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나라의 장난

 

김수영

 

팽이가 돈다

어린아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해들도 아름다웁듯이

노는 아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 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또 한번 팽이를 돌려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도회 안에서 쫓겨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

어느 소설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이며

모두 다 내던지고

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정말 속임 없는 눈으로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

누구 집을 가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가 있고

바쁘지도 않으니

마치 별세계같이 보인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이니 이상하고

손가락 사이에 끈을 한끝 잡고 방바닥에 내어던지니

소리없이 회색빛으로 도는 것이

오래 보지 못한 달나라의 장난 같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 벽화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이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 년 전의 성인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애정지둔

 

김수영

 

조용한 시절을 돌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사랑이 생기였다

굵다란 사랑

누가 있어 나를 본다면은

이것은 확실히 우스운 이야깃거리이다

다리 밑에 물이 흐르고

나의 시절은 좁다

사랑은 고독이라고 내가 나에게

재긍정하는 것이

또한 우스운 일일 것이다

 

조용한 시절 대신

나의 백골이 생기였다

생활의 백골

누가 있어 나를 본다면은

이것은 확실히 무서운 이야깃거리이다

다리 밑에 물이 마르고

나의 몸도 없어지고

나의 그림자도 달아난다

너는 나에게 대답할 것이 없어져도

쓸쓸하지 않았다

 

생활무한

고난돌기

백골의복

삼복염천거래

나의 시절은 태양 속에

나의 사랑도 태양 속에

일식을 하고

첩첩이 무서운 주야

애정은 나뭇잎처럼

기어코 떨어졌으면서

나의 손 위에서 신음한다

가야만 하는 사람의 이별을

기다리는 것처럼

생활은 열도를 측량할 수 없고

나의 노래는 물방울처럼

땅속으로 향하여 들어갈 것

애정지둔

 

 

구라중화

- 어느 소녀에게 물어보니

너의 이름은 글라디올러스라고

 

김수영

 

저것이야말로 꽃이 아닐 것이다

저것이야말로 물도 아닐 것이다

 

눈에 걸리는 마지막 물건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듯

영롱한 꽃송이는 나의 마지막 인내를 부숴버리려고 한다

 

나의 마음을 딛고 가는 거룩한 발자국 소리를 들으면서

지금 나는 마지막 붓을 든다

 

누가 무엇이라 하든 나의 붓은 이 시대를 진지하게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치욕

 

물소리 빗소리 바람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곳에

나란히 옆으로 가로 세로 위로 아래로 놓여 있는 무수한 꽃송이와 그 그림자

그것을 그리려고 하는 나의 붓은 말할 수 없이 깊은 치욕

 

이것은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을 글이기에

(아아 그러한 시대가 온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냐)

나의 동요 없는 마음으로

너를 다시 한 번 치어다보고 혹은 내려다보면서 무량의 환희에 젖는다

 

꽃 꽃 꽃

부끄러움을 모르는 꽃들

누구의 것도 아닌 꽃들

너는 늬가 먹고 사는 물의 것도 아니며

나의 것도 아니고 누구의 것도 아니기에

지금 마음 놓고 고즈넉이 날개를 펴라

마음대로 뛰놀 수 있는 마당은 아닐지나

(그것은 골고다의 언덕이 아닌

현대의 가시철망 옆에 피어 있는 꽃이기에)

물도 아니며 꽃도 아닌 꽃일지나

너의 숨어 있는 인내와 용기를 다하여 날개를 펴라

 

물이 아닌 꽃

물같이 엷은 날개를 펴며

너의 무게를 안고 날아가려는 듯

 

늬가 끊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생사의 선조뿐

그러나 그 비애에 찬 선조도 하나가 아니기에

너는 다시 부끄러움과 주저를 품고 숨 가빠하는가

 

결합된 색깔은 모두가 엷은 것이지만

설움이 힘찬 미소와 더불어 관용과 자비로 통하는 곳에서

늬가 사는 엷은 세계는 자유로운 것이기에

생기와 신중을 한 몸에 지니고

 

사실은 벌써 멸하여 있을 너의 꽃잎 위에

이중의 봉오리를 맺고 날개를 펴고

죽음 위에 죽음 위에 죽음을 거듭하리

구라중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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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2-04-29 0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5도 안봤는데, 좋은 시가 너무 많아 -_- 시집 전체를 옮길 기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