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21 - 5부 5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나남출판) 21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절판


다만 이상현의 입장에서는 그런 일들에 대하여 열정적이기보다 이성적이며 기계적이었다는 점이다. 그 자신에게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13쪽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지만 석이는 이상현에게 잠재워두고 있는 어떤 분노가 있었고 확신에 찬 강두메는 그에게 늘 거북한 마음을 갖게 했다. -22쪽

석이는 단 한번도 상현이 앞에서 기화의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물론 상현을 위해서가 아니다. 석이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말하고 싶지 않았던 일이었다. 아니 덧없는 자기 사랑을 위하여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24쪽

세월이 흐르면 잊어지리라 영광은 그렇게 생각했으며, 자신의 집념을 조용히 파기하고 있었다. 그랬는데 기화라는 이름 하나가, 그것은 마치 불씨와도 같이 영광의 마음에다 혼란의 불을 질렀던 것이다. 영광은 자기 자신을 상자 속에 집어넣듯 웅크리며 다독거리며 간신히 균형을 잡는다. -36쪽

"이제는 끝난 것입니까?"
누구에겐지도 모르게 혼자서 물었던 것이다. 역시 모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혐오감은 죄책감을 불렀고 증오감은 연민으로, 홍이는 두번째 홍역을 치른 셈이었다. 왜 인생을 그렇게 추악하게 살아야 하는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오감이 발달한 동물적인 삶. 그것을 겪어야만 하는 사람보다 실은 그 본인의 불행이라는 것으로 홍이는 자신의 혐오감 증오감을 달래었다. -62쪽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것도 쟁이받이의 얘긴데, 큰일을 하나 끝내고 나면 설움이 왈칵 솟는다 하더이다. 왜 그럴까요?"
"글쎄올시다... 인연이 끊어지니까 그런 것 아닐까 싶은데.. 떠나야 하니까요"
"무슨 인연?"
"물(物)과의 인연 말입니다"
"물과의 인연!"
"그렇소. 정성을 다할 때 그것은 하나의 인연이오" (중략)
"왜 그같은 인연을 맺는 거요? 밥벌이나 하면 됐지" (중략)
"소망 때문이겠지요"
"소망?"
"예"
"무슨 소망?"
"한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대한 물음이라고도 할 수 있겠고, 뭐 세속적인 욕망하고는 다른 것 아닐까요? 절실한 것... 사람들의 절실한 그 소망은 대체 무엇일까요? 근원에서 오는 절실한 그것 말입니다"-92쪽

"그래, 그래서 조형은 그놈의 물과의 인연을 맺으면서 소망을 이루었소?" 역시 우문이었다.
"아니지요. 애당초 이루기 위해서라기보다, 뭐랄까요? 소망을 위탁했다, 하하핫핫... 뭐 그런 것 아닐까요?" (중략)
"불구자가 아니었다면 나는 꽃을 찾아 날아다니는 나비같이 살았을 것입니다. 화려한 날개를 뽐내고 꿀의 단맛에 취햇을 것이며 세속적인 거짓과 허무를 모르고 살았을 것입니다. 내 이 불구의 몸은 나를 겸손하게 했고 겉보다 속을 그리워하게 했지요. 모든 것과 더불어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나는 물과 더불어 살게 되었고 그리움 슬픔 기쁨까지 그 나뭇결에 위탁한 셈이지요. 그러고 보면 내 시간이 그리 허술했다 할 수 없고 허허헛헛... 내 자랑이 지나쳤습니까?"-93쪽

"...생각이 난 김에 얘기해두겠다만 자네는 기량과 모양은 그만하면 돼 있네."
"죄송합니다"
휘는 엉겁결에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병수는 그런 말은 처음 했기 때문이다.
"한데 가락과 장단이 없어."
"...?"
"가락과 장단이 무엇이겠나?"
"예..."
"그것은 움직이며 살아난다는 것일세. 기량과 모양은 열심히만 하면 대개 그쯤은 될 수 있어. 나무조각 쇠붙이가 다른 모습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여느 사람들이 생각하는 만큼의 예삿일은 아니다. 그것에 가락이 있고 장단이 있으면 그래야만 명공일세. 절 처마 밑의 풍경 소리를 생각해보게"-106쪽

"내가 기둥인가? 내가 무슨 놈의 기둥. 다 무너지고 찢기고 천덕꾸러기눈치보기는 아닐지 몰라도 그만큼 더 깊게 상처를 받았다. 돌이킬 수 없게 상처를 받았다. 균형을 잡고 산다구? 완전 무방비. 다만 존재할 뿐이지. 항상 순철이는 내게 점수가 후해. 나는 무능하고 우유부단하며 용기가 없어. 항상 많은 편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이 허위에 가득 찬 삶"-195쪽

"살기로는 모두가 각각이지만 성공한 삶이란 누구에게나 그것은 덧없는 소망일 뿐입니다"-201쪽

"맞아요. 당신네들 눈빛은 살아있고 희망적이지만 일본인들의 눈은 죽어가고 절망적이요. 정당하다는 깃발이 없는 때문이겠지요. 내 편에 있어야 할 정당성 때문에 떳떳하지 못하고 비겁하게 느껴지는... 편견이지요. 이것은 극복하지 않는 이상 영원히 제자리걸음일 겁니다. 다만 산카상 비아냥거리지는 말아요. 욕을 해요. 아무리 미운 상대라도"-221쪽

찬하는 자신의 염원을 형이 가로지를 것을 예기치 못했으며 윤국은 자신과 양현이 앞에 홀연히 나타날 송영광을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들 네사람 뿐만 아니라 명희나 양현에게도 그들에게 허용된 시간의 짜임새는 실로 기기묘묘하면서도 잔혹했다 할 밖에. 그러나 인생이란 겨울 햇볕과도 같이, 쏟아지는 폭설과도 같이, 쩡! 하고 굉음을 지르며 스스로 몸을 가르는 빙하와도 같이, 그리고 동천에 얼어붙은 달과도 같이, 물론 봄의 환희와 여름의 정열도 있지만, 어디 사람의 삶만이 그러했겠는가. 삼라만상, 억조창생 생명 있는 것은 그 모두가 시간과 자리, 혹은 공간이라는 엄연한 십자가 밑에서 만나고 이별하며 환희와 비애를 밟고 지나가는 것이다. 욕망의 완성은 없다. 그것은 인간의, 생명의 불행인 동시 축복이다. 종말이 없는 염원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230쪽

"찬하씨가 저에게 어쨌기에요 세론에 개의치 않고 도리를 다했을 뿐인데 나는 그분한테 깊은 상처를 주었어요. 나는 다만 내 자신만을 위하여, 내 결벽증에 사로잡혀 터럭만큼도 희생하려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나는 내 자신을 위하여 한 일이 뭐 있나요?"
"바로 그게 너한테는 문제다."
"나는 살아 있는 생명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허깨비. 그것에 매달리어 내 아픔, 남의 아픔에도 눈감고 살아온 거에요"-332쪽

"어차피 사람마다 차이는 있찌만 모두가 다 사람은 완벽하지 못해. 다른 사람의 인생과 똑같은 삶을 살 수도 없는 거고, 불행이다 행복이다 하는 그 말도 실은 모호하기 짝이 없어. 시시각각으로 달라지는 우리들 운명, 행복 불행이 검정과자 빨간과자처럼 틀에다 찍어내는 것도 아니겠고, 운명 앞에 무력해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지만 그러나 운명을 정복한 사람은 없어. 자신이라는 말같이 허망한 것이 어디 있을까. 노인을 보아. 그 경력이 화려한 노이닐수록,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해. 결국 우리는 죽어가고 있는 거야. 삶이란 덫에 걸린 짐승 같은 것, 결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것"-333쪽

양현은 별당으로 뛰어들었다. 서희는 투명하고 하얀 모시 치마 저고리를 입고 푸른 해당과 옆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
"어머니!"
양현은 입술을 떨었다. 몸도 떨었다. 말이 쉬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어머니! 이, 이 일본이 항복을 했다 합니다!"
"뭐라 했느냐?"
"일본이, 일본이 말예요, 항복을, 천황이 방송을 했다 합니다."
서희는 해당화 가지를 휘어잡았다. 그리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정말이냐..."
속삭이듯 물었다.
그 순간 서희는 자신을 휘감은 쇠사슬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다음 순간 모녀는 부둥켜안았다.
이때 나루터에서는 읍내 갔다가 나룻배에서 내린 장연학이 둑길에서 만세를 부르고 춤을 추며 걷고 있었다. 모자와 두루마리는 어디다 벗어 던졌는지 동저고리 바람으로.
"만세! 우리나라 만세! 아아 독립 만세! 사람들아! 만세다!"
외치고 외치며 춤을 추고, 두 팔을 번쩍번쩍 쳐들며, 눈물을 흘리다가는 소리 내어 웃고, 푸른 하늘에는 실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끝)-3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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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니마미 2009-11-16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읽어야 할 책으로 토지를 생각해 둔 지 어언 10 여년
그런데도 왜 이렇게 숙제가 안 되지요? ㅎㅎ
읽고 또 쓰시기 까지?

웽스북스 2009-11-22 01:50   좋아요 0 | URL
아. 토지읽기는 두번째였어요. 박경리 선생님 돌아가시고, 모임을 만들어서 함께 읽는데 1년도 넘게 걸렸어요. 우리 부족 모임에서 제가 제일 열등생이듯, 토지모임에서도 제가 제일 느림보 열등생이었거든요. 밑줄은 천천히 남겨놓으려고요. 흐흐.

순오기 2009-11-17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21권이군요.
서희의 몸을 감고 있던 쇠사슬이 떨어지는 순간~~ 눈물이 솟구쳤지요.

웽스북스 2009-11-22 01:51   좋아요 0 | URL
아. 그러게요.
그러고보니, 드라마는 이걸 어떻게 표현했을까. 갑자기 궁금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