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보내지 마 민음사 모던 클래식 3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구판절판


그가 원한 것은 헤일셤이 어떤 곳이었는지를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가 유년기를 그곳에서 보낸 것처럼 헤일셤을 '추억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 삶이 곧 완결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나로 하여금 여러 가지 것들을 자세히 묘사하게 해서 그것들이 실제로 자기 머릿속에 서서히 자리를 잡아서는, 약 기운과 통증과 피로감으로 잠 못 이루는 그런 밤 동안 나의 기억과 자기 기억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기를 원했던 것이다. -17쪽

그 느낌은 물 웅덩이로 발을 내딛기 직전의 아주 짧은 순간과 흡사했다. 거기에 웅덩이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제는 발을 내딛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82쪽

"보다시피 이 곳은 동쪽, 곧 바다 쪽에 이 산맥이 솟아 있기 때문에 이곳을 통해서는 어디로도 갈 수 없다. 움직일 뿐이다. 사람들은 이 곳을 우회해 지나가 버린다. 이런 이유에서 이곳은 영국에서 가장 평화로운, 그런대로 아름다운 구석인 셈이다. 동시에 '로스트 코너' 같은 곳인 셈이지."
로스트 코너, 에밀리 선생님은 노퍼크를 그렇게 칭했고, 그것을 시작으로 우리는 노퍼크에 대한 특별한 감정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헤일셤 건물 4층에는 우리가 잃어버린 물건들을 보관해 두는 '로스트 코너'가 있었다. 뭔가 잃어버렸거나 주웠다면 그곳으로 가면 되었다. 그 수업이 끝난 다음 누군가가 에밀리 선생님이 노퍼크를 '로스트 코너'라고 한 것은 그곳이 영국의 '로스트 코너' 다시 말해서 전국의 분실물들이 마지막으로 모이는 곳'이라는 의미였다고 주장했다. 이런 생각은 웬일인지 인기를 얻어 실제로 그해 내내 통용되었다. -98쪽

우리는 노퍼크에 대한 개념을 꼼꼼히 점검해 볼 생각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저녁 도버 회복 센터의 타일 벽으로 된 병실에 앉아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루스가 말한 것처럼 당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혹시 귀중한 뭔가를 잃어버렸다 해도, 애써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해도 일말의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 어른이 되어 자유롭게 전국을 여행할 수 있을 때 노퍼크에 가서 그것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여기고 위안을 삼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99쪽

그 순간 나는 조금쯤 흥분되는 다른 물건을 발견했을 때처럼 감탄사를 내지르지 않았다. 나는 기뻐해야 하는 것인지 아닌지 확신하지 못한 채 가만히 서서 그 플라스틱 케이스를 바라보았다. 한순간 그것은 실수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이 모든 즐거움을 추구하는데 완벽한 구실이 되어 준 테이프가 나타났으므로 이제 우리는 그 일을 중단해야 할 터였다. 내가 놀랍게도 즉각 그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던 것 같다. 같은 이유에서 나는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 척할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때 내 앞에 나타난 그 테이프에는 유년기의 뭔가를 어른이 되고 난 후 대할 때 느껴지는 막연한 당혹감 같은 것이 있었다. -241쪽

"어째서 그런 걸 증명하셔야 했던 거죠, 에밀리 선생님? 우리한테 영혼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있었나요?"-357쪽

장기교체로 암을 치유할 수 있게 된 세상에서 어떻게 그 치료를 포기하고 희망없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겠니? 후퇴라는 건 있을 수 없었지. 사람들은 너희 존재를 거북하게 여겼지만, 그들의 더 큰 관심은 자기 자녀나 배우자, 부모 또는 친구를 암이나 심장병이나 운동 세포 질환에서 구하는 거였단다. 그래서 너희는 아주 오랫동안 어두운 그림자 속에 머물러 있었지.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되도록 너희 존재를 생각하지 않으려 했단다. 그럴 수 있었던 건 너희가 우리와는 별개의 존재라고, 인간 이하의 존재들이라고 스스로에게 납득시켰기 때문이지. 그것이 우리의 작은 운동이 시작되기 전의 실상이었단다. 우리가 무엇에 맞서야 했는지 알겠지? -360쪽

그날 춤을 추는 너에게서 내가 본 건 좀 다른 거였어. 나는 빠르게 다가오는 신세계를 보았지. 과거의 질병에 대한 더 과학적이고 효율적인, 그래, 더 많은 치료법을 말이야. 맞아, 거칠고 잔인한 세상이지. 나는 어린 소녀가 두 눈을 꼭 감은 채 과거의 세계,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걸 자기도 잘 알고 있는 과거의 세계를 가슴에 안고 있는 걸 보았어. 그걸 가슴에 안고 그 애는 결코 자기를 보내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지. 나는 그 장면을 바로 그렇게 본 거란다. 그건 실제 네 생각이나 행동은 아니었지만 말이야. -372쪽

나는 그에게로 다가가 격하게 휘둘러 대는 두 팔을 꼭 붙잡았다. 그는 나를 떼어 내려 했지만 나는 그를 붙들고 놓지 않았다. 이윽고 그의 비명이 잦아들고 분심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다음 순간 나는 그 역시 나를 두 팔로 얼싸안고 있음을 깨달았다. 우리는 바람이 휘몰아쳐 우리 옷을 잡아당기는 그 들판 꼭대기에서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시간 동안 말없이 그렇게 서로 부둥켜안고 서 있었다. 마치 그렇게 서로 안고 있는 것이 우리가 어둠 속으로 휩쓸려 가는 것을 막을 유일한 방법이기라도 한 듯.-375쪽

"어딘가에 있는 물살이 정말이지 빠른 강이 줄곧 떠올라. 그 물 속에서 두 사람은 온 힘을 다해 부둥켜안지만 결국은 어쩔 수가 없어. 물살이 너무 강하거든. 그들은 서로 잡았던 손을 놓고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 거야. 우리가 바로 그런 것 같아. 부끄러운 일이야, 캐시. 우린 평생 서로 사랑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영원히 함께 있을 순 없어"-3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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