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냥이로소이다 - 웬만해선 중심을 잃지 않는 고양이의 바깥세상 참견기
고양이 만세 지음, 신소윤 옮김 / 21세기북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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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마리의 필냥이가 있다. 중성화한 수컷 고양이로, 20112월 서울의 한 가정집에서 태어났다. 코리안숏헤어터키시앙고라의 피를 반반씩 물려받아 얼굴과 체형은 코리안숏헤어, 털색은 터키시앙고라의 흰색이다. 팔다리를 뻗어 만세하듯 보이는 동작이 특기라 이름도 만세가 된 고양이. 반려인 1이 기사 쓰는 걸 돕던 중 덜컥 기자가 되었고, 사냥에 나갔다 죽은 줄 알았던 반려인 1이 작고 낑낑거리는 생명체를 가슴에 품고 돌아오던 날부터 육아냥을 겸업하게 되었다. 이 책은 그런 만세가 바라 본 요즘 세상, 요즘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부산스러운 반려인 둘과 시끄럽지만 사랑스럽고, 귀엽지만 얄미운 사람 아기와 치와와 제리 형님과 함께 살지만 걱정 없이 늘상 여유로운 만세는 모두가 깊이 잠든 칠흑같이 까만 밤에 원고를 쓰며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의 기쁨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고양이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인간의 정서다. 하지만 나날이 이어지는 수많은 걱정과 고민 끝에 조금 더 나은 내일을 만들려는 그들의 삶의 방식을 폄하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내가 사랑하는 인간들이 내일 걱정을 위해 오늘밤 잠자리를 뒤척이는 오류는 범하지 않았으면. 어떤 날에는 고양이처럼 하루 종일 별일 없이 시간을 보내면서 무엇에도 맘 졸이지 않는 하루를 지내봤으면. (p.146)

 

별 하나에 걱정과 별 하나에 또 다른 걱정을 하는 인간들을 생각한다. 또 만세는 비가 내릴 것 같은 밤이면 길고양이 가족이 오늘도 무사했는지 생각한다.

 

집고양이의 평균수명은 길고양이보다 네댓 배나 길어. 나는 길에서의 삶이 어떤 것인지 도통 모르고 있는지도 몰라.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고된 일상을 버티고 살아남아야 하는 나날일 거라고 겨우 짐작만 할 뿐이야. (p.222)

 

겨우 짐작만 하지만, 부디 오래오래 힘세고 건강하게 그곳에 있어달라고 누구보다 바라는 냥이는 내일도 보내지 못할 편지를 쓸 것이다.

 

고양이의 시점에서 쓰여서 그런지, 고양이에 대한 마음이 한결 와 닿았다는 생각이 든다. 만세의 시선으로 쓰여서 더욱 와 닿았던 구절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이 구절이다.

 

어느 날 아침 반려인 1은 출근과 아이 등원 준비를 동시에 하며 정신이 없던 중이었다. 평소 집 안에 낙서하지 않던 지우는 바닥에 크레파스로 주욱 선을 그었다. 반려인 1은 처음이니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물티슈로 바닥을 훔쳤다.

그날따라 엄마를 기다리는 게 지루했던 걸까. 지우는 방금 갈아입은 옷에도 그림을 그렸다. 반려인 1이 한숨을 쉬며 옷을 갈아입혔다. 그런데 점점 더 처음 해본 놀이가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새 옷에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분노 열매를 먹은 반려인 1이 결국 목소리를 높였다.

 

지우야! 엄마가 낙서 그만하라고 몇 번 말했니? 어린이집 안 갈 거야? 엄마 회사 안 가도 돼? 바쁜데 도와주지도 못할망정 이럴 일이니?”

 

캣 타워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나는 그녀가 소리 지른 것을 금세 후회할 것이라 예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반려인 1은 아이에게 말했다.

 

엄마가 아까 화내서 미안해. 바쁜데 자꾸 낙서해서 옷을 갈아입어야 하니까, 마음이 급해서 그랬어.”

괜찮아, 엄마. 그런데 소리는 지르지 마. 그러면 엄마 목이 아프잖아.”

 

늘 그렇지만 어른은 아이보다 못하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아이의 말을 오래오래 곁에서 듣고 싶다. 내 몸에 얼굴을 폭 기대며 만세가 좋아, 너무 좋아라고 쏟아내는 고백도. (p.85)

 

아마도 이런 날은 하루 이틀이 아닐 것이다. 출근 하나로도 충분히 바쁜데, 등원을 챙겨야 하는 엄마는 늘 정신이 없고 아이는 엄마 속도 모르고 세상 느긋하다. 그렇지만 아이가 이렇게 말을 하면 열이면 열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만세의 말마따나 가능하면 오래오래 곁에서 듣고 싶은, 순수하고 아름다운 아이의 말. 만세의 시선이 아니었으면 보지 못했을 하나의 풍경이었다.

 

옮긴이의 말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낸 저자는, 자신과 함께 사는 동물들의 마음이 늘 궁금했다고 한다. 몇 날 며칠을 앓으면서도 찍소리 내지 않고 참는 반려견 제리에게 꼭 한번 말을 걸어보고 싶었고, 아픈 제리를 살피느라 어떤 날은 한 번도 쓰다듬어주지 못했던 만세에게도 어떤 마음인지 물어보고 싶었다고. 특히 가장 늦게 가족으로 합류한 사람 아기의 등장에 보살핌을 받는 순서가 훌쩍 뒤로 밀려버렸음에도, 아이에게 다정하게 구는 것을 볼 때도 자꾸만 말을 걸고 싶었다고 한다. 최대한 그들의 시선 가까이에서 글을 쓰면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말이다.

 

한 번쯤 꼭 듣고 싶었던 말들을 생각했던 그 모든 시간들은, 만세의 글을 옮긴 저자에게도 이 책을 읽게 된 나에게도 따뜻한 글로 남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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