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느긋한 목소리로 팔자 좋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시오" 네 눈엔 내가 안녕해 보이냐. 동해는 가위로 남자의 눈을 찍어버리려다 그만두었따. 남자는 그의 어깨를 스쳐갔다. 탈출하려는 바보일까, 세상이 어찌 되든 평상시 하던 짓을 하는 짓을 하는 머저리일까. 동해의 눈엔 후자로 보였다. 평상시 하던 짓을 하는 걸로 평상이 지켜지고 있다고 믿는 부류. -309쪽
"쉬차를 늑대 밥으로 던져 주면서 내가 간절하게 바란 게 뭔 줄 알아" 재형은 배시시 웃었다. 속삭여오는 듯한 미소였다. 진의를 파악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녀의 덜미를 잡은 미소이기도 했다. "늑대들을 끌고 달아나주기를 바랐어. 되도록 멀리. 기왕이면 아주 먼 곳으로 도망치면서 한 마리씩 차례차례, 모조리 잡아먹히기를 바랐어. 배가 덜 찬 늑대들이 나를 기억해내고 되돌아오지 않도록. 내가 도망칠 수 있도록. -342쪽
그들이 떠난 후 더 충격적인 깨달음이 왔다. 자신은 아버지를 진정으로 찾으려 한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그녀는 아버지와 현진이 죽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눈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데도 가능성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알고 있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유의 일이었다.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과 직면하는 게 겁이 났다. 몸에 이상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건강진단을 받지 않으려는 심리와도 비슷한 것이었다.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은 모르는 게 나았다. 모르는 동안은 절망과 맞닥뜨리지 않아도 될 테니까. -355쪽
저들은 가슴에 성배를 품은 자들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배신을 잘하는 '희망'이라는 성배. -434쪽
"누구한텐 당연한 일이 누구한텐 목표가 되기도 해요. 초등학교 들어가면서 깨달은 건데, 난 후자로 태어났더라고요" -4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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