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죽음의 가면 기담문학 고딕총서 2
에드거 앨런 포 지음, 김정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김영하의 신작 '여행자'를 읽다 보면 번역가 김화영님의 말을 인용해 놓은 부분이 있다. "한번 간 곳을 또 가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묘미다" 그 장소는 거기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데, 세월이 흘러 변한 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그것이 진짜 여행이 주는 매력이라는 것이다. 자꾸만 다른 것들이 들어오게 되고, 이전에 보지 못했던 데서 감흥을 느끼게 되는 것, 이는 무릇 여행 뿐만이 아닐 것이다. 세월이 흐르게 되면서 새로이 보이게 되는 것들, 내가 변한 만큼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들의 진수는 나는 역시 '책읽기' 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애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많이 접해본 것은 아니었다. 중학교 때 아빠가 아는 분을 통해서 (지금 생각해 보면 정에 이끌려서?) 구매하셨던, 실은 구성이 그리 훌륭하지는 않았던 추리 전집에 들어있던 애드거앨런포 작품집 '모르그가의 살인 사건' 안에서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역시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검은 고양이'였다. 그 때 내게 이 작품이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사건의 잔혹함 자체가 주는 그 소름 끼치던 막연한 공포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10년도 더 흐른 지금(어머, 정말? 순간 계산하면서 진짜로 충격 받아버린 사건 ㅠ) 다시 읽은 검은 고양이에서, 내게그런 잔혹함은 그리 큰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다. 사실 그간 살면서 공포나 잔혹함에 대해서 나는 또 얼마나 많은 작품들을 읽고, 보며 겪어 왔던가. 그 정도의 잔혹함-눈알을 파고, 목을 매달고, 도끼로 찍어서 벽에다 묻어 다시 벽을 바르는-은 여전히 잔혹하긴 하지만, 새롭거나 특별할 것은 없는 정도의 잔혹함이었다. 거친 세월을 살아온 건가? 아니면 거친 작품들을 많이 만나서 그런 건가? 이제 마음만 먹으면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영상으로도 구할 수 있는 정도의 공포다.
 
하지만, 나는 예전의 순수한(?) 아가씨는 보지 못했던 그 인간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약함으로부터 비롯한 악함, 그것에 대한 근본적인 두려움, 그리고 그것이 불러 오는 공포에 주목한다. 끔찍할 정도로 무서운 자기 중심적 사고, 자기애, 그리고 보호본능, 그것으로 인해 자기 안에서 키워 가는 생각, 편집증적 두려움, 이것이 이 작품에서의 공포의 핵심이다. 심지어 그런 공포의 극한에서도 '자기 과시'를 잊지 않아 주시는 인간은 또한 얼마나 아이러니하고 소름끼치는 존재인가. 분노로 환원된 두려움이 가져왔던 끔찍한 결과의 잔혹함은 오히려 부차적인 이야기이다. 검은 고양이 뿐만 아니라 이 책에 나온 다른 작품들 역시 공포의 핵심은 어떤 불가사의한 존재도, 잔혹한 사건도 아닌 '사람' 그 자체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베레니체에 나오는 편집증적인 집착에서 비롯한 공포, 구덩이와 시게추의 극한 상황에서 느끼는 인간의 공포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 폴짝 개구리나 아몬티야도 술통에서 표현된 조롱과 멸시가 가져다 주는 분노의 결과 등은 모두 인간 본연의 감정, 그리고 두려움에서 비롯한 것들이다.
 
포의 작품은 그대로 있었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 세월이 흐르는 동안 변해버린 건 그 작품을 읽던 나였고, 사람을 향한 나의 생각, 그리고 나의 내면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 이 작품을 전혀 다른 작품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지금도 변하고 있는 내가, 다시 10년이 흐른 후에 이 작품을 읽는다면 나는 또 어떤 감정, 어떤 모습에 주목하게 될까- 어디 한 번, 고운 모습, 아름다운 모습만 보이고, 괴기스럽고 두려운 사람의 내면 같은 건 보이지도 않는 30대 웬디아줌마가 되도록 곱게 곱게만 살아볼까? 그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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