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
에이단 체임버스 지음, 고정아 옮김 / 생각과느낌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작가들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쓰기 전에 꼭 거치는 의식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과거를 극복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것에서 시작된다. '쓴다'는 행위는 곧 인정을 뜻한다. 애써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스스로 기록함으로 그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 그래서 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쓰는 것이 가장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체인지링에서 그와 그의 친구 이타미 주조 감독의 인생을 뒤흔들었던 끔찍한 기억을 '그것'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었으며 작가 김형경은 자전적 소설인 세월에서 선배에게 성폭행 당했던 기억을 쓰기에 앞서 너무 괴로운 마음에 '모두가 예상하는 그런 일이 있었다'라고 돌려 말하고 싶은 마음을 극복해야만 했다. 

'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를 얘기하며 많은 사람들이 동성애와 우정을 언급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적어내려감으로써 자신을 극복하고 삶의 방향을 찾아 나가는 한 소년의 이야기로 정의하고 싶다. 

물론 이 책에서 배리와의 만남은 매우 중요하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 우정은 사랑만큼이나 치열했다. 마음을 쏟아낼 대상을 끊임 없이 찾던 그 시기에, 친구란 단순한 교감을 넘어선 집착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 작품에서 배리가 중요한 것은 그가 핼과 사랑과 우정을 나눈 대상이기도 하지만, 실은 핼이 집착한 대상이었고, 그 집착을 극복함으로 자신의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해 준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끝이 핼에게는 어떤 의미에서는 시작이었다. 이를테면 자신과 마주함의 시작이랄까?  

나는 핼이 배리를 좋아하게 된 이유에 주목하고 싶다. 배리는 그와 다른 존재였다. 아직 무엇 하나 주체적으로 결정해 나가는 것이 어려웠던 핼에게 에너지틱하고 주도적인 배리는 매우 매력적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배리의 죽음 이후, 헬이 그의 무덤에서 춤을 추지 못하고, (본인의 표현대로라면) 제정신이 아닌 채 날뛸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다시 혼자가 되서 스스로를 책임지고 결정해야 하는 상황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배리가 핼에게 자신의 무덤에서 왜 춤을 춰달라고 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핼이 춤을 출 수 있게 됐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배리가 죽고 처음으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찾아간 곳에서,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춤을 출 수 없었던 그는 다시 찾아간 배리의 무덤에서 춤을 추기 시작한다. 알고 있었지만 차마 받아들일 수 없던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딛고 일어서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은 글을 쓴다는 행위로 조금씩 완성되기 시작한다.(물론 삶이라는 게 끝까지 완성이란 없지만 말이다) 그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본인이 차마 들여다 보기조차 두려워하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받아들이는 작업이었다. 처음 사회사업가를 만났을 때의 핼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여전히 그는 두려워 하고 있었고, 자신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하지 못했다. 젠체하기도 하고, 이따금씩 과잉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고 묘사되던 그는 사회사업가에게 자신과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한 그 무엇도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즈본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자신과 배리 사이에 일어났던 일을, 또 그 기간 동안 본인의 내면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솔직하게 글로 써 내려가면서 핼은 지난 시간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된다. 그 관계를 꾸려나가는 데 있어서 건강하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도 인정하게 되고, 자신이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배리의 다른 모습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그는 자기 내면의 열망을 받아들이게 된다. 핼이라 불리기 원했던 소년. 실은 본인의 이름도 헨리였으면서, 그는 굳이 셰익스피어의 '헨리'를 차용해 본인을 핼이라 불러주길 바란다. 이름이라는 것, 불린다는 것은 단순한 기표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특히 그 시절에는 더욱 그렇다. 그저 듣기에 예쁘고 좋아서 자신의 또다른 이름을 만드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자신의 소망을 반영한다. 그는 글을 쓰고 싶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그에게 '시늉하기'의 일종이었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길은 부모님이 원하는 길과 달랐고, 매우 멀리 돌아가야 하는 길이었고, 실은 자신조차 그게 가장 맞는 일인 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 자신의 열망을 인정한다는 행위 자체가 그에게는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저 조심스럽게 조금씩 그 소망을 표현할 뿐 그 소망을 남들과 자신 앞에서 자신있게 인정하지 못한다. 특히나 글을 쓴다는 일이 더욱 그러하지 않은가. 

자신에게 없는 부분을 채워줬던 배리를 극복한 순간, 그는 스스로 자신의 결여된 부분을 채워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확실한 것은 없지만 '자신의 앞에 기다리고 있는 그 무언가'에 더 가까이 가는 길은 학교에 남아 영문학을 공부하는 일임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성큼 인생의 한걸음을 내딛게 된다. 그 시기 대부분의 아이들이 혼돈을 그저 혼돈으로 끝내고 마는 것에 비한다면, 자신을 긍정하고 어떤 상황적 당위성이 아닌, 마음이 원하는 것을 끌어내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된 핼은 행운아였을 것이다. 

그 이후 핼이 어떻게 살게 됐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아마도 계속 공부를 하고, 예쁜 아가씨를 만나 사랑도 해보고, 아마 살면서 몇 번은 더 흔들리며 자라갔을테고, 어쩌면 지금쯤 어디선가 좋은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지. 또 어쩌면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시기에 진심으로 자신을 존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던 핼의 삶이 조금은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라고 감히 바라고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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