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김중혁의 소설을 집에 오는 길에 지하철을 읽다가 막 웃었다. 인생의 한 시기쯤은, 이런 친구와 함께 치열하게 빈둥거리는 것도 매우 즐거울 것 같은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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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과 나는 언제나 입사시험을 함께 치렀다. 같은 회사에서 근무하고 싶다는 생각이 큰 탓도 있지만 혼자서 시험을 친다는 게 불가능하게 여겨질 정도로 M과 나는 분리될 수 없는 사이였다. 우리는 동전의 앞면과 뒷면이거나 한 사람의 앞모습과 뒷모습이었다. M이 사라지면 나는 두께가 없는 종잇장처럼 변해버려서 혼자서 서 있을수조차 없을 것이다. 나 역시 M에게 그런 존재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서른 번의 입사시험을 함께 치렀다. 백전백패. 승률은 제로였지만 혼자서 시험을 쳐야겠다는 생각은 한번도 들지 않았다.
우리는 면접시험도 함께 치렀다. 함께 치른 정도가 아니라 언제나 면접실에 함께 들어갔다. (중략) 함께 면접을 봐야 우리의 진가를 보여줄 수 있다며 인사담당자를 들볶았다. (중략)
우리는 '면접시험의 역사'를 새롭게 쓰자'라는 포부를 가슴에 품고 새로운 형식의 면접을 시도했지만 면접관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새로운 레퍼토리를 만든 만담 듀엣의 심정으로 면접관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했지만 시간도 채우지 못하고 쫓겨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중략)
인터넷 기획 회사의 면접을 볼 때는 둘이서 만담을 했고 - 면접관들은 단 한번도 웃어주지 않았다 - 애니메이션 제작회사의 면접을 볼 때는 어설픈 마술쇼를 하기도 했으며 - M이 소품으로 준비해둔 손수건에 불을 잘못 붙이는 바람에 천장에 붙어 있던 스프링클러가 작동됐다 - 영어교재회사의 영업직 사원 면접시험 때는 지하철에서 물건을 파는 행상의 모습을 재연하기도 했다 (중략)
어제의 면접 준비는 나름대로 철두철미했다. 우리는 저녁을 먹으면서 회사 홈페이지에서 다운받은 자료를 읽고 또 읽었다. 컴퓨터게임 회사였고, 게임 기획자와 게임 테스터를 구하는 중이었다. 응모자격란에는 '기초적인 프로그래밍이 가능하신 분, 새로운 아이디어가 넘쳐나는 분, 상상력이 뛰어나신 분, 게임에 자신이 있는 분, 게임 하나를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분' 이라고 적혀 있었다. (중략)
면접관 앞에서 실뭉치를 푸는 이벤트는 그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다. 연습도 필요없었다. 헝클어진 실뭉치를 푸는 일은 연습으로 도는 일이 아니다. 끈기와 인내로만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대사 몇마디만 준비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저희들을 소개하는 대신 한 가지 보여드릴 게 있습니다. 컴퓨터 게임을 테스트하는 일은, 엉킨 실뭉치를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 단계 한 단계 참을성 있게 실을 풀어나가면 언젠가는 모든 매듭을 풀 수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멋진 대사였다. 면접관들의 반응도 좋았다. 우리가 파란색 실뭉치와 빨간색 실뭉치를 종이가방에서 꺼낼 때 어디선가 낮은 탄성이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대기실에서 실뭉치를 너무 헝클어놓았다. 그리고 우리가 사온 실뭉치는 너무 컸다. 1분도 지나지 않아 우리들 이마에는 땀이 맺혔다. 3분이 흐른 뒤에도 상황은 나아지질 않았다. 5분이 흘렀을 때는 온몸이 땀으로 뒤덮였다. 손바닥에 고인 땀 때문에 실이 더 엉켜서 5분 동안 30센티미터 정도의 실밖에는 풀어내질 못했다. M은 매듭을 푸는 대신 실을 마구 잡아당겼다. 그 때 내가 한숨을 쉬었다. 뒤이어 M이 낮은 소리로 "에이 씨"라는 소리를 냈다. 그걸로 모든 게 끝났다.
"됐습니다. 그만 하세요. 아이디어는 참 좋은데 두분 다 참을성이 부족하신 것 같군요. 실푸는 연습을 더 하고 다시 한번 도전해 보세요" (중략)
"아까 네가 한숨을 쉬지 않았으면...."
"그래서 내 탓이라고?"
"아니, 내가 먼저 한숨을 쉬었을 거라고"
"네가 한숨을 먼저 쉬었으면 내가 에이 씨발, 했겠지"
백전백패하더라도 우리는 그런 사이였다.
김중혁 <악기들의 도서관> - 유리방패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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