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의 인류학자 - 뇌신경과의사가 만난 일곱 명의 기묘한 환자들
올리버 색스 지음, 이은선 옮김 / 바다출판사 / 2005년 10월
구판절판


I씨는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사고를 당하고 몇 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더라면 색맹을 '치료하려고' 모든 수단을 동원했겠지만 이제는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는 세상이 질서정연하고 완전하기 때문에 그런 제안 자체가 어리석고 불쾌하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80쪽

우리는 가끔 의식과 도덕과 양심의 무게, 본분과 책임과 의무의 무게가 감당하기 힘들게 느껴질 때면 억제의 틀을 부수고 이성의 세게에서 탈출하고 싶어진다. 전두엽을 벗어나 휴일을 누리고, 감각과 충동으로 이루어진 디오니소스의 축제를 즐기고 싶어진다. 이것이 전두엽 과잉에 시달리며 억눌려 있는 문명인의 본능이다. 인간은 누구나 전두엽을 잊고 잠시 휴일을 즐겨야 한다. -112쪽

전두엽절제술과 절리술이라는 엄청난 사건은 1950년대에 자취를 감추었지만 이는 의학계의 반발로 보류된 것이 아니라 신경안정제라는 신종 도구가 개발된 덕분이었다. 신경안정제는 정신외과처럼 부작용이 없는 강력한 치료법이라고 선전되었다. 하지만 신경학적으로나 윤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정신외과와 신경안정제가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하는 불편한 주제다. 신경안정제도 다량으로 복용하면 정신외과처럼 평안함을 유도하고 정신병 환자의 망상을 잠재울 수 있다. 하지만 신경안정제의 고요함은 죽음의 고요함과 비슷하다. 게다가 역설적으로 자연적인 해결의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고 환자를 약물로 인한 질병 속에 평생 가두어 놓는다. -112쪽

그는 능숙한 손길로 동상을 꼼꼼히 더듬으며 전과 다르게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지었다. 시각장애인이던 시절에 그가 얼마나 능숙하게 독립적으로 살았는지, 두 손으로 얼마나 쉽고 자연스럽게 세상을 경험했는지, 우리가 지금 얼마나 그를 몰아세우고 있는지를 느끼게 된 순간이었다. 우리는 그에게 손쉬운 방법을 버리고 어렵고 낯선 방식으로 세상을 인식하라고 요구하는 셈이었다. -202쪽

시각장애인도 나름대로 온전한 세계를 구축하고 시각장애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완벽하다. 시각장애인을 무능하다거나 사회부적격자라고 여기고 시각장애를 문제로 생각해 그것을 고치려 드는 사람들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라는 것이다. -210쪽

프랑코는 자나 깨나 폰티토 생각뿐이었고 환영 속에서도 폰티토를 보았고 정말 살기 좋은 곳으로 묘사했지만 정작 돌아가겠다는 결심은 하지 않았다.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있을까? 하지만 원래 향수의 중심에는 역설이 도사리고 있다. 향수는 이루지 못할 상상이고 실현되지 않을 때에만 존재할 수 있다. -247쪽

프로스트는 인간을 순간의 퇴적으로 간주했고, 순간의 기억은 이후 벌어진 일을 더 이상 통보받지 않으며 잼항아리처럼 완전 밀봉 상태로 머릿속 창고에 보관된다고 했다. -251쪽

나는 자폐증 화가 제시 파크를 찾아갔을 때 딸에게 엄청난 애정을 표현하는 부모님을 보고 가슴 뭉클한 적이 있었다.
"딸을 얼마나 아끼시는지 피부로 느껴지던데 따님도 부모님을 잘 따르나요?"
내가 물었을 때 그녀의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아이의 능력이 닿는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해 우리를 사랑하고 있을 겁니다."-302쪽

아스퍼거는 캐너보다 훨씬 분명하게 이런 가능성을 예견했다. 따라서 '고도의 능력'을 갖춘 자폐증 환자들은 아스퍼거증후군 환자라고 불린다. 가장 근본적인 차이점을 밝히자면 다음과 같다. 아스퍼거 증후군 환자들은 과거의 경험과 느낌, 심리상태를 이야기할 수 있지만 전형적인 자폐증 환자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 전형적인 자폐증 환자의 머릿속에는 우리가 들여다 볼 수 있는 창문이 없다. 하지만 아스퍼거 증후군 환자들은 자의식이 있고 부분적이나마 자아성찰과 보고가 가능하다. -3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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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무식한아가씨의반성록
    from 지극히 개인적인 2007-09-24 23:24 
    이 책을 읽게 된 사연은 다소 독특하다. 지난 봄, 지인들과 '인생의 책'을 나눌 일이 있었는데, (엄밀히는 경매) 이 책은 내가 좋아하는, 심리학을 공부하고 싶어 하는 민정언니가 가져온 책이었고, 나는 필사적으로 심지어는 원가보다 비싼 가격에 이 책을 데려왔다. 와인을 한 잔 마셨던 탓이라 변명하지는 않겠다. 하하! 그냥 그날의 분위기가 그랬다. 후회같은 건 하지 않아요, 책값이 얼마였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ㅋ 이 책은 뇌신경학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