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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의 끝자락이다. 실은 놀만큼 놀았으니 양심이 있다면 내일 회사 당연히 가야지, 라고 생각은 하고 있다. 그리고 당연히 회사에 가겠지만 오늘밤은 아마 늦게까지 꽤 잠들기 싫을 것 같다. (라고 말하지만 실은 어제 3시간밖에 못자서 일찍 자야 할듯 ㅜㅜ)
맨날 보는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 책을 읽는 건 명절 전용이다. 지난 추석 때는 김우창 전집을 읽겠다고 옥편 껴안고 씨름하다가 졸고 졸고 결국 1권도 다 못읽었고, 이번 설 때는 저 프로이트와의 대화를 읽겠다고 하긴 했는데 전기장판이 나를 너무 안락하게 만들어준 관계로 보다 잠들고 보다 잠들고 하다가 또 결국 다 못읽었다. 하튼 연휴 땐 그냥 쉬지, 왜 본인에게 계속 숙제를 내주는 것 같은 심정으로 연휴를 맞이하는지, 그래서 다 하지도 못하고 결국 자책하고, 그거 하느라 다른 것도 못하고 하는지 원. 귀한 연휴의 나쁜 주인이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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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당일 저녁에는 목사님 댁에 다녀왔다. 이모네 가족이 집에 온다고 해서 침대에 누워 기다리다가 사모님의 문자를 받았는데, 글쎄, 12월에 입대한 M이 온다는 것이다. 아직 100일도 안된 신참이 어찌 나올까 싶어 처음에는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고 있었는데, 깜짝 놀래켜 주자고, 얼른 오라고 하시는 바람에 급하게 선물세트 하나 챙겨 목사님 댁으로 택시를 타고 날아갔으나, 얼마 전 이사하신 목사님 댁을 못찾고 엄하게 헤매다가 결국 M과 거의 동시에, 아니 살짝 늦게 도착해 버린 사건. 놀래주기는 커녕, M의 친가 외가 할머니와 이모, 작은아빠 등 모든 친척들이 모여 있고, 모두의 시선은 M에게 쏠려 있는 엄한 상황에 나는 살짝 꿔다논 보릿자루 모드. 이 무슨 분위기인가 싶어 민망한 가운데 M의 동생 B의 방으로 얼른 들어가 침대에 엎어지며, 어머 얘야 나는 그냥 M얼굴 한번 보자고 온 건데, 이 무슨 분위기니, 민망하구나, 라며 넋두리를. ㅋㅋ B도 군복을 입고 온 제 오빠가 영 어색한지 말을 못붙인다. M이 군대에 갈 때 친동생인 B보다 더 많이 울었던 사촌동생 E도 역시나 어색해 죽는다. 우리 여기서 어색 시스터즈 놀이나 하고 있을까? ㅎㅎ
세배를 마친 M과 저녁을 먹으며 이래저래 이야기를 하는데, 오마낫, 애가 12KG이나 빠졌다. 성악을 하는 애라 배가 많이 나와 있었는데, 완전 평면 배가 되었구나. 얼굴은 윤곽이 생겼다. 모든 친척들이 M과 한마디라도 더 나누고 싶어하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그래서 나는 굳이 M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어차피 M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은 한정돼 있으니까. M은 참 많은 사람들에게 특별한 존재이다. 나에게도 M은 참 귀하고 특별하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M을 특별하게 여기는 그 마음, 그 기대감에 부응하는 게 M은 조금 버겁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들일 수 있는 시간과 노력은 한정돼 있으니 말이다. 암튼 그 귀하고 특별하게 여겨지는, 사랑받을 수 밖에 없는 M의 성정은 군대에서도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는 듯 해 좋아보였다. 좋은 사람 옆에 결국은 좋은 사람이 모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나는 여러 사람을 통해 믿게 되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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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아름다워 실천편,이라며 어제는 효도놀이를 했다. 어제의 효도놀이의 메인 컨셉은 "엄마가 나랑 놀아줬으면 좋겠어" 였다. 맨날 엄마의 놀아줘, 라는 말에 생색내며 놀아주거나 혹은 안놀아주어 엄마를 삐지게 만들거나 했었는데, 어제는 내가 막 놀아달라고 졸랐다. 햄버거를 먹고 싶어 죽겠다며, 엄마랑 같이 나가서 먹고 싶다고, 내가 엄마랑 잘 놀아주니까, 내가 엄마가 필요할 때는 엄마가 나랑 좀 놀아줬으면 좋겠다고 막 조르고(아, 오해 없길, 엄마는 새우버거를 엄청 좋아하신다), 저녁에는 내가 훌라가 너무 하고 싶다고 엄마가 나랑 몇판만 좀 해달라고 조르고. 그러면서 중간 중간 엄마가 하고 싶다는 것도 이것저것 같이 해주고. 결과는 나름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V 또 니가 그렇게 하고 싶다면 엄마가 해줘야지, 막 이러시면서, 흐흐. 12시에 훌라를 하다가 G언니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언니가 설에 뭐했냐기에 나는 훌라를 100판 정도 했다고 말했다. 언니는 내가 늘 오백개, 백만번, 이런 말을 하듯 과장법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난 정말 100판 정도를 했다 -_-V 그냥 고스톱을 배울까? -_-
밤에는 효도놀이 완성본이라고, 훌라를 마치자마자 또 엄마 아빠 어깨와 다리를 주물러드리는데, 새벽 2시가 되서야 효도놀이가 끝났다. 아, 정말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 뭐든 적당히 하면 좋은데, 하튼 꼭 벼락치기로 하고 나가 떨어진다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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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아빠의 다리를 주물러드리느라 안방에 상주하면서, 집에 단 하나 TV를 처음 봤는데, 와우, 이거 완전 좋구나. 미처 몰랐다. 보고 싶던 드라마들을 이렇게 다 볼 수 있다니. 이론적으로 알고는 있었는데, 실제로 만나니 이렇게 좋을 수가! 어제는 재작년에 무지 재밌게 봤던 스윙걸스를 보고 오늘은 메피님이 추천해 주신 녹차의 맛을 보고 나서 올드미스다이어리를 몇편 봤다. 안그래도 다시 보고 싶은 게 좀 있었는데 흐흐. 우리 지피디랑 미자씨 정민씨 나오는 부분만 돌려가면서 봤다. 할머님들, 우현삼촌 죄송해요. (제가 할머님들이랑 우현삼촌도 진짜 좋아하긴 했는데, 없는 시간에 콤팩트하게 보느라 어쩔 수 없었어요) 한달만 시범으로 설치한 거라 며칠 있다가 가져간다는데 진작 알았으면 아마 시간 많이 죽였을듯 -_- ㅋㅋ 실은 회사 때문에 몇 달 후에 메가 TV를 달아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계속 보고 싶어하는 아빠를 만류해 일단 철수(?)하라고 시켰으나, 그 유혹 꽤나 달콤하구나. 정말 TV의 패러다임이 앞으로 많이 변하겠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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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구박이 끝이라고 생각했건만, 그 이후 찾아오는 예상치 못한 손님이 있었으니, 명절 기간동안 집안에서 구박을 받았던 교회 집사님들의 조카, 혹은 도련님(?) 구제의 압박이라고 해야 하나? 이것도 하필, 교회에 미혼 성인 여성이 딱 4명인데 (그나마 한명은 작년에 시집가서 4명 남고) 2명은 스무살 스물 한살이고, 1명은 내 페이퍼에 자주 등장하는 C양인데, 교회 동기인 T와 열심히 연애중이니 내가 유일한 타겟이 되버린 사건이다. -_- 암튼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니 그분들도 집에서 구박이 장난이 아니었겠구나. 이제 타인의 고통까지 읽히는 지경이라니 하하. 암튼 명절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로 피곤한 날이기도 한가보다. 미혼은 미혼대로, 기혼은 기혼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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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엄마가 와서 '오늘은 내가 안놀아줘도 되니?' 라고 물어보고 가신다. 어제 3시간 밖에 못잔 피곤한 나는 '응 오늘은 괜찮아, 다음에 내가 또 조를게', 라고 답했다. 엄마는 '열심히 졸라야 놀아줄 거야' 라며 거만한 표정으로 가신다. 아, 역시 나의 효도는 한계가 너무나도 명확하다. 이래서 사랑은 내리사랑만한 것이 없다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