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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베일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7
서머셋 모옴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평점 :
이 책을 읽으며 제인오스틴의 오만과 편견과 같은 시대의 작품이 아닐까 생각을 했다. 여기에 나오는 결혼관과 오만과 편견에 나오는 결혼관이 너무나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찾아보니 100년의 세월이 흘렀더라. 그 100년동안 결혼관은 지금 내 관점에서 볼 때 제자리에 있었구나, 물론 그 100년을 살아온 사람이 말한다면 천지가 개벽할 정도로 변했다고 말할런지도 모를 일이겠지만 말이다. 사실 생각해보니 그렇다. 그리고 100년이 또 지난 지금은 바뀌었나? 뭐가 얼마나 바뀌었나?
결혼에 대한 모습은 역시 많이 바뀌긴 했지만, 그 안을 살펴보면 가치관적 측면에서 예전의 그런 모습들이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부분으로 답습되고 있는 부분이 있다. 100년 후에는 또 달라질까?
아, 그리고 또 한가지! 바람피우는 남자의 그 전형이라니! 예전에 종종 들어가던 모 게시판에서 남편 바람 피우는 문제 전문이라는 모 님의 글을 읽으며 그 촌철살인에 놀랐던 적이 있었다. (그 분도 아마 책을 내셨다지) 뭐랄까, 그 적나라하면서도 촌철살인이어서 여전히 뇌리 속에 박혀 있는 그 글 속 바람피우는 남성, 그 모습 그대로인 이 책 속 찰스를 보니 100년전이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사실 한 편의 사랑과 전쟁 같은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는 느낌으로 술술 읽어 내려갈 수 있는 책이다. 그런데 이렇게 술술 읽어내려가다가 갑자기 지나쳐버린 문장에 다시 눈이 가게 된다. 아, 잠깐... 이 부분 다시 읽어볼까? 술술 내려가기엔 분명 아쉬운 문장들이 많이 있다. 잠깐 마음에 남긴다. 그리고 다시 읽어 내려간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키티의 성장에 주목할 수 밖에 없었다. 엄마의 인형처럼 결혼 시장에 나가고, 동생보다 먼저 결혼해야 한다는 이유로 아무 생각 없이 남편감을 고르고, 아무런 가책 없이 바람을 피우며, 그런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조차 모르는 이 철없는 여인을 보면서, 결혼하는 나이가 늦어지고 있는 지금의 현상이 오히려 다행인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결혼 후 파경을 맞이하게끔 하는 많은 문제들이 있지만, 오히려 이 시기에 그런 문제들은 더 팽배하지 않았을까? 다만 그 때 그 여성들은 제도적으로 억압받고 있었기에 표출하지 못했을 뿐.
암튼, 그토록 철이 없는 키티는 실은 어쩔 수 없는 계기로 삶의 지경을 넓히게 됐지만, 그것을 계기로 자신이 보지 못했던 삶의 새로운 의미와 가치들을 보게 된다. 적극적이고 당당한 듯 보였지만, 실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수동적으로 주어진 삶을 살아가던 그녀는 그러한 자신의 삶에 회의를 느끼고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며 좀 더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일들에 자신을 내던지며, 그렇게 자신을 변화시켜 나간다. 다른 사람의 삶을 들여다 보고 다른 시각을 접하면서 그녀의 영혼을 되찾기 시작한다.
사실 변화란 천천히 오는 것이긴 하지만, 한 순간에 시작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 순간에 시작되는 변화는 결코 한 번에 모든 것을 바꿔놓지는 못한다. 변화된 키티의 모습에 조금씩 익숙해져갈 무렵 그녀는 그녀의 의지보다는 본성에 가까운 육체의 정욕을 탐하는 모습을 보인다. 실은 이 부분을 읽으며 조금 당황했지만 오히려 이것이 완벽함을 추구하나 완벽할 수 없는 존재인 인간의 모습에 대한 서머싯 몸의 성찰이 돋보이는 부분이 아닌가 싶었다.
그 외에도, 30년이라는 세월을 아내와 가정이라는 굴레에서 한번도 자신의 뜻대로 살아온 적이 없었던 아버지의 심리에 대한 묘사 역시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제 자유롭고 싶은 그 마음, 하지만 그 마음을 여전히 남아 있는 아버지라는 굴레 내에서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하고, 여전히 의무에 충실한 모습을 보니 어쩐지 마음 한켠에 씁쓸해져 왔다.
이 소설에서 화려하고 달콤하게 잠깐 빛났던 건 키티와 찰스의 사랑이었겠지만, 책을 덮은 후 마음에 남는 것은 월터의 사랑이다. 한 번도 자신을 사랑한 적이 없었던 키티를 끝까지 사랑하면서 (한 번 정도는 사랑으로 마음이 돌아설 법도 한데, 월터가 죽는 순간까지 키티는 그녀를 연민하고 존경할 지언정 끝내 사랑으로 돌아서지는 않는다) 분노에 떨고, 한없이 그녀를 증오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끝없는 자기에 대한 번민에 치닫는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자살(로 추정되는 죽음)을 선택하기까지, 그 마음이 어땠을까? 그러면서도 늘 자존심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그의 모습이 참 안타깝다. 사실 키티가 아무 생각 없이 선택한 남자 치고 그는 꽤나 '홈런' 감인데 말이다.
암튼, 보편적이면서도 전형적이지 않고, 재미있으면서 의미도 있고, 쉬우면서도 가볍지 않은 좋은 작품을 만난 기분이다. 영화는 이 책 속 성장과 변화를 어떤 모습으로 그려냈을지 궁금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