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듣고 있으면 순간과 현재를 느끼게 된다. 좋은 음악은 시간을 붙든다. 현재를 정지시키고 순간을 몸에다 각인한다. -1쪽
채소에 소금을 치면 샐러드가 되듯, 날씨에 노래를 쳐야 비로소 계절이 되는 것 같다. 노래가 없었다면 우리의 계절은 훨씬 흐리멍텅했을 것이다. 봄꽃은 덜 아름다웠을 것이고, 여름은 덜 더웠을 것이며, 가을은 덜 외로웠을 것이고, 겨울은 덜 추웠을 것이다. -3쪽
내가 좋아하는 보컬은 대부분 '무심한 목소리'이다. 이게 참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데, 감정이 없다기보다는, 옳고 그른 것이나 좋고 나쁜 것에 경계를 두지 않는 목소리라고 해야 할까, 자신의 감정을 애써 설명하려고 하기보다는 그냥 던져주고 멀리서 바라보는 목소리라고 해야 할까. -38쪽
봄은 혼자 있기 좋은 계절이고 혼자 걷기 좋은 계절이다. 봄은 순식간에 바스라진다. 시작했나 싶으면 곧 엔딩이다. 누군가와 함께 즐겨야지 마음먹었다가는 어느새 지나가버리고 만다. 그럴 때 음악은 친구가 되어준다. 나와 함께 묵묵히 걷는다. 시간을 함께 붙잡아주고 계절을 잘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이것도 음악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겠지. -43쪽
음악과 계절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계절은 음악의 스피커카 되어 소리를 더 잘 들리게 하고, 음악은 계절의 공기가 되어 향기를 더 잘 맡을 수 있도록 해준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고, 태풍이 몰아치면 늘 듣던 음악이 다르게 들린다. -53쪽
필사적으로 음악을 들었던 시절을 생각하면 어쩐지 부끄럽고 웃음이 나지만 그게 또 나였다는 걸 인정하고 싶다. 어떤 친구는 집안을 살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공부를 했고, 어떤 친구는 필사적으로 여자들의 꽁무니를 쫓아다녔으며, 나 같은 녀석은 현실을 잊어버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음악을 들었다. 그건 부끄럽다기보다 애달픈 일이었다. 이제는 조금 여유만만해졌지만, 필사적인 시절을 보내지 않았으면 이런 날이 오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69쪽
그럴 땐 소설 속의 시간이 참으로 신기하다. 내게 현재였던 소설 속 시간이 독자들에게는 오지 않은 미래이고, 독자들이 책을 읽을 때의 현재가 내게는 이미 오래전에 끝이 난 과거이고, 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에게는 내 소설 속의 시간은 끝내 오지 않을 미래이다. 우리는 같은 시간 속에서 다른 시간을 사는 것이다. -84쪽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쉼표가 없으면 안된다. 쉬지 않으면 쉽게 질리고 만다. 최고의 문장 100개가 모조리 연결되어 있으면 그 어떤 문장도 빛이 나지 않는다. 쉬어가는 문장, 쓸데없는 문장 같은 문장이 조금씩 섞여 있어야 좋은 문장이 더 빛나게 마련이다. -87쪽
스무살 때는 이해를 믿지 않았다. 누가 누군가를 이해했다는 말, 누군가 나를 이해한다는 말, 내가 누군가를 이해한 것 같다는 생각이 모두 거짓이라 생각했다. 모든 관계가 가식적으로 보였고, 사람들의 모든 웃음은 비웃음처럼 들렸고, 사람들이 드러내는 슬픔은 과도해보였다. (중략) 마흔이 넘은 지금도 이해를 믿지는 않는다.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는 있지만 이해할 수는 없다. 결론을 여전하다. '이해'라는 단어는 언젠가 완료될 수 있는 명사가 아니라 영원히 진행할 수밖에 없는 동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우리는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 있지만 이해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아래 계속)-93쪽
여전히 결론은 마찬가지지만 바뀐 건 많다. 십대의 나는 아무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고 단정 지었지만 사십대의 나는 사람과 사람이 서로 이해하려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위로'라는 단어를 새롭게 알게 됐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위로할 수는 있다. 사람이 사람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따뜻한 행동이 위로라고 생각한다. 위로는 죽으려는 한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모든 것에 환멸을 느낀 한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도 있다. 우리는 누군가의 마음을 완전히 알지 못해도 위로할 수 있다. 나는 '위로'라는 단어가 마음에 든다. '위로'의 '로'는 애쓴다는 뜻이다. -93~94쪽
방 안에서 누군가 울고 있다. 그에게는 위로가 필요하다. 어떤 예술가는 방 안으로 직접 들어가서 눈물을 닦아주고 그의 등을 토닥인다. 어떤 예술가는 방 안으로 들어가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어떤 예술가는 방 안으로 들어가서 그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떤 예술가는 방 안으로 들어가서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 체온을 느끼게 해준다. 어떤 예술가는 방 안으로 들어가지 않지만 바깥에서 이렇게 외친다. "놀자!" 나는 아직까지 방 안으로 들어갈 자신이 없어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등을 토닥여줄 자신이 없어서 밖에서 같이 놀자고 소리를 지르는 쪽이다. 언젠가 나도 방 안으로 들어갈 때가 있겠지만 아직은 밖에서 불러내는 쪽이 마음 편하다. 울고 있는 게 마음 아프지만 바깥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95쪽
피처링 소설이란 걸 쓰려고 한 적이 있었다. 두번째 소설집을 낸 2008년쯤이었는데 뭔가 새로운 걸 해보고 싶어서 온몸을 배배 꼬던 시절이었다. 설탕을 잔뜩 묻힌 굵직한 꽈배기를 생각하면 그게 딱 나였다. 피처링 소설이란, 힙합곡을 만들 때처럼 내가 소설의 주요 부분을 다 쓰고 동료 작가들에게 부분적인 참여를 부탁하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재미날 것 같았다. 웃긴 대사에 일가견이 있는 작가에게 몇 개의 대화를 부탁한다든지, 잔인한 묘사를 잘하는 작가에게 사람 죽이는 장면을 부탁한다든지, 옷차림을 상세히 묘사하기로 유명한 작가에게 등장인물의 모든 패션을 부탁한다든지...-125쪽
30년 넘게 음악을 들어오면서 내가 깨달은 게 있다면 내가 좋아했고 좋아하는 노래는 반드시 셋 중 하나에 속한다는 거다. 듣는 순간 내 주위의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게 되는 노래가 있는가 하면 때로는 듣는 선율이 만들어내는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눈을 감게 되는 노래가 있고, 어떤 때는 듣는 순간 먼 곳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게 되는 노래가 있다. 첫 번째를 근시음악이라 부르며 두번째를 투시음악이라 하고, 세 번째는 원시음악이라고 한다, 고 (누구 맘대로?) 내 맘대로 정했다. 하지만 노래 대신 가수가 또렷하게 보이는 노래는 절대 좋아할 수 없다. -135쪽
외로움이라는 것은 아마도 사라지는 것들을 그리워하는 감정일 것이다. 시작부터 끝까지 혼자라면 절대 알 수 없을 감정,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영토를 줄여본 사람이 아니라면 알 수 없을 감정, 함께하는 순간이 영원하길 바라지만 결코 그게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의 감정이 바로 외로움일 것이다. (중략) 외로움이 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찾아가자. 그게 훨씬 덜 아프다. 외롭지 않다고 자신을 세뇌하다가 어이 없는 한 방에 무너지지 말고 우리가 먼저 찾아가자. -152쪽
흘러나오는 곡들이 싫으면서도 좋았다. 좋으면서도 싫었다. 옛 노래라서 싫다가 추억이 묻은 노래들이어서 좋았고, 따라부를 수 있어서 좋았고, 너무 많이 들은 노래들이라서 지겨웠다. 한창 예민하던 시절에 들었던 노래들, 수많은 일들이 일어날 때 들었던 노래들이다. 지난 시절도 마찬가지겠지. 좋으면서 지겹고, 싫으면서 그립겠지. 우리는 노래를 듣다가 조금 지친 것 같다. 올림픽대로와 강변북로를 피해 이리저리 돌아 홍대 근처에 왔을 때 9시가 넘어 있었다. 사방이 어두웠다. 상암동 방면에서 쭉 뻗은 도로를 따라 홍대로 가는데, 갑자기 먼 하늘에서 폭죽이 터졌다. 불꽃놀이의 폭죽이 아름답게 하늘로 번져나갔다. 연이어 두 발이 펑, 펑 터졌고 곧이어 한 발이 터졌다. 아름다웠다. 모두들 소리를 지르면서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은 다시 어두워졌다. 그날 12만 발의 불꽃 중 우리가 본 것은 세 발뿐이었다. 우리는 하늘을 계속 보았지만 더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 -155쪽
여름이 가고 가을이 되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 아니라 음악의 계절이다. 가을엔 (책 따위에) 눈을 뺏겨서는 안 된다. 자연의 모든 색이 얼마나 아름다운데, 밤이 오기 전의 노을처럼 곧 겨울이 되어 색을 잃어버릴 것들이 얼마나 처절하게 자기 빛을 발하고 있는데, 하늘은 얼마나 파랗고 나무들은 얼마나 선명한데, 책 같은 거 보지 말고 두 눈 똑바로 뜨고 이 가을을 보아야 한다. 모든 음악은 가을이 되면 실용음악이 된다. '실용음악학과'라는 학과 이름을 들을 때마다 참 기묘하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그럼 뭐야, 실용 음악의 반대는 무용음악인가?) 가을이 되면 실용음악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음악은 귓속으로 들어와 가을의 모든 빛을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 음악을 들으며 풍경을 바라보면 빨래 세제 광고처럼 '흰 색은 더욱 희게, 색깔은 선명하게' 보인다. 보내도 가지 않던 여름이 가고, 보내고 싶지 않은 가을이 왔다. 바람이 완전, 음악이다. -185쪽
겨울 내내 감기에 걸려 있다 해도 나는 겨울이 좋다. 눈이 오고, 공기에 입김이 스며들고, 유리창은 차갑고, 열린 문틈 사이로 바람이 세차게 불어들고, 따끈한 커피와 음악이 있는 그런 겨울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나. -190쪽
런던의 시우르 로스 공연장에서 느꼈던 것도 바로 이런 기분이었다. 그때도 소리들이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곤 했다. 땅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국경이란 의미 없는 것이고 허공이야말로 우리의 고향이라고, 소리가 나에게 속삭이곤 했다. 나는 날아가다가 자꾸만 땅을 내려다보았다. -200쪽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나같은 야행성 괴물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이 괴물들은 밤만 되면 초능력을 발휘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도저히 쓸 수 없는 분량의 글을 순식간에 써내며 평소에는 들을 수 없는 음악 속 미세한 소리들을 잡아채며, 사소한 일들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난다. 밤만 되면 스스로가 어쩐지 진화한 인간같이 느껴질 정도다. 물론 오후 1시쯤 잠에서 깨어나 머리를 쥐어박으며 이런 잠벌레 같은 인간이 다 있나 자학하고, 헐크에서 브루스 배너로 돌아오고 말지만 말이다. -203쪽
왜 밤은 깊을까. 어째서 넓지 않고 깊은 것일까. 노래를 듣다 보면 알게 된다. 푸른 바다 속 적막하고 고요하고 먹먹한 침묵 속으로 가라앉는 마음을 보게 된다. 거긴 깊다. 깊어서 좁지만 아늑하다. 몸을 웅크린 채 나에게 집중하고, 내가 왜 나였는지 알게 된다. 내가 왜 나였는지 아는 것, 내가 어떤 나인지 아는 것, 그것이 진정한 밤의 초능력이다. -204쪽
"1989년에 나가 있는 20세 김중혁 통신원 응답하세요" "네 잘 들립니다. 43세 김중혁씨. 2013년에 저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나요?" "음, 음, 뭐랄까, 그러니까..." "별로인가 보네요." "아니에요, 제법 잘 늙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거긴 어때요? 스무 살 힘들죠?" "여기도 잘 버티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우리 힘내요" "그래요"-207쪽
카페 문에다 카드 사용 여부나 와이파이 사용 가능 여부와 함께 가장 자주 트는 음악 리스트를 붙여두면 좋지 않을까. -221쪽
세월을 보내고 나이를 먹으며 우리가 쌓아가는 것은 돈이나 명예가 아니라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몇 시간의 기억이다. 밤을 꼴딱 새우며 책을 읽었던 시간들, 처음으로 가본 콘서트장에서 20분처럼 지나가버린 두 시간, 혼자 산책하던 새벽의 한 시간. 그 시간들, 그리고 책 속, 공연장, 산책길처럼 현실에 있지만 현실에서 살짝 어긋나 있는 공간에서 우리는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229쪽
시간을 견뎌내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리는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견딘다. 시간의 속도를 더디게 만들기 위해 필름 속에다, 컴퓨터 속에다 풍경을 담는다. 우리는 소설을 쓰고 읽으며 시간을 견딘다. 소설 속에 거대한 시간을 담아서 시간의 처음과 끝을 파악하려 애쓰고, 시간을 되돌리고 빨리 흐르게도 하며 시간의 민낯을 보려 애쓴다. 우리는 영화를 보며 시간을 견딘다. 천천히 흐르는 시간의 모습과 순식간에 지나가는 시간의 속도를 화면 속에서 보며 우리의 시간을 잊는다. 그렇게 견딘다. 우리는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견딘다. 아니, 이 말은 조금 수정해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뛰어넘는 방법을 배운다. 시간을 가뿐히 뛰어넘어 다른 시간과 공간에 가다는 방법을 배운다. 그렇게 시간을 견딘다. 음악이야말로 가장 짜릿한 마법이다. -2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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