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작품을 대야 하는 자리에서, 고민 끝에 내가 대는 작품은 '난쏘공'이다. 시간이 많이 지나긴 했지만, 이 작품이 내게 주는 울림은 깊었고, 여전히 깊이 남아있다. 그건 그 작품 안의 문제들이 비록 그 형태를 달리하였으나, 오늘날까지도 계속 되고 있기 때문이겠지.

지난 초여름, 코엑스에서 있었던 도서전에서, 다른 책들은 거의 구경만 하고 지르지 않았다. 어차피 온라인 서점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이니까. 대신 나는 서점에서 어쩐지 사기 어려울 것 같은 작가세계에 눈이 휙 돌아갔었다. 좋아하는 작가들로 고르고 골라 6권을 샀는데 그 중 조세희가 2권이다. 1990년판과 2002년판이다. 12년간의 간격을 두고 같은 사람의 세계가 어떻게 다르게 평가되고 해석되는지 궁금해서 두개다 구매를 했다. 하지만 게으른 아가씨, 그걸 읽었을리 없다. 그저 책장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작가세계들, 그중 오늘 2002년판 조세희를 꺼냈다. 이실직고하자면 1990년판을 먼저 꺼냈는데, 글씨 판형이 옛날스러워서 못읽고 다시 덮었다. 일단 인터뷰 쪽부터 읽었는데 뭉글뭉글해지는 부분이 있어 옮겨 놓는다.

난쏘공 이후로 최근에는 절필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작가세계를 보니 '하얀저고리'라는 장편을 냈다고 한다. 그런데 알라딘에서도, 네이버 검색에서도, 출판사 홈페이지에서도 찾을 수가 없네, 혹시 아시는 분 계신가요?

   
 

그때 난장이 이야기를 쓴다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어요. 작품에도 나오지만 실제로 어느날 나는 그 시절 최약자들이 몰려 사는 재개발지역에 쇠고기 조금 사들고 가 그것으로 국도 끓이고 굽기도 해 집이 헐리면 당장 거리에 나앉아야 되는 세입자 가족들과 그 집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살길이 막막한 그집 가장이 국에 밥을 말던 모습이 생각나요. 우리가 식사를 반도 못끝냈을 때 철거반이 철퇴로 대문과 시멘트 담을 쳐부수며 들어왔어요. 나는 지구가 큰 폭격을 받아 깨지고 뒤집히는 줄 알았어요. 그날 지옥의 사자와 같은 철거반과 이미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그 집에서 싸우고 골목 밖에서도 싸우고 철거민 가득한 동회 앞으로 가 또 싸우고 돌아오다 나는 작은 노트 한 권을 사 주머니에 넣었어요. 모나미 볼펜 한자루도 끼어 샀던 것 같아요. 나는 그 노트에 '난장이' 연작을 쓰기 시작했어요. 비상계엄과 긴급조치가 멋대로 내려지는, 그래서 누가 작은 소리로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말만 해도 잡혀가 무서운 고문받고 감옥에 갇히는 유신헌법 아래서 나는 일찍이 포기했던 소설을 한 편 한 편 써나갔어요. 매 작품을 늘 긴급하다는 마음으로 여유 없이 썼다는 뜻예요. 그때 우리땅은 인류가 귀중한 가치로 치는 것들이 모조리 부정되는 그런 불행한 세상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이 부분에 닿으면 인류가 적으로 치는 반인륜 독재자들, 예를 들면 니카라과를 유린한 소모사나 우간다를 통치한 이디 아민, 적도 기니를 지배한 엥게마 같은 인물을 떠올리게 돼요. 저희 나라에서 그들은 중세시대와 똑같이 왕이었죠. 그들은 몇이서 나라 전체를 소유했어요. 박정희가 그런 힘을 가졌었죠. 그래서 나는 지금도 박정희, 김종필, 이후락 등 이 땅 쿠데타의 문을 활짝 연 내란 재일세대 군인들이 무력으로 집권해 피 말리는 억압독재를 계속하지 않았다면 '난쏘공'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이백자 원고 용지로 계산해 마흔 몇 장 짧은 것들로 이루어진 난쏘공은 그 하나하나를 따로 놓고 보면 힘이 없어요. 분열된 힘예요. 책으로 묶자 그것이 달라졌어요. 그런데 조급성에서 좀 벗어나 없는 여유라도 가지려고 노력하며 처음부터 장편으로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이것은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내가 생각해보는 것인데 그렇게 했다면 물론 독자가 열두 개의 조각을 모아 긴 작품으로 각자 자기 상상력과 능력에 맞추어 읽는 기회를 박탈했을 것이고, '난쏘공'은 어느 한 싸움에 나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정체를 빨리 잡혀 죽었을 겁니다.

 

 

 

내 난쏘공은 대학 때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게 아쉬워 작년에 다시 구매했다가, 올 봄 어느 모임에 가지고 나가 다른 분의 손에 들려줬다. 꽤 좋아하던 분이어서, 그리고 밑줄이나 메모 없이 깨끗하게 읽어서 기쁘게 드렸다. 아마 밑줄이나 메모가 있었다면 오히려 보내지 못했을 듯. 다시 사겠다는 생각으로 보냈는데, 아직 못사고 있다. 하얀 저고리를 어떻게 구할 수 있는지 알게 되면, 같이 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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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7-11-14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난쏘공' 여러차례 읽었고, 독서모임에서도 토론이 분분했던 책!
이제는 우리 딸이 읽으며 감상을 토로합니다. 엄마가 살던 시대가 이랬느냐고?
그런데 지금이라고 크게 달라졌을까 싶어... 먹먹합니다!

웽스북스 2007-11-12 12:45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따님의 감상도 궁금해지네요 ^^

푸른석류 2007-11-14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인터뷰 어디에 실린 것인지 알 수 있을까요? 논문쓰는데 참고로 하고 싶습니다. ^^

웽스북스 2007-11-14 22:55   좋아요 0 | URL
작가세계 2002년 가을호입니다 ^^
쓰신다는 논문 궁금하네요

웽스북스 2007-11-15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얀저고리는 여전히, 탈고중인 작품이랍니다, 역시 조세희선생님 ㅠ 꼭 탈고해주세요

Hani 2007-11-19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학교때 책대여점에서 난쏘공을 빌려서 처음 읽었습니다. 그 후로 시간이 꽤 많이 흘렀는데.. 얼마 전 헌책방에서 난쏘공 1979년판을 발견하고 기쁜 마음에 샀답니다. 누렇게 바랜, 세로줄의 책이지만 오래된 책냄새가 참 좋네요. 조만간 다시 읽어보려 합니다. 조세희님의 다음 작품이 궁금해지네요^^

웽스북스 2007-11-19 01:22   좋아요 0 | URL
누렇게 바랜 그 세로줄 책은 문학과 지성사에서 나온 판인가요?
동네 책 대여점이 참 좋았네요- 우리동네는 이상한 것 밖에 없었는데, 전 고등학교 때 학교 도서실에서 봤던 것 같기도 하고- 이책은 봐도봐도 좋아요- 두번 이상 읽은 몇권 안되는 책

아 하얀저고리, 탈고해주시지 ㅠㅠ

Hani 2007-11-19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과 지성사에서 나온 판 맞습니다^^

웽스북스 2007-11-19 12:04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 새 버전도 옛 버전도 다 좋아요 (무한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