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卍).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7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김춘미.이호철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절판


부정관의 수행 방법은 선승이 좌선을 하듯이 홀로 고요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두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겨 어느 하나의 일을 향해 상념을 집중시키는 일로 시작된다. 하나의 일이란, 예를 들어 이 내 몸은 부모님의 음탕한 즐거움의 산물이어서 본래는 부정불결한 액체에서 태어났다는 사실, 즉 대지도론의 말을 인용하자면 '사람이 호합할 때 몸 안의 욕정의 벌레인 남충은 백정, 눈물처럼 나오고, 여충은 적정, 토하듯이 나온다. 골수의 기름이 흘러 이 두 개의 벌레가 눈물 흐르듯 나온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이어서, 이 붉고 흰 두 액체가 합쳐진 것이 자기 몸이라는 것을 생각한다. 그 다음, 태어날 때도 더럽고 냄새나는 통로를 거쳐 나온다는 것, 태어난 뒤에도 대소변을 쏟아내고 콧구멍으로 콧물을 흘리고 입으로는 냄새나는 숨을 내쉬고 겨드랑이에서도 끈적끈적한 땀을 낸다는 것, 몸 안에는 똥이나 오줌이나 고름과 피와 기름이 있고, 내장 속에서는 오물이 꽉 차서 여러 가지 벌레가 우글거리고, -305쪽

(위에서 이어서) 죽고 나면 그 시체를 짐승들이 달려들어 뜯어먹거나 새들이 쪼아 먹고, 팔다리는 찢어지고 비릿한 악취가 사방 삼십 리 오십 리까지 퍼져서 사람들은 코를 막고, 피부는 시꺼메져서 개의 사체보다 흉한 모습이 된다는 것, 요컨대 이 몸은 태어나기 전부터 죽은 후까지 부정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305쪽

생각건대, 옛날에 나이 든 아버지 대납언이 부정관이라는 걸 닦고 있었을 때 어머니의 환영이 모독됨을 한탄하며 아버지를 원망했던 시게모토는 40년 동안이나 어머니와 단절되어 지내면서 어스름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던 모습을 이상적으로만 꾸려서 가슴 깊숙이 숨겨왔을 것이다. 시게모토는 언제까지느 그 어머니를, 어릴 때 보았던 모습으로만 사모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316쪽

개울에서는 꽤나 높이 울뚝 불거져 나와 있었고, 맑디 맑은 좁은 물줄기 하나가 어디선가 삐져나와서 언덕 아래를 휘돌아 시냇물로 흘러 떨어지고 언덕 중간쯤부터는 황매화 한 무더기가 시냇물 쪽으로 휘늘어져 있었다. 그러다 보니 아까부터 꽤 시간이 지났을 텐데도 지금 시게모토가 머물러 있는 곳에서 건너의 세밀한 경치들이 이렇게도 영롱하고 선명하게 보이니, 꽃들이 마치 눈빛처럼 작용해 막 드리워지는 어둠 속에서 근처의 풍경을 저렇게 떠오르게 하는 것일까 하고 시게모토는 생각했지만 사실은 꽃이 뿜어내는 빛이 아니라 꽃 위의 하늘에 걸려 있는 달이 바야흐로 더더욱 밝아졌기 때문이었다. 땅 위는 차가운 습기로 가득해 살갗에 공기의 찬 기운이 닿았지만 하늘은 음력 3월이고 부옇게 흐렸으며, 달빛은 꽃구름을 뚫고 비추고 있어, 저녁 벚꽃이 풍겨내는 향내에 섞여 골짜기 한구석은 환상적인 빛깔 속에 잠겨 있었다. - 321쪽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교사의 알선으로 기타무라가의 입주 가정교사 겸 서생이 되어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고 맛있는 과자와 음식을 얻어먹으며 부에 대한 선망을 키웠다. -330쪽

만일 천재라는 말을 예술적 완성도만을 기준 삼아 결코 자기 자질을 오판하지 않고 그것을 계속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면, 팔십 평생을 통해 자기 자질을 거의 오판하지 않았던 다니자키야말로 천재라 해야 할 것이다.-331쪽

빛나는 여자의 등이 있다. 꽃잎 같은 여자의 발뒤꿈치가 있다. 문학사상, 여자의 등이나 발이 이렇게 중대한 문제가 된 적은 없었다. 사람들을 우왕좌왕하게 만드는 시대적 변화와 한 여인의 발, 그 둘 중에서 어느 쪽이 본질적으로 인간에게 더 중요하냐고 다니자키 문학은 반세기에 걸쳐 묻고 있다. 이 부조리한 물음의 중압을 느낄 때 우리는 '예술'이라는 대답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3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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