양이 가족이 오늘도 무사했는지 생각한다.

 

집고양이의 평균수명은 길고양이보다 네댓 배나 길어. 나는 길에서의 삶이 어떤 것인지 도통 모르고 있는지도 몰라.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고된 일상을 버티고 살아남아야 하는 나날일 거라고 겨우 짐작만 할 뿐이야. (p.222)

 

겨우 짐작만 하지만, 부디 오래오래 힘세고 건강하게 그곳에 있어달라고 누구보다 바라는 냥이는 내일도 보내지 못할 편지를 쓸 것이다.

 

고양이의 시점에서 쓰여서 그런지, 고양이에 대한 마음이 한결 와 닿았다는 생각이 든다. 만세의 시선으로 쓰여서 더욱 와 닿았던 구절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이 구절이다.

 

어느 날 아침 반려인 1은 출근과 아이 등원 준비를 동시에 하며 정신이 없던 중이었다. 평소 집 안에 낙서하지 않던 지우는 바닥에 크레파스로 주욱 선을 그었다. 반려인 1은 처음이니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물티슈로 바닥을 훔쳤다.

그날따라 엄마를 기다리는 게 지루했던 걸까. 지우는 방금 갈아입은 옷에도 그림을 그렸다. 반려인 1이 한숨을 쉬며 옷을 갈아입혔다. 그런데 점점 더 처음 해본 놀이가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새 옷에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분노 열매를 먹은 반려인 1이 결국 목소리를 높였다.

 

지우야! 엄마가 낙서 그만하라고 몇 번 말했니? 어린이집 안 갈 거야? 엄마 회사 안 가도 돼? 바쁜데 도와주지도 못할망정 이럴 일이니?”

 

캣 타워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나는 그녀가 소리 지른 것을 금세 후회할 것이라 예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반려인 1은 아이에게 말했다.

 

엄마가 아까 화내서 미안해. 바쁜데 자꾸 낙서해서 옷을 갈아입어야 하니까, 마음이 급해서 그랬어.”

괜찮아, 엄마. 그런데 소리는 지르지 마. 그러면 엄마 목이 아프잖아.”

 

늘 그렇지만 어른은 아이보다 못하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아이의 말을 오래오래 곁에서 듣고 싶다. 내 몸에 얼굴을 폭 기대며 만세가 좋아, 너무 좋아라고 쏟아내는 고백도. (p.85)

 

아마도 이런 날은 하루 이틀이 아닐 것이다. 출근 하나로도 충분히 바쁜데, 등원을 챙겨야 하는 엄마는 늘 정신이 없고 아이는 엄마 속도 모르고 세상 느긋하다. 그렇지만 아이가 이렇게 말을 하면 열이면 열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만세의 말마따나 가능하면 오래오래 곁에서 듣고 싶은, 순수하고 아름다운 아이의 말. 만세의 시선이 아니었으면 보지 못했을 하나의 풍경이었다.

 

옮긴이의 말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낸 저자는, 자신과 함께 사는 동물들의 마음이 늘 궁금했다고 한다. 몇 날 며칠을 앓으면서도 찍소리 내지 않고 참는 반려견 제리에게 꼭 한번 말을 걸어보고 싶었고, 아픈 제리를 살피느라 어떤 날은 한 번도 쓰다듬어주지 못했던 만세에게도 어떤 마음인지 물어보고 싶었다고. 특히 가장 늦게 가족으로 합류한 사람 아기의 등장에 보살핌을 받는 순서가 훌쩍 뒤로 밀려버렸음에도, 아이에게 다정하게 구는 것을 볼 때도 자꾸만 말을 걸고 싶었다고 한다. 최대한 그들의 시선 가까이에서 글을 쓰면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말이다.

 

한 번쯤 꼭 듣고 싶었던 말들을 생각했던 그 모든 시간들은, 만세의 글을 옮긴 저자에게도 이 책을 읽게 된 나에게도 따뜻한 글로 남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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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노

(일본어) 피고,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는가.

 

마키노를 바라보는 박열.

 

박열

(일본어) 없네... 수고했네.

마키노

(일본어) 가네코 후미코,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는가.

후미코

(일본어) 나는 박열의 본질을 알고 있다.

그런 박열을 사랑하고 있다.

그가 갖고 있는 모든 과실과 결점을 넘어 나는 지금 그를 사랑한다.

나는 지금, 그가 나에게 저지른 모든 과오를 무조건 받아들인다.

재판관들에게 말해 두고자 한다. 부디 우리 둘을 함께 단두대에 세워 달라고.

박열과 함께 죽는다면 나는 만족스러울 것이다.

 

입 닥쳐!’ ‘재판 빨리 끝내!!’ 삿대질과 고함을 치는 일본인 방청객 사이에서

일본 신문 기자들이 메모지에 재판기록을 빠르게 써 내려간다.

밖에서 들려오는 조선인들의 외침소리.

모두 웅성거림으로 변하며 후미코의 목소리만 들려온다.

 

후미코

(일본어) 그리고!!! 박열에게 말해두고자 한다.

설령 재판관의 선고가 우리 두 사람을 나눠놓는다 해도

나는 결코 당신을 혼자 죽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박열이 후미코를 향해 미소 짓는다.

엄청난 소음 속에 고함치듯 선고하는 마키노.

 

마키노

(일본어) 형법 제73조에 의거하여 폭발물 취납 벌칙

3조 위반을 적용하여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급하게 판결봉을 두드리는 마키노.

방청석에서 안도와 기쁨의 격한 반응이 흘러나온다.

마키노와 재판장들이 서둘러 자리를 뜨려고 일어선다.

 

박열

어이! 재판장!

 

외면하고 걸어가는 재판장.

 

박열

! 재판장!

 

박열을 저지하는 법원경찰.

박열을 지지하는 방청객들의 야유와 반대하는 방청객들의 소란이 뒤엉킨다.

 

박열

(일본어) 내 육체야 자네들 마음대로 죽일 수 있겠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할 수 있겠는가.

후미코

(일본어) 드디어 허위와 가식의 재판이 끝났군. 만세!

 

법원경찰들이 박열과 후미코를 끌고 법정을 나선다.

끌려가면서 만세!를 외치는 후미코.

여기저기 붙잡히며 뜯어져나가는 박열과 후미코의 옷자락. 만세!

외침과 삿대질을 퍼붓는 방청객들.

 


*



시나리오 6호(2017 가을)를 읽는데,

최후 변론씬에서 박열과 후미코의 목소리가 들렸다.


영화 '박열'에서 너무나도 좋아하는 최후 변론씬.


박열을 사랑하는 멋진 후미코가 좋고,

그런 후미코가 사랑하는 박열 역시 멋있어서

최후 변론씬을 보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던 기억이 난다.


생각나면 언제든 다시 찾아 읽고 싶어서 기록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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