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20 - 5부 4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나남출판) 20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구판절판


"사람들은 각각 자기 의식에다 빗장을 굳게 질러놓고, 빗장을 질러놓은 그 하나하나가 모여서 집단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97쪽

"아니오. 천만에요. 하지만 어떤 진실 때문에 피해받게 되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해서 절대선이 없다 할 수도 없고"
"그렇지... 대못을 박았다 하니까 하는 말이오만 내 경우도 부모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지요"
찬하는 서글프게 웃었다
"방탕한 자식 이상으로, 가문을 지우려는 내 양심은 진실로 그게 양심이었나 생각할 때가 있어요. 오히려 이기심이 아니었던가, 관념적인 것이지, 하하하핫핫..."-122쪽

가진 것에 대해 느끼는 콤플렉스, 오늘날 역사가 어디를 향해 진행하고 있는가, 역사는 어떻게 진행되어왔는가 그것을 자각한 지식인, 특히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하며 남에게는 심약한 사람이 빠지기 쉬운 그같은 콤플렉스는 사실 치유하기 어려운 병리현상이다. 지식인들의 고민과 방황이 대개는 그런 데서 연유되고 또 대개는 한번쯤 통과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가진 것을 나누었다 해서 의식이 해방되는 것도 아니며 콤플렉스가 해방되는 것도 아니다.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지 않는 이상 나누었다는 것은 시혜자로서의 새로운 콤플렉스가 싹트게 마련이다. 계급의식의 메워질 수 없는 간격을, 새로운 소외감을 인식할 뿐이다. -123쪽

그러나 조찬하가 누릴 수 있었던 것을 포기한 것은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었으며 그것은 감정이었다는 데 그의 회한이 있었던 것이다. 부모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는 그의 술회 자체가 회한을 의미한다. 애정문제로 좌절한 그의 인생의 출발점, 오가다는 파도가 방죽을 치던 그 바닷가를 가끔 생각한다. 자신에게는 인실과의 사랑이 이루어진 곳이지만 찬하는 산산히 부서진 곳이기도 했다. -124쪽

그들이 고작 한다는 것은 간접적인 말이었는데, '걱정하지 말아요', 그것이었다. 오가다는 그 말을 듣기 위하여 장장 여덟 시간을 소요하는 이곳을 찾아오는지도 모른다. 걱정하지 말아요. -142쪽

"나는 말입니다. 나는 내 개인의 사랑을 애국이라는 가치보다 우위에 둡니다. 왜냐하면 내 조국이 정의롭지 못한 전쟁을 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히토미상은 자신을 희생하며 민족을 위해 몸을 바치고 있지요. 그것은 핍박받는 내 민족을 압제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나도 히토미상과 같은 입장에 선다면 당연히 내 사랑을 희생시켰을 것입니다."-150쪽

설 단대목이건만 장터는 썰렁했다. 시든 파며 나새를 앞에 놓고 쭈그리고 앉은 아낙의 파란 입술, 객지에서 설을 쇠야 하는 늙은 장돌뱅이가 마른 명태 몇 짝을 내어놓고 멍하니 곰방대만 빨고 있는 모습, 봄은 아직도 멀리 있는 것만 같았다. 과연 그들에게도 봄 한철은 있었을까?-167쪽

기억은 땅에 묻어두었다. 이곳 평사리에 갈피갈피 접어서 묻어두었다. 그러나 그것은 구백 생멸이 있다는 한 찰나, 찰나의 연속이 아니던가? 하면은 내가 억겁을 살았단 말일까? 그것이 시공을 뚫고 가는 섬광이었다면 나는 한 찰나를 산 셈이 된다. 그러나 한 생명이 땅과 하늘 사이에 있는 이상 기억은 생명과 더불어 떠나지 않는 것, 그것이 한이로구나. 죄업이든 슬픈 이별이든 또는 만남이든 횡액이든 기억에 사람들이 뿌리를 내렸던 곳이며 내 또한 뿌리를 내렸던 곳, 아아 기억, 수많은 기억들은 억겁의 길만큼이나 길고도 많구나. 서희는 망망대해에 던져진 것처럼 기억의 바다에서 자맥질하다가 간신히 현실로 돌아온다. -182쪽

"요즘 명희 선생은 어떻게 사니?"
"숨만 쉬고 있는 거지"-245쪽

모두가 새로운 얼굴, 새로운 세상이었다. 어떤 여경 속에서도 삶 자체가 존재하며 그것이 흐르고 있다는 것은 아름다웠다. 그런 하나하나가 무리지어 흐르고 있다는 것은 더욱 엄숙하고도 경이로운 일이었다. 개미들의 행군처럼 물고기들의 군무처럼, 그러나 언제인가는 사라질 것들, 할머니 말대로 칼 찬 순사이건 구걸하는 거지아이건 애참하기는 매일반. -268쪽

"그런 점도 있겠지만... 그 할머니 사시는 모습에서 감동을 받은 것은 사실이에요. 그 분은 자신의 불행까지 사랑한다고 할까, 천지만물 모든 것을 사랑하고 감사하며 소중히 여기는 것 같았어요. 겨울 긴긴 밤에 목화씨를 발가내면서도 밥을 짓고 아궁이에 솔가지를 뿐질러 넣을 때도 아들에게 옷을 갈아입힐 때도 그 정성이 하나의 의식같이 보이는 거에요. 할머니 자신도 조금도 의식하지 않았지만 말이에요. 나도 저와 같이 시간을 가득하게 살아보고 싶다. 그런 생각 여러 번 했어요. 싱그러운 풀 같고 흐르는 강물같이, 뭐라 설명이 안되지만"-277쪽

"나를 형무소에서 업고 나왔던 것처럼 당신은 그 생각에서 나하고 결혼하려 했을 거에요. 그런 생각 말아요. 사랑하더라도 연민은 갖지 마세요. 그리고 또 서로 가지고 싶어하면 우리는 행복해지지 않을 거에요..."
"...."
"우선은 날이 풀리면 할머니 곁에 가서 그들을 도와주고 싶어요. 밑바닥에서 비로소 나는 해방이 되는 거에요"
하다가 여옥은 별안간 수염이 까칠하게 돋아난 최상길의 볼을 쓸어본다.
"내가 죽으면 최 선생이 묻어주시고 당신이 먼저 가면 내가 그럴게요"-278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9-12-27 1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30 1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