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종기 <이슬의 눈>을 읽다가 남겨보는 시 2편.



당신의 하느님 

당신이 기도하는 하느님은
여리고 예민한 분인지
만하임에서도 베네치아에서도
혼자서 비를 맞고 계시더군
당신의 착한 하느님은
그림자까지 비에 젖어서
날지도 않고 내 옆을 지나가셨지
나는 떠나지 않기로 결심했어

얼마나 작은 틈 사이로도
빗물은 스며들어 지나간다
하느님의 물은 쉽게 지나간다
작은 우리들의 시간 사이로 들어와
폭 넓은 빈 강 하나를 보여주신다

여행의 젖은 옷을 말리며
추워진 공간의 벽을 말리며
먼 곳도 쉽게 보는 하느님이 눈이
가까이 가지 말라고 신호를 보낸다
그간에도 세월이 화살같이 지나고
그 화살 몸을 찔러 피나게 해도
희망이여, 평생의 아픔이여
영혼을 풍요하게 한다는 아픔이여.

나는 움직이지 않기로 했다.
그대가 내 안에서 쉬는 동안에
은밀한 상처를 조심해 만져도
당신의 투명한 하느님은 아시지,
돌아갈 길이 더 멀고 험한 것.
비에 젖어 살아온 몸이 떨린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슬픔이 떨린다



이 세상의 긴 江

1

일찍 내린 저녁 산 그림자 걸어나와
폭 넓은 저문 강을 덮기 시작하면
오래된 강물결 한결 가늘어지고
강의 이름도 국적도 모두 희미해지는구나

국적이 불분명한 강가에 자리 마련하고
자주 길을 잃는 내 최근을 불러모아
뒤척이는 물소리 들으며 밤을 지새면
국적이 불분명한 너와 나의 몸도
아, 사람들이 이렇게 물로 통해 있는 한
우리가 모두 고향 사람인 것을 알겠구나.

마침내 무거운 밤 헤치고 새벽이 스며든다.
수만 개로 반짝이는 눈부신 물의 눈,
강물들 서로 섞여서 몸과 몸을 비벼댄다.
아, 그 물빛, 어디선가 내 젊었을 때 보았떤 빛,
그렇게 하나같이 비슷한 방향으로 가는 우리,
길 잃고도 쓰러지지 않는 동행을 알겠구나

2

며칠 동안 혼자서 긴 강이 흐르는 기슭에서 지냈다. 티브이도, 라디오도 없었고 문학도 미술도 음악도 없었다. 있는 것은 모두 살아 있었다. 음악이 물과 바위 사이에 살아 있었고, 풀잎 이슬 만나는 다른 이슬의 입술에 미술이 살고 있었다. 땅바닥을 더듬는 벌레의 촉수에 사는 시, 소설은 그 벌레의 길고 여유 있는 여정에 살고 있었다.

있는 것은 모두 움직이고 있었다. 물이, 나뭇잎이, 구름이, 새와 작은 동물이 쉬지 않고 움직였고, 빗물이, 밤벌레의 울음이, 낮의 햇빛과 밤의 달빛과 강의 물빛과 그 모든 것의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움직이는 세상이 내 주위에서 나를 밀어내며 내 몸을 움직여주었다. 나는 몸을 송두리째 내어놓고 무성한 나뭇잎의 호흡을 흉내내어 숨쉬기 시작했다.

마침내 나는 내 살까지도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숨쉬는 몸이, 불안한 내 머리의 복잡한 명령을 떠나자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어깨가 가벼워지고 눈이 밝아지고, 나무 열매가 거미줄 속에 숨고, 곤충이 깃을 흔들어내는 사랑 노래도 볼 수 있었다.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드디어 알게 되었따.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였다. 다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크고 작은 것의 차이에서 떠나기로 결심했다.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의 차이에서 떠나고, 살고 죽는 것의 차이에서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내게도 어려운 결심이었다. 며칠 후 인적 없는 강 기슭을 떠나며 작별 인사를 하자 강은 말없이 내게 다가와 맑고 긴 강물 몇 개를 내 가슴에 넣어주었다. 그래서 나는 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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