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너무 좋았다. 정말, 봄이라도 온걸까. 집앞 버스 정류장 앞 목련나무의 꽃눈이 눈에 들어온다. 저 목련나무, 봄밤마다, 정말 눈부시게 빛나던. 녀석도 봄준비에 한창이다. 아니지. 꽃눈은 이전부터 있었고, 내 눈에 그 꽃눈이 이제 보이기 시작했다는 얘기가 더 맞을런지도 모르겠다. 여튼 나는, 타닥타닥 오고 있는 봄맞이에 좀 신나하고 있는 중이었다.

날이 좋아 서울역에서 내려 조금 걸어가기로 했다. 아직은 날이 추우니 따뜻한 라떼 한잔을 받아들고, 샌드위치 하나를 사서 걷는데, 서울역 광장은 온통 노숙인들의 세계다. 조금 무섭다,고 생각을 하면서, 또 무섭다, 고 여기는 스스로를 경멸하기도 하면서 걷고 있었다. 한켠에 노숙인들을 위한 배식 차량이 있었다.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다. 내 옆으로 걸어가시는 분의 식판을 보니 식사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국과 밥이 전부. 누구에게는 보기만 해도 입맛이 사라지는 식사.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참 고마운 한끼의 식사. 하필 지하철에서 읽던 책과도 연결되는 부분이 있어 나는 조금 복잡해졌다. 안다는 것과 직접 경험한다는 것은 여실히 다른 일이다. 내가 죽을 때까지 온맘으로 알지 못할 어떤 삶들이, 내가 알 수 있는 것들보다 더욱 많이 존재하는 한, 나는 감히 그 무엇에 대해서도 함부로 말하지 못할 것이다. 손에 들고 있는 라떼가 무색해져 나는 얼른 그 길을 지났다.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가을의 끝에 봄의 첫날을 꿈꾼다는 모 가수의 노래를 들으면서. 가을의 끝부터 기다린 봄은 성큼 다가와, 어느덧 겨울의 끝. 봄의 첫날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올 것임을 알고 있고, 나는 주말마다 어딘가를 쏘다니며, 혹은 누군가와 차를 마시며, 산뜻하고 상큼한 것을 먹으러 다니며, 봄에 어울리는 살랑살랑한 무늬의 원피스 한 장에 즐거워하며, 꽃을 보러 다니며, 푸릇푸릇한 것들에 마음 설레어하며, 그렇게 그 계절을 한껏 만끽할 것임을 알고 있다. 물론 저들에게도 봄은 올 것이고, 어쩌면 그들에게는 봄이, 내가 이 계절을 고마워하는 것보다 더욱 고마운 계절일런지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계절조차 공평하게 흐르지 못한다는 생각에 자꾸만 마음 한구석이 무겁다. 따뜻한 계절을 맞이해도, 마음까지 따뜻해질 수 없는 어떤 삶들이 분명 존재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오늘 내가 똑똑히 마주한 그 삶들은, 나의 마음을 산란하게 만들지언정, 결국 나의 봄의 어떤 것도 바꾸어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에, 20분 가량을 걷는 동안 내 발걸음은 쉬 가벼워지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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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21 2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26 0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10-02-22 0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절은 어김없이 돌고 돌아 봄도 오고 꽃이 피겠지만...
여전히 심리적 겨울을 넘어서 빙하기인 분들도 존재하겠지요.

(노숙자 분들은 가급적 피하시는게 좋습니다. 특히 서울역쪽 노숙자 분들은 노조로 말하면 초강성노조라서 폭력사태도 빈번히 일어나곤 합니다.)

웽스북스 2010-02-26 02:07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하긴 그 쪽도 만만치 않은 텃세를 버텨내신 분들이시니 역시 보통은 아니신가봅니다. 그런가봅니다.

L.SHIN 2010-02-22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정말 봄이 오고 있습니다.
공기의 냄새 부터가 다른 걸요. 이럴 때는 모든 걸 내팽겨치고 '훌쩍 떠날거야' 버젼이
버닝업 되죠...그래서 사고치기 전에 더욱 몸을 사려야 하는...-__-

웽스북스 2010-02-26 02:08   좋아요 0 | URL
훗. 엘형님이 치실 사고가 괜히 궁금해집니다.
공기의 냄새가 정말 다릅니다. 겨울의 동반자였던 기모스타킹을 이제 더는 못신게 되어버린 것 같아 아쉬워요.

개인주의 2010-02-22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는 그사람들이 해꼬지라도 했냐라고 하지만
일단은 일행이 없이 혼자라면 눈길 마주치지 않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배째.. 하는 근원을 알 수 없는 베짱이 무서워요

웽스북스 2010-02-26 02:09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참 생각하는 것과 마주하는 현실은 다른 것 같아요.
참 어렵지요. 어려워.

마그 2010-02-23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핑크색 옷을 꺼내입으면서..한 생각.
아..주말엔 옷좀꺼내야겠구나.......라며 다시 한 생각.
빨래 많겄다..아흑.... ( 눼.. 조만간 독립하시면 웬디님도 저같이 되실겝니다. ㅋㅋㅋㅋ)

웽스북스 2010-02-26 02:13   좋아요 0 | URL
눼. 세상에서 제가 제일 싫어하는 집안일이
빨/래/입/니/다

두둥

네임 2010-02-23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가슴에 시퍼렇게 멍이 든다던 태백산맥의 한 귀절이 마음에 박혀, 그 뒤로는 맑은 날 예쁜 하늘도 마음놓고 볼 수가 없더라구요.

왠디양님의 이 글은 초중학교 교과서에 실리면 좋겠어요.

웽스북스 2010-02-26 02:14   좋아요 0 | URL
네. 그런데.
또 맑은 날 예쁜 하늘을 보면
해사해져오는 이 마음은 또 어떤답니까.

그나저나 초중학교 교과서. ㅎㅎㅎ
고등학교 정도만 써주시지 그러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