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운동을 하면서 체중계에 올라가지 않는다. 그 숫자는 내가 운동으로 얻고자 하는 것과 무관하다. 그 숫자는 나를 정의할 수 없고, 나의 아름다움에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 조금만 살이 쪄도 잘 맞는 여성복을 찾기 힘든 한국의 성차별적 의류 시장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거워지는 것이 두렵지않다. 당장은 쉽지 않더라도, 점점 더 많은 여성이 ‘미용 체중‘ 같은 헛소리를 시원하게 무시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들이 정한 ‘정상‘ 구간에 맞지 않는 나를 자랑스러워하자. 개인의 ‘정신 승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여성의 몸이 위축되지 않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한 여성이 자기 자신을 옹호할 때, 그는 사실 자신도 모르게, 어떤 주장도 펼치지 않으면서 모든 여성을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 라는 마야 엔젤루의 말처럼.

* 《여자다운 게 어딨어》(에머 오툴 지음, 박다솜 옮김, 창비, 2016)에서 재인용. - P70

친구들이 운동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하나하나가 모두 여성의 성장 서사다. 꼭 성실하고 꾸준하게 운동하는 얘기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근근이 운동을 하는 얘기도, 이런저런 운동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얘기도, 심지어 운동을 얼마 안 돼 그만둔 얘기조차도 훌륭한 서사다. 실패를 인정하고, 실패를 딛고, 자기 자신을 위해 다시 도전하는 여성들의 얘기.
더 많은 여성이 스스로가 가장 즐거워하는 운동을 했으면 좋겠다. 주변 사람에게 ‘요즘, 나 이런 운동 한다!‘고 자랑하고 떠들었으면 좋겠다. 운동을 주제로 수다만 떨어도 이렇게 재밌는데, 같이 운동하면 얼마나 더 재미있을까? 여성들이 더 많은 운동장을 점령했으면 좋겠다. 세상은 넓고 운동은 많다. 그리고 모든 운동은 여성들의 운동이다.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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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해."

"네?"

"열심히 하지 말고 그냥 하라고."

"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

"네."

"아침에 알람 몇 번 맞추고 일어나?"

"못 일어날까 봐 여러 번 맞춰 두고 몇 십 분이 지나서야 일어납니다."

"그래 다들 그러지. 그냥 일어나."

"네?"

"알람 울리면 그냥 한 번에 일어나라고. 울리면 일단 끄면서 생각을 하잖아. 일어나기 싫고, 출근하기 귀찮고 좀 더 자고 싶고, 이러다가 또 다시 눕고 그러잖아. 그냥 생각하지 말고 일어나라고."

"아, 생각을 하지 말고……. 네."

"잘 하려고도 하지 말고 열심히 하려고도 하지마. 그러니까 힘들어지는 거야. 흐르는 대로 그냥 살어."

"네, 알겠습니다."

대답은 했지만, 처음엔 잘 이해하지를 못했고 이해를 하고 난 뒤에도 마음처럼 잘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늘 되새기려 합니다.

- 정주윤, 나만 두려운 건 아니겠지? p.12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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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바닥의 깊이가 중요하다. 좋을 때 에너지가 넘치고 주변 사람들에게 나이스 한 건 누구든 할 수 있다. 물론 그 영역도 개인차가 심하여 어떻게 저런 에너지가 나올까, 어쩜 저렇게 즐겁게 살까 싶은 사람들도 분명 있다. 그런 사람들은 리스펙트한다.
SNS나 일터에서 보이는 개개인의 모습들은 맥주 거품기로 만든 맛있는 크림 거품과 같다. 나 또한 거품이 예쁜 편이다. 거품이 걷히면 맥주 본연의 맛이 나오듯이, 사람은 바닥까지 내려갔을 때 그 사람의 제대로 된 인격이 드러난다. 바닥에서의 모습은 평소 모습과 전혀 다르다. 바닥의 모습이 괴물 같은 사람들일수록 인격 세탁을 위해 힘들 때의 사람들을 멀리하는 법이다. - P73

올 시즌을 보내고 나니 확실히 이야기할 수 있다. 난 이제 프로야구에 완전히 관심이 없어졌다. 더 이상 매일 저녁 6시 30분부터의 시간을 빼앗기지 않는다. 달달 외우던 선수들의 스탯이 더 이상 의미 없는 숫자들이 되었고, 스포츠 뉴스로 경기 하이라이트도 보지 않는다. 야구는 마치 세팍타크로, 노르딕 복합 경기만큼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종목이 되어버렸다. 야구는 나를 다시 찾을 수 있을까. - P116

사람마다 태어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가족들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일만 하기 위함이거나, 타인의 칭찬과 인정을 받기 위함이라면 너무 슬프지 않겠는가. 내가 태어난 이유 중 작은 하나는 일 년에 한 번 첫눈을 보기 위함일 것 같다. 수술을 받고 방사선 치료를 받을 때만 해도 역대급 폭염이었는데, 아무리 힘든 시간을 보내도 시간은 흐르고 첫눈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 P201

좀 놀아보니 알겠더라. 할 일이 없을 때 자연스럽게 노는 것보다 할 일이 산처렇 쌓여 있을 때 째고 노는 것이 훨씬 재미있다. 더 재미있게 놀기 위하여, 이 사무 공간에 할 일이 좀 쌓여주길. -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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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은 어떻게든 사수해야 하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글을 쓰기로 나 자신과 약속한 날, 종일 집에 머물며 아주 천천히 글을 썼다. 평소에는 잘 마시지도 않는 돌체구스토도 한 잔 내려놓고서. 그런 날이면 내 고양이가 낮잠을 자다 말고 그루밍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볕이 가장 좋은 창문 아래 자리를 잡고 앉는다. 시간과 정성을 들여 아주 오랫동안 온몸의 털을 싹싹 핥아 다듬는다. 뒷다리를 하늘 높이 번쩍 치켜들고 그루밍할 때는 마치 요가를 하는 듯 우스꽝스러운 자세가 된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한참 동안 몸을 단장하고 나면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다시 따사로운 햇살 아래서 낮잠을 청하는 것이다. 잘 보일 애인도 없는 녀석이 굳이 시간을 내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털을 가꾼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글을 쓰고 책을 내는 행위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중에 둥실둥실 떠다니는 나만의 생각과 느낌을 정성껏 고른 언어로 만드는 작업. 이것이야말로 나를 정성껏 가꾸고 돌보는 시간,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시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래서 다들 글을 쓰는 걸까? 그렇구나. 자신의 목소리를 몸 밖으로 내보낼 줄 아는 삶이란, 굳이 책을 내지 않는다고 해도 그 자체로 매우 근사하고 쓸모 있는 게 아닐까.


- 김먼지, 책갈피의 기분 p.207~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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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퍼가 그린 그림

사다리꼴 지붕에 사각 벽에 사각 창에 있다

머리카락이 없고 눈이 없고 입이 없다 윤곽선만 남아

창턱에 두 팔을 걸치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일곱 살 그림마다 사다리꼴 지붕 아래 사각 벽에 사각 창을 그려넣곤 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그때부터

세 번 만나고 헤어지자는 말에 스무 살 짝사랑이 말했다

사랑은 제 눈에 들앉은 들보라고

네가 바라봐줘야 너를 들어올릴 수 있다고

결혼식 전날 기혼의 막내 오빠가 말했다

사랑이란 나의 너를 위해 세상에 쌓는 담이라고

허물어지지 않으려면 스스로가 벽이 되어야 한다고

현관의 나 홀로 신은 홀로임을 반성중이다

어제 입술로 오늘 마시는 말술이 마술이다

왼손에 사각턱을 괴고 사각 창에 갇힌 내가 말했다

일흔 살에 잘한 일이 일곱 살 사다리꼴 지붕 아래 반성중인 신을 사들이고 마술을 살아낸 거였으면 좋겠다고

신이 있다면 내가 그린 그림에 있다고

마술이 있다면 그 그림에 찍어놓은 내 입술 자국에 있다고

사랑에 갇힌 호퍼가 말했다 사각의 유리창 안에서

- 정끝별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 <호퍼가 그린 그림>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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