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빌린다는 일은, 책을 읽을 시간을 내겠다고 다짐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 다짐에 비해 책 욕심만 어마어마한 나는, 빌려온 책을 전부 읽고 반납하는 일이 드물다.

오늘도 어김없이 '오늘은! 정말! 반납만! 하고 가야지!' 마음 먹고 들어갔지만,

반납기에 책을 반납하면서 눈은 신간 서가를 잽싸게 훑는다.

읽고 싶었던 책이 눈에 들고, 이 책이 들어오다니♥ 하고는 책에 절로 손을 뻗는다.

그렇게 나는, 나를 괴롭힌다.

빌려간 책을 쌓아놓고, 가방 여기저기에 챙겨다니지만 '시간이 없어서' 또는 '여유가 없어서' 하고 읽기를 외면한다.

제 욕심에 책을 빌려와놓고, 읽지 않고있는 책을 바라볼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다. 그 마음은 책을 반납할 때까지 계속된다.

그리고 책을 반납하러 간 날, 너무나도 익숙한 다짐을 하는 내가 도서관 앞에 서 있다.

'오늘은 정말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책만 빌려서 나오자' 하고 말이다.

오늘도 책을 한아름 안고 집으로 돌아오며 생각했다.

모든 책을 완독할 필요는 없고 그럴 재주도, 시간도 없으면서 이러는 이유는 대체 뭘까.

그 이유는 첫째, 빌려온 책들 가운데 내게 좋은 책이 있을 거라는 기대에 있다.

손 가는대로, 무심결에 빌려와 읽은 책 중에 좋은 책을 발견했던 경험이 반복되면서 학습된 것이다.
이번에도 분명 저 책들 중에 좋은 책이 있겠지 하는 기대.

안 빌려왔다면 모르겠지만, 빌려왔으니 그 기대를 저버릴 수 없는 것이다.

둘째, 이유랄 것도 없는 이유. 욕심 때문이다. 조금만 내려놓으면 되는데.

체력이 될 정도로, 시간이 될 정도로만 읽으면 되는데 싶다가도,

이렇게 읽어서는 발전할 수 없다는 조바심이 날 움직이게 한다.

정말 좋은 책 한 권을 만나는 일은, 야구선수가 홈런을 치는 일과 같다던 구절이 떠오른다.
'제 아무리 훌륭한 타자라도 전타석 홈런을 치기란 불가능하다.

홈런수를 늘리기 위해서는 먼저 스타팅 멤버로 나가서 타석에 서는 숫자를 늘릴 필요가 있다.' 라는 구절.

그 날은 이 구절이 정말 마음에 들었는데. 제 컨디션이 아니어서 그런지, 오늘은 삐딱한 마음을 먹고 조금 다르게 생각해본다.

'홈런'이 야구의 꽃임은 분명하지만, 어디 홈런만 야구의 꽃인가.

6-4-3 병살타가 빛날 때도 있고, 좌측 담장 앞에서 잡히는 희생타가 결승타가 될 때도 있으며,

발로 만든 진루가 그날 경기의 흐름을 가져올 때도 있다.

그러니, 홈런에만 눈이 멀어 나를 괴롭히지 말자. 타율에 집착하지 말고,

오늘도 타석에 설 수 있도록 자기 관리에도 힘 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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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소라 2016-04-09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제가 쓴 글인줄 알았습니다! 한아름 빌려오고, 다 못 읽고... 반납만 하자 해놓고 또 한아름 책을 안고 집에 오게 되는 건 멈출 수 없네요 ^^

해밀 2016-04-11 00:33   좋아요 0 | URL
책을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은 다 같은가봐요 :)

정말... 반납만 하자 해놓고 또 빌려와서 그걸 반복하는 건...제가 저를 못말리겠더라구요.ㅎㅎ
그건 아마도 그게 책이어서 그렇고, 책이어서 행복하다고 생각하지만요.^^

프레이야 2016-04-09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욕심은 좋은 것이지요^^

해밀 2016-04-11 00:34   좋아요 0 | URL
그쵸? 제가 가진 욕심 중에 제일 자랑스러운 욕심이랄까요 :)
프레이야님 말씀대로 책욕심은 좋은 것이죠♡
 
에세이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16기 마지막 신간 페이퍼를 쓰며, 4월의 문을 연다.

 

 

 

지난 글에, 누군가에게 선물할 책을 고르다보면, 책을 선물하는 그 시점의 내 심리상태가 파악되곤 한다고 쓴 적이 있다.

 

마스다 미리의 책에 빠져있을 땐, 어김없이 마스다 미리의 책을 골랐고

최근엔 아들러 심리학에 관련된 글이 담긴 라이팅북을 선물했다.

 

그럴 여유가 없다 하더라도, 책을 앞에 두고 조용히 손글씨를 쓰는 시간을 갖길 바랐다.

요즘의 내가 그러해서, 선물 역시 나의 심리를 피해갈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번 신간 페이퍼를 쓰려고 신간코너를 둘러보니

비단 책을 선물하는 일만이 아닌, 읽고 싶은 책을 고르는 것 역시 내 심리가 녹아든다는 생각이 든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나, 선호하는 출판사의 책이 아닌 지금의 내 심리가 손을 뻗는 책인 셈이다.

 

 

 

1. 사노 요코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격하게 솔직한 사노 요코의 근심 소멸 에세이'라는 부제가 참 마음에 들었다.

그녀의 또 다른 에세이 <사는게 뭐라고>와 함께 읽고 싶다.

이 책을 읽는 순간만큼은 근심에서 벗어나고 싶은 심리가 반영되어 이 책을 고르지 않았나 싶다.

 

 

 

2. 알랭 <알랭의 행복론>

 

 

 

<좋은글 대사전>에서 알랭의 글을 읽었나, 인스타그램에서 알랭의 글을 접했나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글이 참 좋았다. 좋았다면서 기록해두지 않는 내 모순을 뒤로하고, 이 책에 눈길이 갔다.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세상의 모든 방법을 읽는다고 해서

당장 내 인생이 행복해지는 건 아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마음 먹기 나름이 아닐까.

 

 

 

3. 최원호 <혼자가 되는 책들>

 

 

예술서 MD의 서평 에세이답게, 예술 서적에 관한 리뷰다.

 

제목도 제목이지만, 책 표지에 "모두 언젠가는 혼자가 될 것이다"라는 글이 마음에 들었다.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라는 제목이 참 좋았던 때가 있는데,

'모두 언젠가는 혼자가 될 것이다'에 더 마음이 가는 걸 보면

요즘의 내 심리가 이해가 가는 것이다.

 

 

 

4. 다나베 세이코 <여자는 허벅지>

 

 

지난 3월에, 재개봉한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다시 보고 왔다.

집에서 몇 번이나 다시 돌려봤던 영화였는데, 꼭 한 번 영화관에서 다시 보고 싶었다.

 

그런 작품의 원작 소설을 쓴 작가의 에세이라니, 궁금하지 않을 수가 있나.

 

 

 

5. 최현정 <빨강머리N>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원작 <빨강머리 앤>을 오마주한 책으로, 인생의 모든 희로애락을 담고 있다. 강하고 성숙한 어른이 되고 싶지만 아직은 나약한 아이로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혹은 꿈 많고 순수한 아이로 남고 싶지만 이미 현실과 타협한 어른이 되어버린 모두의 이야기를 말이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모습의 어른으로 성장했을까? 그리고 이 시대는 우리 마음에 드는가? 빨강머리N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대신 속 시원한 청량감을 선사한다. 위로의 말 한마디 없는데 이상하게 위로가 된다. 보고 있으면 재밌는데 보고 나선 눈물이 난다. 작가는 <빨강머리N>을 MSG 같은 책이라고 소개했고, 작가의 말대로 이 책 속에는 인생의 모든 맛이 담겨있다.

 

 

*

 

어차피 세상의 주인공이 되긴 글러먹은 인생,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다.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가 무려 5개나 되는 오달수처럼. 주인공에게 꽂혀야 할 시선을 강탈하는 라미란처럼. 나, 주인공이 되기 위해 발버둥 치는 대신 특별한 조연이 될 것이다. 기대하시라. 새로운 신 스틸러의 탄생을. _<신 스틸러> 중에서

 

 

 

다시 말해, 이 책은 '사이다'같은 책이다.

 

 너도 나도 고구마를 먹고 또 먹는 답답한 삶 속에서,

주인공이 되기 위해 발버둥 치는 대신 특별한 조연이 될 것이라 말하는 작가.

 

세상살이에 지친 어른아이의 취향? 아니다, 심장저격 에세이다.

 

신간평가단 책 선정의 무게(?)를 생각하면 이 책은

선택되지 않을 확률이 높으니, 미리 사 읽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책이기도.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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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컨드핸드 타임 -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최후 러시아 현대문학 시리즈 1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하은 옮김 / 이야기가있는집 / 201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때론 한 사람의 목소리가, 열 편의 글을 대신한다. 240일간의 세월호 유가족의 육성기록을 담은 책 금요일엔 돌아오렴이 그랬다.

 

학생들은 34일의 수학여행을 마치고 금요일에 돌아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배에 갇힌 일반인 승객들과 더불어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남겨진 가족들이 가닿을 수 없는 수백개의 금요일은 유가족의 생생한 인터뷰로 남아 하나의 기록이 되었다. 읽어내기 쉬운 책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완독해낸 건 목소리가 주는 힘 덕분이었고, 이 책을 기억하는 것 또한 목소리 덕분이라 생각한다.

 

2015,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며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세컨드핸드 타임또한 목소리로 이루어진 책이다. 아니, 목소리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목소리 소설이라는 독창적인 장르를 개척한 책이다.

책의 두께에 지레 겁먹은 나는, 이 책의 장르가 낯설다는 것을 핑계 삼아 책장에 꽂아두고 한참을 멀리했다. 뒤늦게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깨달았다. 장르가 아니라 이 책의 배경이 된 1990년대를 낯설어했음을. 동시에, 부끄러웠다. 얼마 전, 영화 <사울의 아들>을 봤을 때처럼. 나는 극히 일부를 알고 있었고, 어쩌면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 책을 다시 설명하자면 이렇다. 우리가 응답할 추억을 쌓아가던 1990년대. 정확히는 1991, 공산주의 체제 붕괴 이후 20년 동안 소비에트 사회의 변화와 사람들의 상실감,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 등의 정신적인 변화를 담아내고 있는 책. 나는 이 주제가 다소 어려워서, 이 책을 이렇게 읽기로 했다. ‘무엇에 대한책이라고.

 

독재의 아름다움과 시멘트에 박힌 나비의 비밀에 대해, 살인을 하는 사람들이 신을 위해 일한다고 믿고 있는 시대에 대해, 행복과 매우 닮은 외로움에 대해, 모두를 죽이고 싶다는 마음과 그 마음을 품었다는 생각만으로도 몸서리치는 사람들에 대해, 용감한 행동과 그 결과에 대해.

 

그들이 말하는 무엇에 대한이야기는 곧 그들의 일상이었고, 삶이었다. 1990년대에 그곳을 살아낸 평범한 사람들. 그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작가는 무려 1,0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을 인터뷰했다고 한다. 인터뷰 끝에, 작가에게 남은 목소리 하나하나. 그것을 그저 활자로 녹여낸 책이었다면 이 책은, 일부에서 평하는 것처럼 르포일 뿐이며 소설이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결과론이지만,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답게 알렉시예비치는 목소리를 그냥 옮기지 않았다. 소설가라는 자신의 본분을 최대한 살려, ‘목소리 소설을 구현해낸 것이다.

 

앞서, 때로 한 명의 목소리가 열 편의 글을 대신한다고 썼다. 이때 한 명의 목소리는 군더더기 없이 담백하다. 그렇지만 누군가의 말을 받아 적고 그것을 정리해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정성어린 손길로 다듬어지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렉시예비치는 묵묵히 그 길을 걸어왔고, 그 길은 앞으로도 계속되지 않을까 싶다. 그 끝엔 옛 소련도, 사회주의도, 희생도 아닌 사람이 있으니까.

 

영화 <사울의 아들> 리뷰에 이런 글을 썼다. ‘기억은 한 사람을 기억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책 세컨드핸드 타임에서는 크세니야-다니야 자매의 엄마를 기억하고 싶다. 200426, 모스크바 지하철 자모스크보레츠카야 선, 아프토자보드스카야 역과 파벨레츠카야 역 사이에서 테러가 자행되었던 그날, 그 악몽 같은 곳에 있었던 한 사람.

 

제 인생의 소원은 그 어떤 것 하나 이뤄진 것이 없어요.” (p.498)

 

전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제게 신앙이 있을까요? 잘 모르겠어요. 다만 누군가와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한번은 신부님이 설교를 하셨는데, 인간은 큰 고통을 만나게 되면 신에게 가까워지든지 아니면 오히려 멀어지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고 하셨어요. 인간이 만약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걸 선택한다 할지라도 그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그건 슬픔과 아픔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요. 그건 저에 대한 얘기였어요.” (p.503)

 

예전에 저는 제 안에 있는 것과 좀처럼 대화를 나누지 않았었죠. 그런데 전 지금 광산에서 사는 것처럼 살아요. 걱정하고 고민하고 늘 새로운 잡생각으로 저 자신을 괴롭히죠. ”엄마, 마음을 좀 감춰요!“ 아니, 사랑하는 내 딸들아, 난 말이지, 내 감정들이 내 눈물들이 그냥 이렇게 사라지는 건 원하지 않는단다. 흔적도 없이, 표시도 없이……. 전 그게 제일 큰 걱정거리예요. 제가 겪은 모든 일을 내 아이들에게만 남기고 싶지 않아요. 다른 사람에게도 이것을 전해서 이 일들이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으면 좋겠고, 그래서 원하는 사람들이 가져갈 수 있게끔 하고 싶어요.” (p504)

 

 

이 책이 내 품에 들어온 순간 알았다. 신간평가단 활동이 아니면, 읽을 엄두도 못 냈을 책이라고. 읽어내기 쉽지 않고, 글 쓰는 건 더 어려워서 결국 마감일을 넘겨서야 온전히 책장을 덮는다. 이 글을 쓰는 내내, 몇 번이고 인상 깊었던 목소리를 다시 찾아 읽었다.

 

보통 사람은 역사를 위해 살지 않아요. 그보다는 훨씬 단순하게 살아요.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집을 지으며 살아요.”

 

슬픔을 겪다 보니 좋은 일들을 잊고 살았어요. 우리도 젊었을 때는 사랑이란 걸 했는데 말이에요.”

 

그들을 기억하는 동시에, 내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역사를 위해 살지 않는 보통 사람인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슬픔을 겪다 보니 좋은 일들을 잊고 사는 건 아닌지.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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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는 계속 읽는다 - F. 스콧 피츠제럴드와 <위대한 개츠비>, 그리고 고전을 읽는 새로운 방법
모린 코리건 지음, 진영인 옮김 / 책세상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나의 개츠비는, 스무 살에 처음 만났다. 친구와 고전 문학을 읽기로 계획하고, 처음 읽은 책이 <위대한 개츠비>였다. 에드워드 호퍼의 간이 식당을 표지로 한 민음사판. ‘이게 그 유명하다는 <위대한 개츠비>구나. 어디 한 번 읽어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책은 줄거리를 쫓아가기 바빴고, 끝내 완독했지만 뿌듯하지 않았다. 이 책을 왜 그렇게 읽으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때는 그랬다.

 

F. 스콧 피츠제럴드와 위대한 개츠비, 그리고 고전을 읽는 새로운 방법을 알려주는 이 책 그래서 우리는 계속 읽는다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고등학생 때나 심지어 중학생 때(덜덜덜!) 우리가 이 책을 읽게 된다는 사실은 나쁜 소식이다. 그때 우리는 너무 어리고, 감정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고, 회한이 인생을 어떻게 일그러뜨리는지 알 길이 없다. (p.13)

 

중학생은 아니었지만, 고등학생의 티를 아직 벗지 못한 스무 살이었으므로 감정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고, 회한이 인생을 어떻게 일그러뜨리는지 알 길이 없었다.

어렴풋하게 개츠비를 이해한 건, KBS2 단막극 <위대한 계춘빈> 덕분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위대한 계춘빈>의 대본 속 기획의도덕분이었달까.

 

스무살 때, ‘고전문학의 이해라는 교양수업에서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1920년대 신생강대국인 미국의 현주소를 객관적으로 고발한 목가주의와 기계주의의 대립과 갈등을 잘 표현한 작품이라는 레포트를 썼다고 한다. A+을 받은 그 레포트가 여지껏 부끄러운 이유는, 그 책을 읽고나서 제일 먼저 든 생각 때문이었다. 그 생각은 바로 개츠비... 미친놈...’이었다고 한다.

   

다소 격한 표현이지만, ‘미친놈이라는 단어를 보면서 나는 개츠비를 어렴풋이 이해했다. 그렇다. 개츠비는 미친놈이었다. 위대한 모든 사람이 사랑에 미친 것은 아니겠지만, 사랑에 미친 사람이 위대할 수 있다는 생각을 들게 만들었던 개츠비. 책장을 덮으면 위대한 개츠비라는 제목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개츠비. 위대한 놈이다.

 

나를 비롯한 독자들은 개츠비를 읽으며 주인공이 사랑에 홀딱 빠진다는 점을 좋아하지만, 정작 이 소설은 신학에 대해서건 낭만적 사랑에 대해서건 시큰둥하다. 개츠비에는 신학 대신 우상 숭배가 나오고, 사랑 대신 타인에게 마냥 무릎 꿇는 자아가 등장한다. (p.34)

 

개츠비는 공허를 정면으로 응시한 최초의 현대 소설 가운데 한 편이지만, 높이 뛰어오르기 전에 멈춰버린다. 피츠제럴드가 예전에 버린 가톨릭 신앙과 그의 낭만적인 기질이 여전히 영향을 미친 탓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개츠비를 쓴 피츠제럴드. 개츠비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이름이다. 이 책의 부제에서는 개츠비보다 피츠제럴드가 먼저 언급되는데, 나는 다음 구절을 읽으면서 피츠제럴드를 새롭게 이해했다.

 

결국 피츠제럴드는 항상 원하기를 원한다. 그 기대에 부합하는 것이 없다 할지라도 말이다. 최종적으로 개츠비를 위대한 미국 소설이 될 만큼 가치 있는 작품으로 만든 것은 뭔가를 단언하고 싶어 하는, 피츠제럴드의 희미하지만 결국 살아남은 충동이었다. (p.35)

 

이 책을 쓴 문학 비평가 모린 코리건이 글을 잘 써서 그렇겠지만, ‘그 기대에 부합하는 것이 없다 할지라도 항상 원하기를 원하는피츠제럴드가 참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츠비는 그저 그 시대에 쓰였기 때문에, 비단 위대한 사랑 이야기인 소설은 아니기 때문에 가치 있는 작품이 아니라 뭔가를 단언하고 싶어 하는, 피츠제럴드의 희미하지만 결국 살아남은 충동이 있었기에 가치 있는 작품이라는 것이 정말이지 멋있다.

 

개츠비에 의한, 개츠비를 위한, 개츠비의 이야기인 동시에 피츠제럴드에 의한, 피츠제럴드를 위한, 피츠제럴드의 이야기인 이 책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그가 창조한 최고의 인물들은 들뜬 채로 인생이라는 물에 대책 없이 뛰어들고, 그다음엔 떠 있기 위해 싸워야 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1물 그리고 물, 어디에나’.

위대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열망하는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파괴하는 도시 뉴욕에 대해 이야기하는 2야망과 성공의 땅에서’.

이 소설을 사랑 이야기로 보고 강의하려는 게 아니다’. 적어도 오늘 밤은 아니라고, 자신은 이 소설을 아메리칸드림의 은밀한 썩은 부위를 들여다보는 누아르로 애기하고 싶다 말하는 3랩소디 인 누아르’.

할리우드가 그를 싸구려 글쟁이보다 약간 나은 존재로 취급했을 때조차도, 진지하게 자기 자신이 작가라고 생각했던 피츠제럴드에 대해 이야기하는 4중서부 싸구려 작가와 그의 걸작’.

그는 중요한 연구 대상이 되었고, 전기와 소설과 연극의 주제가 되었으며 그가 쓴 이야기는 수백만 관객을 대상으로 각색됐다. 오늘날 대학생들은 그의 책을 읽는다. 필독 도서이기 때문이 아니라 좋아하는 책이기 때문이라며 이야기하는 5물 위에 제 이름을 쓴 사람, 여기 잠들다’.

나이 들어 인생을 후회하는 독자들을 위한 개츠비가 있지만, 젊고 무모한 이들을 위한 개츠비도 있다며 이해하는 마지막 6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목차를 조금 길게 풀어놓은 것 같아 보인다. 부끄럽게도 정말 그렇지만, 그렇게 한데는 이유가 있다. 개츠비는 알아도 피츠제럴드가 낯설다면 나는 과감하게, 이 책을 뜯어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개츠비를 뉴욕 속 누아르로 읽었던 스무 살의 내게는, 야망과 성공의 땅에서 들려오는 랩소디 인 누아르가 잘 읽힐테고, 개츠비의 심화 과정인 피츠제럴드 읽기를 원하는 사람은 중서부 싸구려 작가와 그의 걸작이 와 닿을 것이다.

 

덕 중의 덕은 양덕이라고 했던가. 개츠비-피츠제럴드 덕질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던 멋진 책. 그 어떤 문장보다, 이 책의 제목이 된 개츠비의 마지막 문장을 덧붙여본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나아간다. 흐름을 거스르는 보트들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리면서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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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헤일, 시저!> 라이브톡 예매를 완료했다는 글에 덧글이 달렸다. 영화 보셨냐고, 어떠셨냐고.

 

2. 덧글이 달리기 전에 간단한 리뷰도 올리지 못했던 건 묘했기 때문이다.

재미는 있는데 마냥 재밌는 건 아니고, 어렵긴 한데 마냥 어려운 건 아니고. 잘 봤는데 뭐라 콕 집어 설명하기 어려운 영화.

 

3. 이 영화를 선택한 건 단순한 이유였다.

첫째, 라이브톡으로 선정된 영화였기 때문이고 둘째, 조지 클루니-스칼렛 요한슨-채닝 테이텀-틸다 스윈튼 등등 좋아라하는 배우들이 대거로 출연하는 영화였기 때문에.

코엔 형제와 그들의 영화에 대해 잘 알았으면, 설레는 플러스 알파가 됐을텐데 하고 아쉬워했다. 지금껏 코엔 형제표 영화를 어떻게 한 편도 안 보고 살았나 싶었다.

 

4. 영화는 1950,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한다. 시나리오도 있고, 돈도 있는데 주연 배우가 사라진 비상상황. 정체불명의 미래로부터 주연 배우 베어드 휘트록(조지 클루니)을 납치했으니, 돈을 준비하라는 협박 메시지가 도착한다. 그렇게 영화 <헤일, 시저!>의 제작이 무산될 위기에 처한다. 영화사 캐피틀 픽쳐스의 대표이자, 어떤 사건사고도 신속하게 처리하는 해결사 에디 매닉스는 할리우드 베테랑들과 함께 일촉즉발 스캔들을 해결할 개봉수사작전을 계획한다.

 

조슈 브롤린이 연기하는 에디 매닉스와, 조지 클루니가 연기하는 베어드 휘트록을 비롯해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그 당시 할리우드의 실제 인물을 모델 삼아 만든 캐릭터이고, 영화에서 다루는 사건 역시 실제 사건을 레퍼런스 삼았다고 한다. 누가 누구고, 이 사건이 어떤 사건인지 알고 보면 확실히 더 재미있겠다 싶었다.

 

라이브톡에서 동진님의 해설이 끝나고, 한 관객분이 질문을 하셨다. 그 당시 할리우드를 모르는 사람이 이 영화를 보면 어렵고, 덜 재미있지 않겠느냐고. 동진님의 답은 아니오였다. 영화 속 레퍼런스는 비단 이 영화만 있는 게 아니며, 레퍼런스를 모른다고 해도 우리가 영화를 즐기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고. 이 이야기를 하시면서 영화 <빅쇼트>를 언급하셨다. 금융 시장 관련 용어를 모르고 본다고 해서, <빅쇼트>를 재미없게 보는 것은 아니지 않냐며. 물론, 알고 보면 더 재미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ㅎㅎ

 

영화 속 <헤일, 시저!><벤허>로 대표되는 성서 영화다. 성서 영화는 물론, 1950년대의 할리우드에 대해서도 까막눈이었지만 재밌게 봤다. 할리우드의 전성기였던 저 당시엔 영화를 저렇게 만들었고, 저런 장르의 영화가 있었고, 배우는 그 장르에 맞게 연기를 했겠구나 지켜보는 재미가 있달까.

부산한 할리우드 제작 현장에서 영화사 대표 에디가 날고 뛰는, 하루 동안의 이야기. 그 속에서, 비중에 상관없이 제 몫을 다 해내는 배우들의 면면 역시 이 영화의 매력 중 하나다.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은 역시 에디. 일에 대한 그의 고뇌가 영화를 보는 내내 인상 깊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영화사를 휘청이게 만드는 사건 사고 가운데서,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다 해내는 에디. 쉬운 일과 옳은 일의 기로에서 할리우드에 남아 영화를 만들어가겠다는 옳은 일을 택한 그를 보고 있으면 훈훈했다. 그리고 이 영화의 끝에, 영화에 대한 코엔 형제의 사랑이 있다. 지극하고, 따뜻한 사랑. 이 영화에 대한 동진님의 평이 떠오른다. ‘고전 헐리웃 영화에 보내는 코엔형제의 연서라는 평. 맞다. 그 때의 할리우드에 연애편지를 보낸다면 분명 이 영화와 같을 것이다. 한 자 한 자 마음을 담아 써내려간 연애편지처럼, 영화를 만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눈을 맞추는 영화. 묘했지만, 뜻깊은 영화였다.

 

 

reference

1. (에 대해) 말하기, 언급; 언급 대상, 언급한 것

2. (정보를 얻기 위해) 찾아봄, 참고,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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