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톨로지 (스페셜 에디션, 양장) - 창조는 편집이다
김정운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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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기억되는 칼럼이 있다. 내게는 김정운 교수님의 한 칼럼이 그렇다. ‘내년에 오십인데라는 제목으로, 2010년의 글이다.

 

나는 수첩을 아주 자주 바꾼다. 조금 쓰다가도 지겨우면 바로 바꿔 버린다. 한달에 서너개 이상은 바꾸는 것 같다. 지금도 내 책상에는 처음 몇 쪽만 쓰다 만 수첩이 수십 종류다. 시내 큰 서점에 붙어 있는 문구점에 정기적으로 들러 새로운 디자인의 수첩을 찾아보는 게 내 취미다. 어쩌다 외국여행을 나가면 문방구를 파는 곳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거의 강박증 수준이다. 좀 한가한 어느 날, 내가 도대체 왜 이러는가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 한겨레 칼럼 [김정운의 남자에게] “내년에 오십인데” (2010.06.23.) 중에서

 

아주 자주 바꾸지는 않지만, 당시 내 책상에도 처음 몇 쪽만 쓰다 만 수첩이 적어도 열 손가락은 넘었으므로 나는 이어지는 글에 구미가 당겼다. 이 교수님이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고 이러나. 수첩을 자주 바꾸는 이유로, 교수님은 내 인생에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어서 그렇다고 썼다. 다다음 문단에 칼럼의 주제가 등장한다. ‘선택의 자유’. 내 삶의 의미는 내가 선택했는가 아닌가에 의해 결정된다는 이 이야기를, 나는 수첩을 볼 때마다 떠올리곤 한다.

 

8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몇 쪽만 쓰다 만 수첩을 끼고 사는 동안, 교수님은 4년만에 에디톨로지개정판을 출간하셨다. 창조란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며, 기존의 것들을 새롭게 재구성하는 데서 탄생한다는 에디톨로지’. 그 핵심을 오롯이 소화할 수 있게 쓰인 구판에 이어, 개정판에는 새로운 콘텐츠 생산과 관련된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자신의 편집 공간과 방법을 자세히 소개한 글이 함께 담겼다. 이 스폐셜 부록에 관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정말 많은데, 뒤로 미루고 일단 에디톨로지에 대해 이야기 해본다.

 

에디톨로지는 크게 3장으로 나누어 설명된다. 지식과 문화의 에디톨로지를 소개하는 1, 관점과 장소의 에디톨로지를 소개하는 2, 마음과 심리학의 에디톨로지를 소개하는 3.

 

1부에서는 ‘6 노트와 카드의 차이는 엄청나다는 꼭지가 가장 인상 깊었다. 한국 학생들은 노트를 독일 학생들은 카드를 쓴다는 글에서, 다음 카페와 네이버 지식인의 결정적 차이를 설명하는 글로 이어지는 이 글에서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독일 학생들의 카드 편집과 같은 주체적 지식을 편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꼭 엄청난 이론이 아니어도 아무 상관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관해 포스팅하고, 비슷한 관심을 가진 이들과 지식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한 블로거들의 세상이 열린 것이다. ‘재미 공동체(다음)’에서 지식 공동체(네이버)’로의 이동이다. (p.85)

 

내가 다음과 싸이월드보다 네이버를 좋아하는 이유를 이 책에서 발견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관해 포스팅하고, 비슷한 관심을 가진 이들과 지식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한 블로거. 공유하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편집해서 포스팅 할 수 있는 공간이기에 나는 블로그를 좋아한다. 10년간 블로거로 살아온데는 편집의 힘이 있었음을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2부에서는 ‘16 공간편집에 따라 인간의 심리는 달라진다는 꼭지가 가장 재밌었다. 내가 천장이 높은 카페를 좋아하는 이유를 여기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천장의 높이만 조금 더 높여도 창조적이 된다. 미네소타대학의 조안 마이어스-레비Joan Meyers-Lavy 교수는 천장 높이를 30센티미터 높일 때마다 사람들의 문제 해결 능력에 변화가 생기는 것을 발견했다. 공간의 형태에 따라 생각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천장이 높고, 넓은 공간에서는 사람들의 관점이 거시적이 되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잘 나온다. 반면 천장이 낮고, 좁은 공간에서는 사물을 꼼꼼하게 바라보게 되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는 경향을 보인다. (p.186-187)

 

머리를 쓰며 읽어야 하는 책을 읽거나, 서평을 쓸 일이 있을 때면 천장이 높은 카페가 생각나곤 하고 곧잘 찾아가는데 괜히 그런 게 아니었다. 우리가 문화 차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의 많은 부분은 공간 의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공간의 구조가 바뀌면 태도가 바뀐다. 출입문의 위치만 바뀌어도 사람들의 동선이 바뀌고, 공간 내의 상호작용 양상이 변화한다. 문화는 이렇게 아주 구체적으로 작동한다는 것. 관점과 장소에 대한 이야기가 이렇게 재밌을 수 있다니.

 

마지막 3부에서는 ‘24 천재는 태어나지 않는다 편집될 뿐이다꼭지를 소개하고 싶다. 모차르트를 두고 계몽주의 시대의 편집된 천재라고 설명하는데, 어쩐지 구미가 당겼다.

 

반면 모차르트의 사정은 많이 달랐다. 한편으로는 궁정 사회에서 인정받고, 재정적 후원을 받기 위해 귀족들의 주문에 맞춰 작곡해야 하는 수공업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한 실험을 통해 자신의 예술적 상상력을 마음대로 펼칠 수 있는 주체적 예술가로서의 삶을 끊임없이 시도했다. 이런 이중적 삶이 모차르트를 천재로 만들었다. (p.269)

 

이 구절을 읽기 전까지는 타고난 음악성만을 두고 천재라 부르는 줄 알았는데, 수공업자의 예술에서 그치지 않고 주체적 예술가로서의 삶을 끊임없이 시도했다는 데에서 그를 천재라 부른다는 것이 인상 깊었다. 천재는 한 사회에서 다른 사회로의 이행기에 집중해서 나타나는데, 표상으로서의 미술이 사진이라는 기계적 수단에 의해 위협받던 시대의 산물로 피카소라는 천재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에서 스티브 잡스라는 천재들이 나왔다는 것 역시 재밌었다.

 

 

 

에디톨로지에 대한 지식도 지식이지만, 책을 읽으면서 많이 배웠다.

 

빈곤한 보캐블러리거친 논리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글을 써서 먹고살 수 있는 이유는 생각해서 쓰는 게 아니라, 쓰면서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글은 이 서평을 생각해서 쓰는 게 아니라 쓰면서 생각할 수 있게 만들었다. 아날로그 책이 좋은 이유는 내 맘껏 쓸 수 있어서인데, 책을 정말 깨끗하게 보는 사람이 있다는 글도 나를 움직였다. ‘내 책은 내 맘대로 쓰기 위해 산 것인데, 중고책으로 되팔려고 책을 사는 게 아닌데 왜 책을 그렇게 깨끗이 보느냐고 혼나는 것만 같았다. 다행히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 않아서, 모처럼 책을 깨끗하게 보지 않았다. 형광펜으로 죽죽 줄도 긋고 연필로 밑줄도 긋고 볼펜으로 내 생각을 써 가며 읽었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메타인지meta-cognition’라고 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객관화하는 자기성찰과 밑줄 긋고 빈곳에 자기 생각을 적는 독서는 동일한 심리적 프로세스입니다. 저자의 생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활자화하는 작업을 통해 정말 많이 성장합니다. (p.350)

 

이와 더불어 에버노트앱을 애용한다는 이야기와 널찍한 모니터 두 개를 나란히 붙여 사용한다는 이야기, 유튜브 같은 영상자료를 수시로 본다는 이야기 등등 스폐셜 부록에 담긴 이야기들은 모조리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글은 마감이 쓴다는 359쪽은 부끄럽게도 이 서평을 쓰면서 실현중이다. 14일에 책을 받아서, 20일까지 서평을 쓰기란 꽤 어려운 도전이었지만 마감은 글을 완성할 것이다. 늘 그랬듯이.

 

이제 정말로 이 서평을 마무리할 때가 왔다. 10년간 블로그를 운영해오면서 매일, 매주, 매달, 매년 콘텐츠를 생산하고 있는 나로서는 콘텐츠 생산, 그 자체가 재미있어야 합니다!’는 꼭지가 사무치게 와 닿았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콘텐츠 생산 그 자체가 삶의 즐거움이 되어야 합니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지만, 돈을 많이 벌려고 혹은 권력이나 명성을 얻으려고 글쓰기를 한다면 절대 잘 될 수 없습니다. 글쓰기 자체에 기쁨을 느끼고, 자신이 생산한 콘텐츠 자체에 희열을 느껴야 합니다. 돈이나 명성은 추구한다고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돈이나 명성, 성공은 100퍼센트 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따라오면 좋은 거고, 안 따라오면 할 수 없는 겁니다. 내가 글쓰기를 하면서 재미있고 즐거웠다면 그 자체로 만족할 수 있는 겁니다. 스스로 재미있는 글을 쓴다면 내 콘텐츠에 공감해주는 독자들은 꼭 나타납니다. 아무리 적은 숫자라도 교감할 수 있는 것처럼 기쁜 일은 없습니다. (p.363-364)

 

 

 

글을 읽는 사람이 함께 호흡하려면 내 호흡이 경쾌해야 하고, 그래야 즐겁게 따라 읽을 수 있으니 짧게 쓰는 게 좋은 글이라고 하셨지만 편집의 실패로 글이 길어지고 말았다. 서평을 세 장 가까이 써버린 바람에, 아주 오래 기억될 것 같은 책이 있다. 내게는 김정운 교수님의 책 한 권이 그렇다. 20188월에 출간된 개정판으로, 책의 제목은 에디톨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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