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톨로지 (스페셜 에디션, 양장) - 창조는 편집이다
김정운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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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기억되는 칼럼이 있다. 내게는 김정운 교수님의 한 칼럼이 그렇다. ‘내년에 오십인데라는 제목으로, 2010년의 글이다.

 

나는 수첩을 아주 자주 바꾼다. 조금 쓰다가도 지겨우면 바로 바꿔 버린다. 한달에 서너개 이상은 바꾸는 것 같다. 지금도 내 책상에는 처음 몇 쪽만 쓰다 만 수첩이 수십 종류다. 시내 큰 서점에 붙어 있는 문구점에 정기적으로 들러 새로운 디자인의 수첩을 찾아보는 게 내 취미다. 어쩌다 외국여행을 나가면 문방구를 파는 곳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거의 강박증 수준이다. 좀 한가한 어느 날, 내가 도대체 왜 이러는가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 한겨레 칼럼 [김정운의 남자에게] “내년에 오십인데” (2010.06.23.) 중에서

 

아주 자주 바꾸지는 않지만, 당시 내 책상에도 처음 몇 쪽만 쓰다 만 수첩이 적어도 열 손가락은 넘었으므로 나는 이어지는 글에 구미가 당겼다. 이 교수님이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고 이러나. 수첩을 자주 바꾸는 이유로, 교수님은 내 인생에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어서 그렇다고 썼다. 다다음 문단에 칼럼의 주제가 등장한다. ‘선택의 자유’. 내 삶의 의미는 내가 선택했는가 아닌가에 의해 결정된다는 이 이야기를, 나는 수첩을 볼 때마다 떠올리곤 한다.

 

8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몇 쪽만 쓰다 만 수첩을 끼고 사는 동안, 교수님은 4년만에 에디톨로지개정판을 출간하셨다. 창조란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며, 기존의 것들을 새롭게 재구성하는 데서 탄생한다는 에디톨로지’. 그 핵심을 오롯이 소화할 수 있게 쓰인 구판에 이어, 개정판에는 새로운 콘텐츠 생산과 관련된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자신의 편집 공간과 방법을 자세히 소개한 글이 함께 담겼다. 이 스폐셜 부록에 관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정말 많은데, 뒤로 미루고 일단 에디톨로지에 대해 이야기 해본다.

 

에디톨로지는 크게 3장으로 나누어 설명된다. 지식과 문화의 에디톨로지를 소개하는 1, 관점과 장소의 에디톨로지를 소개하는 2, 마음과 심리학의 에디톨로지를 소개하는 3.

 

1부에서는 ‘6 노트와 카드의 차이는 엄청나다는 꼭지가 가장 인상 깊었다. 한국 학생들은 노트를 독일 학생들은 카드를 쓴다는 글에서, 다음 카페와 네이버 지식인의 결정적 차이를 설명하는 글로 이어지는 이 글에서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독일 학생들의 카드 편집과 같은 주체적 지식을 편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꼭 엄청난 이론이 아니어도 아무 상관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관해 포스팅하고, 비슷한 관심을 가진 이들과 지식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한 블로거들의 세상이 열린 것이다. ‘재미 공동체(다음)’에서 지식 공동체(네이버)’로의 이동이다. (p.85)

 

내가 다음과 싸이월드보다 네이버를 좋아하는 이유를 이 책에서 발견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관해 포스팅하고, 비슷한 관심을 가진 이들과 지식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한 블로거. 공유하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편집해서 포스팅 할 수 있는 공간이기에 나는 블로그를 좋아한다. 10년간 블로거로 살아온데는 편집의 힘이 있었음을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2부에서는 ‘16 공간편집에 따라 인간의 심리는 달라진다는 꼭지가 가장 재밌었다. 내가 천장이 높은 카페를 좋아하는 이유를 여기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천장의 높이만 조금 더 높여도 창조적이 된다. 미네소타대학의 조안 마이어스-레비Joan Meyers-Lavy 교수는 천장 높이를 30센티미터 높일 때마다 사람들의 문제 해결 능력에 변화가 생기는 것을 발견했다. 공간의 형태에 따라 생각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천장이 높고, 넓은 공간에서는 사람들의 관점이 거시적이 되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잘 나온다. 반면 천장이 낮고, 좁은 공간에서는 사물을 꼼꼼하게 바라보게 되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는 경향을 보인다. (p.186-187)

 

머리를 쓰며 읽어야 하는 책을 읽거나, 서평을 쓸 일이 있을 때면 천장이 높은 카페가 생각나곤 하고 곧잘 찾아가는데 괜히 그런 게 아니었다. 우리가 문화 차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의 많은 부분은 공간 의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공간의 구조가 바뀌면 태도가 바뀐다. 출입문의 위치만 바뀌어도 사람들의 동선이 바뀌고, 공간 내의 상호작용 양상이 변화한다. 문화는 이렇게 아주 구체적으로 작동한다는 것. 관점과 장소에 대한 이야기가 이렇게 재밌을 수 있다니.

 

마지막 3부에서는 ‘24 천재는 태어나지 않는다 편집될 뿐이다꼭지를 소개하고 싶다. 모차르트를 두고 계몽주의 시대의 편집된 천재라고 설명하는데, 어쩐지 구미가 당겼다.

 

반면 모차르트의 사정은 많이 달랐다. 한편으로는 궁정 사회에서 인정받고, 재정적 후원을 받기 위해 귀족들의 주문에 맞춰 작곡해야 하는 수공업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한 실험을 통해 자신의 예술적 상상력을 마음대로 펼칠 수 있는 주체적 예술가로서의 삶을 끊임없이 시도했다. 이런 이중적 삶이 모차르트를 천재로 만들었다. (p.269)

 

이 구절을 읽기 전까지는 타고난 음악성만을 두고 천재라 부르는 줄 알았는데, 수공업자의 예술에서 그치지 않고 주체적 예술가로서의 삶을 끊임없이 시도했다는 데에서 그를 천재라 부른다는 것이 인상 깊었다. 천재는 한 사회에서 다른 사회로의 이행기에 집중해서 나타나는데, 표상으로서의 미술이 사진이라는 기계적 수단에 의해 위협받던 시대의 산물로 피카소라는 천재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에서 스티브 잡스라는 천재들이 나왔다는 것 역시 재밌었다.

 

 

 

에디톨로지에 대한 지식도 지식이지만, 책을 읽으면서 많이 배웠다.

 

빈곤한 보캐블러리거친 논리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글을 써서 먹고살 수 있는 이유는 생각해서 쓰는 게 아니라, 쓰면서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글은 이 서평을 생각해서 쓰는 게 아니라 쓰면서 생각할 수 있게 만들었다. 아날로그 책이 좋은 이유는 내 맘껏 쓸 수 있어서인데, 책을 정말 깨끗하게 보는 사람이 있다는 글도 나를 움직였다. ‘내 책은 내 맘대로 쓰기 위해 산 것인데, 중고책으로 되팔려고 책을 사는 게 아닌데 왜 책을 그렇게 깨끗이 보느냐고 혼나는 것만 같았다. 다행히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 않아서, 모처럼 책을 깨끗하게 보지 않았다. 형광펜으로 죽죽 줄도 긋고 연필로 밑줄도 긋고 볼펜으로 내 생각을 써 가며 읽었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메타인지meta-cognition’라고 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객관화하는 자기성찰과 밑줄 긋고 빈곳에 자기 생각을 적는 독서는 동일한 심리적 프로세스입니다. 저자의 생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활자화하는 작업을 통해 정말 많이 성장합니다. (p.350)

 

이와 더불어 에버노트앱을 애용한다는 이야기와 널찍한 모니터 두 개를 나란히 붙여 사용한다는 이야기, 유튜브 같은 영상자료를 수시로 본다는 이야기 등등 스폐셜 부록에 담긴 이야기들은 모조리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글은 마감이 쓴다는 359쪽은 부끄럽게도 이 서평을 쓰면서 실현중이다. 14일에 책을 받아서, 20일까지 서평을 쓰기란 꽤 어려운 도전이었지만 마감은 글을 완성할 것이다. 늘 그랬듯이.

 

이제 정말로 이 서평을 마무리할 때가 왔다. 10년간 블로그를 운영해오면서 매일, 매주, 매달, 매년 콘텐츠를 생산하고 있는 나로서는 콘텐츠 생산, 그 자체가 재미있어야 합니다!’는 꼭지가 사무치게 와 닿았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콘텐츠 생산 그 자체가 삶의 즐거움이 되어야 합니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지만, 돈을 많이 벌려고 혹은 권력이나 명성을 얻으려고 글쓰기를 한다면 절대 잘 될 수 없습니다. 글쓰기 자체에 기쁨을 느끼고, 자신이 생산한 콘텐츠 자체에 희열을 느껴야 합니다. 돈이나 명성은 추구한다고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돈이나 명성, 성공은 100퍼센트 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따라오면 좋은 거고, 안 따라오면 할 수 없는 겁니다. 내가 글쓰기를 하면서 재미있고 즐거웠다면 그 자체로 만족할 수 있는 겁니다. 스스로 재미있는 글을 쓴다면 내 콘텐츠에 공감해주는 독자들은 꼭 나타납니다. 아무리 적은 숫자라도 교감할 수 있는 것처럼 기쁜 일은 없습니다. (p.363-364)

 

 

 

글을 읽는 사람이 함께 호흡하려면 내 호흡이 경쾌해야 하고, 그래야 즐겁게 따라 읽을 수 있으니 짧게 쓰는 게 좋은 글이라고 하셨지만 편집의 실패로 글이 길어지고 말았다. 서평을 세 장 가까이 써버린 바람에, 아주 오래 기억될 것 같은 책이 있다. 내게는 김정운 교수님의 책 한 권이 그렇다. 20188월에 출간된 개정판으로, 책의 제목은 에디톨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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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달다. 어제는 지랄맞았지만,
달다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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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봤을 때, 제목이 참 청량하다고 생각했다. ‘어제는 지랄맞았지만, 오늘은 달다.’를 뒤집어서 오늘은 달고, 어제는 지랄맞았다고 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어린 내게 좋은 대학에 가면 행복이 온다고 했다. 대학생이 된 내게는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면 행복이 온다고 했고, 직장인이 된 내게는 결혼을 하면 행복이 온다고 했다. 나는 알려준 대로 행복을 위한 모든 패를 완벽하게 사용했다. 목적지처럼 보이는 막다른 길에 이르러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행복은 어디에 있죠?”

메아리조차 없다. 어른이 되어버린 내게 대답해줄 어른은 더 이상 없다. 나는 그 자리에 엉거주춤 서서 길을 잃은 아이처럼 울었다. 시간이 흐르고 다시 물었다.

나는 어디로 가면 행복하니?”

미련하게도 이제서야.

저기 숲길이 예쁘니까 구경하면서 갈까?”

나 숲 좋아해.”

알아.”

남의 말만 듣느라 소홀했던 내게 처음으로 행복을 물었다.

 

프롤로그의 일부다. 나 역시 자주했던 생각인지라 공감하며 읽고 있는데, “나 숲 좋아해.” 하고 알아.”라고 받아치는 나와 나의 대화가 마음을 울렸다. 프롤로그의 제목은 행복을 묻다’. 행복은 그 누구도 아닌 내게 묻는 것이고, 그 행복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데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표지의 일러스트도 귀엽고 책의 색감도 사랑스러워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 웬걸, 뜻밖의 보물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작가 달다는 나,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친구, 직장동료를 비롯해 일면식 없는 다른 사람들까지 따뜻한 시선으로 관찰한다. 때로는 통통 튀는 웹툰으로 때로는 사뭇 진지한 글로 풀어내는데, 그 완급조절이 마음에 들었다. 지난 영화제 때 본 오늘도 평화로운처럼 B급 감성 가득한 코미디를 보는 것 같다가도, 가족 이야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어쩐지 더 눈물이 나는 덤덤함.

 

마음에 들었던 구절을 하나만 더 풀자면 이 구절이다.

 

나는 줄곧 휑한 무대에 덩그러니 나를 세웠다.

관중들의 반응을 살피며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했다.

영악한 머리로는 적절한 타이밍을 살펴

멋들어지게 폭죽을 터뜨려 박수를 받아내기도 했다.

 

그러던 중 나의 무대는 위기를 맞았다.

환호 없는 무대는 초조했고 흩어지는 연기처럼 무의미했다.

그리고, 나는 달리기를 멈추었다.

 

전부였던 회사부터 어설픈 자기계발까지

끊임없이 휘두르던 채찍을 내려놓았다.

 

돌아서 본다.

무정하게 멀리도 왔다.

질주해온 길 끝에 아스라이 점처럼 작은 내가 보인다.

지금의 나는 두 팔을 벌리고 섰다.

저만치 따라오는 내 영혼을 힘껏 안아주려고.

 

끌어안은 그의 귀에다 속삭이듯 부탁도 해볼 참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도 나의 곁을 지켜달라고.

나의 진짜 관객이 되어달라고.

 

(p.230-231 파트 5, 08 영혼을 기다리는 시간)

 

글의 아래에는 인디언의 그림과 이런 글이 실려있다.

인디언들은 광야를 달리다 멈추어 서서 달려온 길을 바라본다고 한다.

미처 따라오지 못한 자신의 영혼을 기다리는 시간이라고.

 

 

내게도 영혼을 기다리는 시간이 있다면, 이처럼 좋은 책과 좋은 영화를 보는 시간일 것이다. 시간을 내어 책을 읽으면서, 바쁜 일상에 미처 따라오지 못한 내 영혼을 기다린다. 역시 시간을 내어 영화관에 가서, 좋은 영화를 보고 나와서 그 여운을 곱씹으며 영혼을 기다린다.

 

오늘도 이어지는 무더운 여름밤, 미처 따라오지 못한 영혼이 내게 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방금, 아주 즐겁게 읽은 책의 마지막장을 덮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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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잘 모르는데요 - 나를 위해 알아야 할 가장 쉬운 정치 매뉴얼
임진희 외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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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의 소확행, 썰전을 챙겨본지도 어언 5년이 넘었다. 그간 내게는 단골 멘트 2개가 생겼는데, “어제 썰전에서 봤는데~”썰전에서 설명해주겠지~?”. 전자는 썰전을 챙겨 본 다음 날의 멘트고, 후자는 정치와 관련해서 궁금한 게 생겼을 때의 멘트다. 뉴스를 보고 2%... 아니 22% 모르는 게 생기면 절로 썰전을 떠올리는 습관이 생겼다. 물음표를 해결해주는 느낌표가 되기도 하고,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기도 하는 고마운 프로그램.

이 프로그램을 챙겨보기 이전의 나는 정치를 조금은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썰전을 통해서 나는 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었을 뿐 정치를 모르는 사람이었음을 깨달았다. 매주 다루는 이야기도 그렇고, 각종 자료화면과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표와 자막을 통해 정치에 대한 지식을 많이 깨우쳤다. 이쯤 되면 믿고 보는 썰전이랄까.

 

내가 썰전으로 정치를 배울 때, 브라운관이 아닌 현장에서 정치를 배운 친구들이 있다. 배운 것에 그치지 않고, 대학생으로서 중학생, 고등학생 혹은 후배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쉽게 만들어서 책을 펴냈다. 당시 정치학특강 수업을 담당했던 교수님의 권유로 2년간 학과 수업을 병행하면서 만든 정치는 잘 모르는데요가 그 책이다.

 

정치가 왜 필요한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1정치의 시작부터 어떻게 주인이 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4정치의 미래까지 어렵지 않고 재밌게 쓰여서 가독성이 높다. 4정치의 미래부분을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이렇다.

 

지방자치단체에 대해 다루는데 소제목이 누구 카드를 긁을 것인가?’. 중앙이 하는 일에 지방 보고 돈을 내라고 하거나 지방이 자체 사업을 하는 데 중앙 돈을 마치 엄마 카드 쓰듯 낭비하는 경우들이 있다고 설명하는데, 무릎을 쳤다. 정치 책에서 엄마 카드가 등판할 줄이야. (정치 책이라면 마냥 딱딱할 거라고 생각한 내 편견도 한 몫 했다) 이어서 중앙이 시킨 짜장면 값은 짜장면 배달하는 지방이 내라는 소제목으로 박근혜 정부가 대통령 선거 공약을 낼 때부터 야심차게 추진한 무상 복지 정책 누리과정을 설명하기도 한다. 비유가 어쩜 이리 찰떡인지. 엄마 카드는 일단 긁고 보는 지방자치단체도 문제, 라는 표현은 그런 지방자치단체의 시정을 지켜보게 되었을 때 내가 빌려서 말하고 싶은 표현이 되었을 정도다.

 

세금, 정당, 선거, , 예산, 지방자치단체 등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심화과정을 통해 챕터를 마무리 짓는 것 또한 마음에 들었다. 세금의 심화과정에서는 창조주 위에 건물주 vs 민달팽이 신세 월세 난민에 대해 다뤘고, 지방자치단체의 심화과정에서는 중앙과 지방의 줄다리기, 청년수당 논란에 대해 다뤘다. 정치를 알고 싶어 하는, 뜻이 맞는 친구가 있다면 이 부분에 관해 기사를 찾아 읽고 토론하기 좋은 주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썰전에서 바로 지난주에 한 얘기가 일주일만에 상황이 뒤집혀서 (최근에는 북미정상회담이 그랬다) 그 문제에 대해 다른 관점으로 이야기 할 때가 종종 있는데, 책은 오죽할까. 이 한국 정당 당명 표를 만들 때만해도 바른미래당민주평화당은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 하루아침에 휙휙 변하는 것이 정치고, 세월이 흘러도 결코 변하지 않을 것 같았으나 점차 변화하는 것 또한 정치다. 후자는 이번 6.13 지방선거를 통해 배웠다. 그간 정치란 물 없이 고구마 백 개를 먹은 것처럼 답답하기만 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변하고 있다. 계속해서 지켜보지 못했으면 이 결과가 결코 와닿지 않았을 것이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저마다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때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해 5월을 눈물로 보내다가 추모 영상 속 노무현 전 대통령님의 이 말을 통해, 비로소 정치에 눈을 떴다. 매일 뉴스를 챙겨 보고, 썰전을 목요일의 소확행으로 삼고, 촛불시위에 참여하고, 투표는 빠짐없이 하는 유권자로 살고, 정치에 대해 보다 능동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었다. 겨우 그 뿐이지만, 이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중 · 고등학생들은 이런 나보다는 좀 더 밝게, 정치에 관심을 가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 책을 읽고 다소 부족한 이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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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
비프케 로렌츠 지음, 서유리 옮김 / 레드박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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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누구에게나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가 있다. 나의 경우에는 가장 가깝게 지난 화요일에 있었던 일인데,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이 내게 상처 되는 말을 하는 자리에서 어떤 반박도 하지 못하고 허허실실하며 앉아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받은 상처보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에 내내 우울해했다. 되돌릴 수 있다면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올 것이고, 가능하다면 지우고 싶은 기억. 이 기억을 지우고 나면 나는 우울하지 않은 한 주를 보낼 수 있었을까?

 

2.

여기, 그런 과거를 지우게 된 여자가 있습니다. 거침없는 성격에 제멋대로 사는 쾌락주의자 찰리. 부모님 몰래 대학을 때려치운 뒤 아르바이트를 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그녀는 첫사랑의 트라우마로 인해 서른 살 가까이 되도록 제대로 된 남자 친구를 사귄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과거의 저지른 창피하고 민망한 실수들 때문에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죠.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미스터리한 헤드헌팅 회사로부터 과거를 지워주겠다는 은밀한 제안을 받게 되고, 전혀 예상치 못한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는데…… 『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는 다시 돌아옵니다!

 

이 책 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출발 비디오 여행(feat.김경식) 영화 대 영화처럼 줄거리를 풀어보았다. 대체 어떤 흑역사를 만들었기에 찰리는 과거를 그다지도 지우고 싶었을까.

 

찰리에게 있어 지워버리고 싶은 사건 Worst 5를 소개하자면 이렇다.

첫 번째로, 옆집에 사는 절친 줄리의 남자 친구와 잔 일.

두 번째로, 유부남과 사귄 일. 그 남자에게는 심지어 애도 있었다. 그것도 쌍둥이.

세 번째로, 운전면허 시험 도중 속도 측정 장치를 들이받고 도망간 일.

네 번째로, 완전 취해서 자전거 타고 가다 넘어졌을 때 출동한 경찰한테 반항한 일 (“뭘 봐! 이 멍청한 짭새 새끼야!”했다)

다섯 번째로, 어떤 남자의 머리를 맥주병으로 내려친 일(그 남자가 몸을 더듬어서 그랬는데, 그 술집은 그날 이후 나를 출입 금지시켰다)

 

찰리는 여기에 마음의 소리를 저버리지 못하고 6개를 더 쓰는데, 음 확실히 지울만한 사건들이다. 찰리가 기억을 지워준다는 헤드헌팅 회사의 제안을 받기 전까지, 현재의 이야기가 꽤 나와서 새로운 인생은 어떨까 궁금했다.

 

3.

여기부터는 스...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찰리는 헤드헌팅 회사의 도움으로 흑역사를 지우는데 성공한다. 과거를 지운 찰리의 현재는 완벽해 보였다. ‘보였다라는 과거형으로 쓴 건, 흑역사를 쌓아온 찰리의 기억만큼은 찰리에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흑역사이긴 했어도 그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이 있었고, 들어온 음악이 있었으며, 느낄 수 있는 행복이 있었는데 그 기억들을 가지고 새로운 인생이라니.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찰리는 겉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보이지만, 속으로는 헛헛한 삶을 살게 된다. 영혼 없는 하루하루가 계속되고 찰리는 있는 그대로의 찰리를 바라봐주고, 찰리의 행복을 온전히 응원해주었던 드링크스&모어 사람들을 찾아 헤맨다.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을 때려치우고 개업한 드링크스&모어의 주인이자 찰리를 놀리는 재미로 사는 것 같은 팀과, 충격을 덜 받기 위해 늘 오래된 신문을 읽는 게오르크 아저씨. 인연은 인연인지 찰리는 새로운 인생에서도 둘을 만나는데,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둘을 대하는 찰리의 태도가 인상 깊었다. 이후의 이야기는 소설로 읽기를 권하고 싶은 마음에 생략한다.

 

4.

이쯤에서 다시 내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나 역시 지난 화요일의 과거를 지우게 되면 우울해하지 않게 될까? 이 소설대로 과거를 지운다면, 상처 받았던 기억은 남고 과거만 지우게 되는 것이니 나의 우울은 여전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상처 주는 말에 한 마디 받아치지 못하고, 속으로만 담아두다 우울해 하는 이 성격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앞으로도 이런 일들은 계속될 것이다.

 

그때마다 과거를 지우고 싶다, 하기 보다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책을 통해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을 배우고, 상처받은 나를 위로해주는 친구들을 만나서 훌훌 털어버리고, 이렇게 재밌는 책도 읽으면서 버티기로 했다. 흑역사로 가득했던 찰리의 지난날도 그저 어둡기만 한 건 아니었으니까. 찰리의 곁에는 좋은 사람이 있었고, 즐겨 들었던 음악이 있었고, 찰리 나름대로의 행복한 하루가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5.

여기서 끝내기 아쉬우니까 여담을 조금 풀어보자.

만약 이 소설을 영화화한다면 주인공 찰리는 마고 로비였으면 좋겠다. 다른 배우는 생각나지 않았다.

이 책의 저자 비프케 로렌츠는 샤를로테 루카스라는 필명으로 당신의 완벽한 1해피엔딩으로 만나요를 펴낸 작가였다. 아직 읽어보지 못했지만 제목을 들어본 책이었는데, 같은 사람이었다니. 두 권의 책을 읽어봐야겠다, 싶게 만들어준 책이었다.

이번 리커버 버전의 표지가 워낙 마음에 들어서, 들고 다니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이래서 리커버, 리커버 하는구나 했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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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천 할머니 스콜라 창작 그림책 59
정란희 지음, 양상용 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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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치의 만행이 극에 달했던 1944,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시체들을 처리하기 위한 비밀 작업단 존더코만도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가 있다. X자 표시가 된 작업복을 입고,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오직 시키는 대로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는 존더코만도 사울의 앞에 어린 아들의 주검이 도착한다. 처리해야 할 시체더미들 사이에서 아들을 빼낸 사울은 랍비를 찾아 제대로 된 장례를 치러주기로 결심한다.

 

그런 사울의 뒤를 따라 홀로코스트를 체험하게 하는 이 영화를 보고 나는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영화가 사울이라는 한 사람에게 집중한 것처럼, 기억이란 어쩌면 한 사람을 기억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 사람을 기억하게 만들어,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른 잊지 못할 역사와 그곳하게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을 기억하게 한다.’

 

사울은 어디까지나 허구의 인물이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난 후로 홀로코스트를 떠올리게 될 때면 나는 으레 사울부터 떠올리곤 했다.

 

 

2.

폭도들을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다 죽여 버려!”

어두운 밤, 마을에 들이닥친 토벌대는 총을 쏘기 시작했다. 아영의 가족은 그날 밤 토벌대를 피해 몸을 숨겨야만 했다. 누군가는 하얗게 뿜어져 나오는 입김을 감추려 검은 흙에 얼굴을 묻었고, 누군가는 들키지 않으려고 우는 아이의 입을 틀어막았다. 집이 불타고 있었음에도 누구 하나 불을 끄러 달려 나가지 못했다. 오늘 밤 마을이 불타 사라진다 해도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나았으니까. 그저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무사히 날이 새기만을 바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영은 집이 걱정 되었다. 엌에 있는 곡식 항아리가 아른거린 나머지 아영은 몸을 일으켜 집으로 뛰어 들었고, 소리를 잘 듣지 못하는 아영을 향해 아버지는 안 돼! 위험해!”하고 소리쳤다. 무사히 부엌에 들어가 곡식 항아리를 품에 안은 아영은, 담장을 빗기는 달빛이 마을 텃밭들을 밝게 비춘 그 순간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때 !’하고 총성이 울렸고, 아영의 얼굴은 거대한 쇠몽둥이에 휘둘려 맞은 듯 뒤로 확 꺾였다. 곡식 항아리가 저만치 날리며 퍽퍽 부서졌다. 와두두두, 곡식이 쏟아졌다. 아영이 턱을 잃은 밤이었다.

 

아영은 제주 4·3 중에 북제주군 한경면 판포리 집 앞에서 경찰이 무장대로 오인하여 쏜 총에 턱을 맞고 쓰러졌다. 총탄에 너덜너덜해진 턱을 가위로 잘라 내고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평생 약 없이는 견딜 수 없는 끔찍한 고통 속에 살았다. 흉측해진 얼굴을 하얀 무명천으로 가리고 외로움과 슬픔을 견뎌내야 했다. 턱을 잃어버려 말을 할 수도,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도 없었다. 간혹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게 될 때면 자신의 흉한 얼굴이 보일까 봐 몸을 돌리고 구석에서 혼자 먹어야 했던 나날들. 언니가 사는 월령리로 거처를 옮긴 후에도 밖에 잠깐이라도 나갈 때면 집 안의 모든 문을 자물쇠로 꼭꼭 잠가 두어야 마음을 놓았고, 끔찍한 고통과 아픔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홀로 외롭게 살다 하늘로 떠났다.

 

 

3.

이 책 무명천 할머니는 말을 할 수 없어 모로기(‘언어 장애인의 제주 방언)할망이라 불렸던 진아영 할머니의 이야기가 담긴 그림책이다. 어린이를 위한 창작 그림책 시리즈 <그림책 마을>에서 제주 4·3 사건 70주년을 맞이하여, 18번째 테마로 아이들에게 평화와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줄 수 있는 책을 준비했다고 한다. 그림책답게 마지막에 제주 4·3은 무엇이고, 왜 일어났고, 당시에 어떤 일이 있었으며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 설명해준다. 역사를 배우기 시작한 고학년을 비롯하여 제주 4·3을 처음 접하는 이에게 좋은 입문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앞서 이야기했듯 역사를 기억하는 일은, 어쩌면 한 사람을 기억하는 것에서 시작되기도 하니 말이다. 턱이 없어 고생했던 일보다, 그날의 참상을 평생 말하지 못하고 살아야 했던 아픔이 더 컸을 진아영 할머니의 삶은 내게 제주 4·3을 더욱 깊이 알고 싶게 했다.

 

때마침 KBS에서 지난 3일에 제주 4·3 사건 70주년 역사특강을 방송해줘서 챙겨보았다. 4·3을 배우기 위해 필요한 배경지식으로 시작해서, ‘제주 평화 기념관에 있는 백비(아무것도 새겨져 있지 않은 빈 비석)의 설명으로 마무리한 강의였다.

 

언젠가 이 비에 제주 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

 

아직도 정명(正名)되지 못한 아픈 역사. 설쌤의 마지막 말처럼 이제는 말할 수 있고, 추모할 수 있고, 이 비극을 함께 나눌 수 있다. 노랗고 빨갛고 푸르른, 찬란한 제주. 아름다운 섬으로만 기억하기보다는 슬프고 무섭더라도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아픈 역사도 함께 기억했으면 한다. 많은 사람을 기억하기 어렵다면, 한 사람을 기억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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