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 - 용산 걸어본다 1
이광호 지음 / 난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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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용산이어야 했나? 나날의 삶을 통해 잘 알고 있는 지역이기도 때문이겠지만, 용산이라는 모더니티의 참혹함과 혼종성에 이끌렸을 것이다. 용산의 순결할 수 없는 시간과 장소들은 사회적인 시간과 신체의 감각이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서울이라는 도시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는 먼 과거의 것들을 보존하려는 당위와 노력에 비해 가까운 과거인 근대의 기억들은 잊으려 한다는 것이다. (p.7)

용산은 애써 지우고 싶은 식민과 이식의 역사와 모욕과 단절의 시간이 폭력적인 개발을 호출하는 기이한 장소이다. 불균등한 시간들이 어지럽게 교차하면서 일상적 우울과 권태로 뒤섞일 때, 용산의 '과도한 산문성'이 만들어진다. (p.7)

어떤 장소는 기억 너머에 있고, 어떤 장소는 기억 이전에 있다. 영감을 주는 특별한 장소 같은 것이 있다고 믿기 힘들다. 가보지 못한 장소와 지나친 장소, 차마 지나치지 못한 장소가 있을 뿐이다. 멀리서 보면 장소는 무심하고 자명하며, 가까이서 보면 장소는 비밀스럽고 남루하다. 생의 매 순간과 우울과 설렘 속에 자리잡은 특별한 장소가 있을 것이다. 평범한 장소가 문득 지울 수 없는 뉘앙스로 마음에 새겨질 수 있다. 익숙한 풍경이 낯선 시선 속에서 특별한 장소로 전환되는 그런 순간. 하지만 그 순간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으며, 그 순간에 대한 기억은 어떻게 보존될 수 있을까? 무감한 시간들을 견딜 수 있는 고유한 장소가 남아 있을까? (p.10-11)

단절과 망각의 형식. 이곳은 또한 망각의 도시다. 이 도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거리와 거리를 오가는 무감한 발걸음들은 알지 못한다. 효창공원과 이태원과 남일당에 이르기까지 장소의 기억을 소환하는 일은 무언가를 걸어야 하는 일이다. 이곳에서는 그 기억들을 지우기 위한 모든 가능한 일들이 벌어진다. 거리의 무기력한 풍경과 빌딩들의 부주의한 스카이라인과 작고 초라한 가게들과 골목 안의 오래된 그림자는 눈을 감았다 뜨면 마법처럼 달라진다. 거대한 담이 사라지거나 누추한 집들이 매끈한 콘크리트로 뒤덮이거나, 지우고 싶은 장소들은 텅 빈 공간이 되어버릴 것이다. 기억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치려는 이 현기증나는 속도들. 시간은 절대 머뭇거리지 않으며 장소는 침묵하고 망각은 사람의 일이다. 그들의 기억이거나, 너의 기억이거나, 나의 기억이거나, 혹은 우리의 기억이거나. 살아 있다는 것은 기억이 남아 있거나 혹은 기억이 사라져간다는 것. 기억은 완전할 수 없기 때문에 언제나 미지의 가능성이다. (p.14-15)

참혹한 기억이 생생해서 아침햇살이 지옥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황홀했던 시간의 세부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늙어가는 것이 문득 두려워질 것이다. 기억은 나의 시간에서 빠져나와 너의 미래로 흘러간다. (p.15)

나는 기다림 이전에 있고, 너는 기다림 너머에 있다. 기다림을 넘지 않으면 너에게 갈 수 없다. (p.16)

깊이가 사라진 풍경, 매력을 뿜어내지 않는 건물들은 사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거리의 오래된 혼란과 망각을 견디기 위해 거기에 서 있다. (p.21)

삼각지 쪽에서 철길을 가로질러 집 쪽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삼각지 고가로 올라가는 위태로운 육교를 올라야 한다. 육교는 고가를 따라 건너야 하기 때문에 지루할 만큼 길었고, 계단은 공사로 인해 위태로울 때도 있었다. 허공을 향해 올라가는 것 같은 가파른 계단. 그런 위태로운 육교를 걸어간 적이 있을 것이다. 그 시간이 얼마나 위태로웠는지 오랜 후에 알게 된다. 매 순간의 위태로움에 대해 알지 못하다가, 어느 날 내게 들이닥쳤던 위험한 시간들을 한꺼번에 마주하게 될 때.

어떤 예감에도 불구하고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는 측면에서 삶은 매 순간 재앙이다. 삶에 대한 전지적 관점이란 오만이거나 기만이다. 너에게 할 수 없는 말들이 마음속에서 저 혼자 죽어갔다. (p.22-23)

익숙한 무기력을 견디는 방식. 고요하고 작은 걸음걸이, 바람도 우울도 비껴가는 걸음걸이, 기계적이고 무심한 작업, 되도록 시간을 지키려는 일 인분의 식사 같은 것들. (p.27)

아이들은 순수하다기보다는 무심하며 다만 최선을 다해 놀고 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자기들이 방금 타고 놀았던 그네에서 몸이 빠져나왔을 때 아직 흔들리고 있는 그네의 움직임, 자기 몸 뒤에 남아 있는 시간들에 대해 무감할 수 있음에 대해. 저들이 결국 겪게 될 어긋난 시간, 그 몸 뒤의 시간들을 결국 깨닫게 될 거라는 뼈아픈 상상. (p.28)

그 시절의 허영과 부주의에 대해서는 어떤 자기 연민도 허락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p.28)

장소의 의미를 둘러싼 싸움은 기억에 대한 투쟁이다. 역사의 승자들이 가장 먼저 하는 것은 기억을 다시 세우는 일이지만 억압된 기억은 긴 우회를 거쳐 언젠가 유령의 얼굴로 귀환한다. (p.32)

청파동 골목길은 회화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깨끗하고 우아한 풍경과는 거리가 멀지만, 어떤 계획도 없이 시간과 우연과 왜곡이 만들어낸 휘어진 골목길들은 돌발적인 아름다움을 만든다. 이곳에서 풍경의 원근법은 무의미하며, 예기치 않은 굴곡과 방치의 시간이 흐른다. (p.35)

절대로 닿을 수 없을 만큼 누군가와 떨어져 있다면, 죽음처럼 건너갈 수 없는 곳에 누군가가 있다면, 너는 다른 시간 속에 있는 것이다. 아득한 거리는 아득한 시간이다. (p.37)

봄의 시제는 가정법이다. 봄은 언제나 '봄이 오면'이라는 시간대로부터 다가온다. 봄은 만질 수 없는 꿈처럼 오는 것이다. 눈부신 것은 봄이 아니라 봄의 불가능함이다. 상냥하고 뼈아픈 계절, 날카로운 소망이 만들어낸 부재의 장소, 세상에 없을 익명의 시간.

완전한 아름다움이란 곧 파괴될 어떤 것이다. 어느 날의 너처럼. (p.72)

어떤 장소가 제의적인 공간이 되는 것은 우연에 기댄 것이다. 스쳐지나가던 골목길과 육교와 작은 공원과 카페가 어느 순간 가벼운 마음으로 지나치지 못하는 장소가 되는 순간이 온다. 그 순간이 만들어지는 것은 오로지 사람의 의지는 아니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만드는 것은 우연이라는 이름의 사소한 운명들이다. 그 우연들에 운명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겠지만, 어떤 우연들은 삶을 일거에 다른 시간으로 돌려놓고 되돌아오지 못하게 만든다. 그 우연들의 의미를 찾아낸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삶은 피할 수 없이 잔혹해 보인다. (중략) 그 봄날이 몇 번이나 지난 뒤에도 눈 오는 날 그 곳을 찾아가 한참 동안 혼잣말을 하거나 무언가를 눈 속에 묻거나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짧은 대화를 나누는 사람. 혼자만의 비밀스런 의례를 치르는 사람은 그 장소의 주인이 아니라, 그 장소에 찔린 자이다. 장소는 긴 애도의 자리가 된다. (p.72-73)

어떤 장소에서 벗어난다 하더라도 그곳의 시간으로부터는 벗어날 수 없다. 너의 장소를 벗어난다 해도 너의 부재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p.89)

모델하우스의 내부에는 깨끗한 가구와 생활용품들이 배치되어 있고, 가구 안에는 세련되고 깨끗한 의복까지 걸려 있다. (중략) 이 가상공간에서 유일하게 실제적이어서 남루한 것은 구경하러 온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삶 자체이다. 일상적 삶의 공간이 이렇게 완벽할 수 있다는 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p.89)

대규모 가게나 주차시설조차 없는 경리단길을 걷는 것은 의식적인 외출이라기보다는 우연한 산책에 가깝다. 이 거리는 이태원의 피로감이 만들어낸 무심함의 형식이다. 어두워지면 이태원은 맹목적인 열기로 가득하지만, 이 거리에서는 부드러운 일몰의 사소한 충고를 들을 수 있다. (p.92)

습관적으로 무심하게 여기를 이태원이라고 부를 때, 그 이름 안의 참혹한 시간들을 다 불러낼 수 있을까? 차마 불러내지 못하는 시간의 이름들.

너의 이름은 뼈아픈 비밀과 같고, 나는 결코 '너'라는 단 하나의 이름에 닿을 수 없다. 너의 영혼과 삶을 정확하게 요악하는 이름은 없다. 이름은 불가능하지만, 또한 불가피하다. 너에게 꼭 어울리는 이름은 없다. (p.93)

이곳의 식당들이 주는 매혹의 핵심은 '오리지널'의 맛과 스타일에 유사하다는 것, 한국화되지 않은 본토의 맛을 보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태원은 결코 '오리지널'이 될 수 없는 곳이다. 이곳은 오리지널 이전에 있거나 오리지널 이후에 있는 곳. 그 기이한 활기, 다양성의 과잉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뉴욕이나 홍콩이 될 수 없다. (p.98)

여행객이란 그런 것이다. 누군가가 장소의 스토리를 말해주기 전에는 그 장소의 의미를 알 수 없으며, 그 장소의 의미는 여행객의 시선 앞에 한없이 가벼워지거나 무화된다. 이태원에서는 모든 사람이 여행객이 된다. 외국인이든 내국인이든 이 거리는 여행객의 거리다. 여행의 시작은 알 수 있지만 아무도 그 여행의 끝을 알지 못한다. 어떤 시간도 완전히 수습되지않은 채 어느 순간 닫힐 수도 있는 길, 끝없이 도착이 연기되는 길의 시간을 여행이라고 할수 있을까?

어쩔 수 없는 오인과 참혹한 우연으로서의 생은 결국 전모를 다 알기도 전에 불현듯 마감될 것이다. 이번 생의 여행이 어떤 장면에서 멈추게 될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은 비밀로 남게 된다. (p.98-99)

이 거리는 낙원인가? 어쩌면 모든 것이 허락되는 인공낙원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스타일의 접합과 스타일의 과잉은 탐닉의 너머에서 이 매력적인 물질과 육체와 공간의 무가치함을 역설적으로 전시한다. 이 낙원은 지상의 낙원이기 때문에 여전히 허구적이고 피상적이며, 사람들은 그 낙원의 공기를 하룻밤 호흡하고 상투적인 귀가를 해야만 한다.

다른 삶의 기미를 만날 수 있지만, 다른 삶은 결코 시작되지 않는다. (p.102)

작은 맛집이 대형 체인점이 되면 장소와 얽혀 있는 하나의 미각은 개별성을 상실한다. 어떤 음식은 아직 한 시절의 감각을 보존하고 있지만 또 어떤 음식은 너무 쉽게 한 시절의 질감을 무화시킨다.

멀리서 보면 삶의 궤도는 결국 어긋나 있고 실재적인 것은 삶의 세부뿐이지만 세부는 보존되지도 기억되지도 않는다. 이 세계의 속도와 허위를 견뎌야 할 것이다. 나 자신을 견디고 있는 것처럼. (p.135)

하늘에서 죽는 새는 없다는 것, 결국 땅으로 내려와 죽어야 한다는 것을 일찍 알았다. 어린 날 조류의 어떤 깊이도 없는 눈을 두려워한 것이 그것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p.137)

불안을 감추기 위해 어두운 공원에 숨어 중얼거리는 사람은 얼핏 스치는 뒷모습에 말을 건넨다. 모든 뒷모습이 너의 것처럼 보일 때, 결국 그게 자신의 뒷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p.142)

거대한 개발의 풍문으로 들떠 있는 이곳이 애도의 장소가 되기는 힘들 것이다. 살아남은 자들에게 애도의 지속을 허락하지 않는 곳은 살 만한 세계가 아니다. (p.144)

잘 지내느냐고 차마 묻지도 못할 것이다. '그날'로부터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 것처럼. 저 캄캄한 시간에 대해 한순간도 등을 돌리지 못하는 것처럼. (p.144)

망루에 오르는 것은 무언가를 걸어야 하는 일이다. 망루 위에서 맞이하는 시간이란 언제 아래로 다시 내려갈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시간, 바람이 몰려오는 칼날 위에 서 있는 것, 결국은 혼자만의 망루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 더 갈 데가 없는 시간이다.

망루에 올랐던 사람들은 그 방법 외에 말할 수 있는 길이 없었으며, 경찰관들은 그 작전의 부당성을 말할 입을 갖지 못했다. 이 끔찍한 침묵에 대해 이 공터가 말하는 것은 없다. 시간이 지나 결국 이곳에 높고 아름다운 건물이 세워진다고 해도 이 두려운 침묵은 그 건물을 지탱하는 철근 마디마디에 새겨질 것이다. 그 침묵들은 자라나서 더 큰 침묵에게 다가가 그것을 뒤흔들 것이다. 남일당은 용산 재개발의 종착지이면서, 이곳에서 벌어진 참혹한 근대화와 150년 전부터 시작된 '식민'의 마지막 장면이다. 진출과 개발이라는 이름 뒤의 무서운 비밀들. 모든 참혹한 길들이 여기로 모여들어 오래고 두려운 비밀에 대해 숙덕거릴 것이다.
모든 죽음은 제각각의 이유로 자연스럽지 않다. 죽음을 설명하지 못하면 삶은 추악해진다. 너의 부재를 설명하지 못하면 나는 무의미하다. (p.145)

끊임없이 무언가를 세우지 않으면 안되는 자본의 주술은 여전히 용산을 지배한다. 개발이라는 이름 자체가 거대한 거짓말이라면, 이 땅이야말로 가장 오래면서 가장 새롭고 거대한 거짓말의 장소였으니까. 남일당에 대한 애도, 이 오래고 끈질긴 거짓말에 대한 애도.

애도는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기다림이다. 나는 너라는 부재 속에 대기한다. (p.148-149)

어떤 지독한 기억은 이 생애가 끝날 때까지 지워지지 않을 것 같지만 반드시 망각의 순간이 도래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가장 아름답고 참혹한 얼굴도 마침내 지워지는 시간이 올 것이다. 하지만 그 최후의 순간에도 망각은 그 시간이 있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거한다. '너를 잊게 된다는 것'은 '네가 있었다는 것'에 대한 증명이다.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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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리곰 2014-11-05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밑줄을 참 많이도 그어 놓으셨어요 ㅎㅎ (사실 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