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천 할머니 스콜라 창작 그림책 59
정란희 지음, 양상용 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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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치의 만행이 극에 달했던 1944,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시체들을 처리하기 위한 비밀 작업단 존더코만도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가 있다. X자 표시가 된 작업복을 입고,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오직 시키는 대로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는 존더코만도 사울의 앞에 어린 아들의 주검이 도착한다. 처리해야 할 시체더미들 사이에서 아들을 빼낸 사울은 랍비를 찾아 제대로 된 장례를 치러주기로 결심한다.

 

그런 사울의 뒤를 따라 홀로코스트를 체험하게 하는 이 영화를 보고 나는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영화가 사울이라는 한 사람에게 집중한 것처럼, 기억이란 어쩌면 한 사람을 기억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 사람을 기억하게 만들어,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른 잊지 못할 역사와 그곳하게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을 기억하게 한다.’

 

사울은 어디까지나 허구의 인물이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난 후로 홀로코스트를 떠올리게 될 때면 나는 으레 사울부터 떠올리곤 했다.

 

 

2.

폭도들을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다 죽여 버려!”

어두운 밤, 마을에 들이닥친 토벌대는 총을 쏘기 시작했다. 아영의 가족은 그날 밤 토벌대를 피해 몸을 숨겨야만 했다. 누군가는 하얗게 뿜어져 나오는 입김을 감추려 검은 흙에 얼굴을 묻었고, 누군가는 들키지 않으려고 우는 아이의 입을 틀어막았다. 집이 불타고 있었음에도 누구 하나 불을 끄러 달려 나가지 못했다. 오늘 밤 마을이 불타 사라진다 해도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나았으니까. 그저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무사히 날이 새기만을 바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영은 집이 걱정 되었다. 엌에 있는 곡식 항아리가 아른거린 나머지 아영은 몸을 일으켜 집으로 뛰어 들었고, 소리를 잘 듣지 못하는 아영을 향해 아버지는 안 돼! 위험해!”하고 소리쳤다. 무사히 부엌에 들어가 곡식 항아리를 품에 안은 아영은, 담장을 빗기는 달빛이 마을 텃밭들을 밝게 비춘 그 순간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때 !’하고 총성이 울렸고, 아영의 얼굴은 거대한 쇠몽둥이에 휘둘려 맞은 듯 뒤로 확 꺾였다. 곡식 항아리가 저만치 날리며 퍽퍽 부서졌다. 와두두두, 곡식이 쏟아졌다. 아영이 턱을 잃은 밤이었다.

 

아영은 제주 4·3 중에 북제주군 한경면 판포리 집 앞에서 경찰이 무장대로 오인하여 쏜 총에 턱을 맞고 쓰러졌다. 총탄에 너덜너덜해진 턱을 가위로 잘라 내고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평생 약 없이는 견딜 수 없는 끔찍한 고통 속에 살았다. 흉측해진 얼굴을 하얀 무명천으로 가리고 외로움과 슬픔을 견뎌내야 했다. 턱을 잃어버려 말을 할 수도,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도 없었다. 간혹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게 될 때면 자신의 흉한 얼굴이 보일까 봐 몸을 돌리고 구석에서 혼자 먹어야 했던 나날들. 언니가 사는 월령리로 거처를 옮긴 후에도 밖에 잠깐이라도 나갈 때면 집 안의 모든 문을 자물쇠로 꼭꼭 잠가 두어야 마음을 놓았고, 끔찍한 고통과 아픔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홀로 외롭게 살다 하늘로 떠났다.

 

 

3.

이 책 무명천 할머니는 말을 할 수 없어 모로기(‘언어 장애인의 제주 방언)할망이라 불렸던 진아영 할머니의 이야기가 담긴 그림책이다. 어린이를 위한 창작 그림책 시리즈 <그림책 마을>에서 제주 4·3 사건 70주년을 맞이하여, 18번째 테마로 아이들에게 평화와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줄 수 있는 책을 준비했다고 한다. 그림책답게 마지막에 제주 4·3은 무엇이고, 왜 일어났고, 당시에 어떤 일이 있었으며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 설명해준다. 역사를 배우기 시작한 고학년을 비롯하여 제주 4·3을 처음 접하는 이에게 좋은 입문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앞서 이야기했듯 역사를 기억하는 일은, 어쩌면 한 사람을 기억하는 것에서 시작되기도 하니 말이다. 턱이 없어 고생했던 일보다, 그날의 참상을 평생 말하지 못하고 살아야 했던 아픔이 더 컸을 진아영 할머니의 삶은 내게 제주 4·3을 더욱 깊이 알고 싶게 했다.

 

때마침 KBS에서 지난 3일에 제주 4·3 사건 70주년 역사특강을 방송해줘서 챙겨보았다. 4·3을 배우기 위해 필요한 배경지식으로 시작해서, ‘제주 평화 기념관에 있는 백비(아무것도 새겨져 있지 않은 빈 비석)의 설명으로 마무리한 강의였다.

 

언젠가 이 비에 제주 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

 

아직도 정명(正名)되지 못한 아픈 역사. 설쌤의 마지막 말처럼 이제는 말할 수 있고, 추모할 수 있고, 이 비극을 함께 나눌 수 있다. 노랗고 빨갛고 푸르른, 찬란한 제주. 아름다운 섬으로만 기억하기보다는 슬프고 무섭더라도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아픈 역사도 함께 기억했으면 한다. 많은 사람을 기억하기 어렵다면, 한 사람을 기억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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