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욱 시인의 <생년월일>을 꺼냈다. 그리고 읽기 시작했고, 기억하고 싶은 시가 많아 옮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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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행인 1이 지나가자
클라이맥스가 시작되었다.
의미심장하게
딩동,
초인종을 누르는 사람은 처음 보는 주인공.
이장욱씨 맞으시죠? 여기 싸인하세요.
나는 엑스트라 2로서
핀 조명을 향해 걸어갔네
세계의 가로수들을 이해할 것 같아.
선풍기가 돌아갈 때 선풍기의 배경이 하는 일을
허공이 음악에게 하는 일을.
누군가 결정적으로 희박해지는 순간에
우연한 목격자가 된다는 것을
엑스트라 3에게는 그것이 전세계
음악이 사라진 허공 같은 것
가로수에게서 가을을 지운 것
핀 조명이 꺼질 때까지 널 사랑했는데
그것은 행인 4의 사랑.
먼 후일
택배기사는 잊을 수 없는 인생을 살았다.
모든 것을 잊었기 때문에
모든 것에게서
사라졌기 때문에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자
극적인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뒤
너는 나에게 무슨 말을 했는데 그게 무슨 뜻이지? 밤길을 걷다가 무슨 말을 들었는데, 그게 무슨 말이지? 캄캄해지다가,
캄캄해지다가,
캄캄한 곳을 향해 돌아설 수도 없을 때,
너는 괴물같은 얼굴로, 십자가와 비슷한 자세로, 천둥 번개가 치는 밤하늘 아래,
자꾸 거대해졌다.
등뒤의 세계는 어디에나 있구나. 매일 잠에서 깨어나기를 반복했는데도 다시 밤. 흩날리느누 빗방울들을 기준으로 나는 중얼거리네. 궁금한 목소리로.
의심하는 목소리로.
돌이 되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인가.
모든 사람인가.
뒤라는 곳은 무한해. 내내 타오르고 있구나. 나는 자꾸 무너지면서 또
발생하는 세계를 바라보았다.
빗줄기는 팔이 세 개였다가 다리가 열 개였다가 무수한 팔과 다리를 모아 못 박힌 채로
무한이 되는 사람.
너는 나에게 무슨 말을 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오래 살아온 도시가 재가 되어 있었다. 빗방울 하나하나가,
처음 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소규모 인생 계획
식빵 가루를
비둘기처럼 찍어먹고
소규모로 살아갔다
크리스마스에도 우리는 간신히 팔짱을 끼고
봄에는 조금씩 선량해지고
낙엽이 지면
생명보험을 해지했다.
내일이 사라지자
어제가 황홀해졌다.
친구들은 하나둘 의리가 없어지고
밤에 전화하지 않았다.
먼 곳에서 포성이 울렸지만
남극에는 펭귄이
북극에는 북극곰이
그리고 지금 거리를 질주하는 싸이렌의 저편에서도
아기들은 부드럽게 태어났다.
우리는 위대한 자들을 혐오하느라
외롭지도 않았네
우리는 하루종일
펭귄의 식량을 축내고
북극곰의 꿈을 생산했다.
우리의 인생이 간소해지자
이스트를 가득 넣은 빵처럼
도시가 부풀어올랐다.
토르소
손가락은 외로움을 위해 팔고
귀는 죄책감을 위해 팔았다.
코는 실망하지 않기 위해 팔았으며
흰 치아는 한 번에 한 개씩
오해를 위해 팔았다.
나는 습관이 없고
냉혈한의 표정이 없고
옷걸이에 걸리지도 않는다.
누가 나를 입을 수 있나.
악수를 하거나
이어달리기는?
나는 열심히 트랙을 달렸다.
검은 서류가방을 든 채 중요한 협상을 진행하고
밤의 쇼윈도우에 서서 물끄러미
당신을 바라보았다.
악수는 할 수 없겠지만
이미 정해진 자세로
긴 목과 굳은 어깨로
당신의 밤이 상점을 지나갔다.
헤이,
내가 당신을 부르자 당신이 고개를 돌렸다.
캄캄하게 뚫린 당신의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치는 순간,
아마도 우리는 언젠가
만난 적이 있다.
아마도 내가
당신의 그림자였던 적이.
당신이 나의 손과
발목
그리고 얼굴이었던 적이.
동행
누군가의 위치에서 나는 매일 경험을 했다.
나이와 습관을 외운 뒤 처음으로 연인의 이름을 불렀다.
화가 난 목소리로.
좋아하는 목소리로.
일용품들의 위치를 묻지 않고도 생활을 했다.
처음 보는 면도칼을 목에 대고 움직였다.
작은 개에 대해서 상상해보지 못한 애정을 느끼고
딱딱한 치아가 조금씩 어긋나고
바지가 몸에 안 맞고
그래도
정기적으로 근무를 했다.
낯선 동작으로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거울을 보았다.
왼쪽 귀는 오른쪽 귀
뒷모습은 어디로 갔나?
손톱이 길어요.
저녁에는 애완견이 자꾸 죽어서 묻어주었다.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운동장을 달렸다.
전속력에서 시작해서 조금씩 느려졌다.
틀니를 뺐다.
누군가의 손을 잡고 나는 잠이 들었다.
목에서 피가 흘렀다.
이 모든 것을 동행이라 부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