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미 - 박완서 산문집
박완서 지음 / 열림원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작가 박완서의 호미에서 그녀는 그녀의 삶을 되돌아보며 70년은 끔찍하게도 긴 세월이라고 말한다. 사실 길다면 길고, 또 짧다면 짧은 세월 70년, 그 시간동안 그녀는 참 많은 것들을 경험했다. 짧으나마 일제시대도 겪었고, 전쟁도 겪었으며, 사회의 급격한 변화도 겪었다. 개인적으로는 오빠의 죽음도 겪고, 부모의 죽음도 겪고, 자식의 죽음까지 겪었으니 시간이 참 길고 힘들게 느껴졌을 법도 하다. 하지만 그녀는 그 긴 세월을 이 책 호미 안에서 참 조곤조곤하게도 풀어놓는다. 이 책을 읽다보면 자연히 우리는 그 시간은 그녀에게 끔찍하게 길었던 시간이 아닌, 참 많은 것들을 선물해 준 시간이었고, 참 감사한 시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참 글을 쓰고 싶어진다. 삶의 작은 일에도 어쩌면 그렇게 많은 것들을 느끼고 고찰해 내는지, 사실 그 고찰들은 언젠가 나도 한번쯤은 생각해봤던 것처럼 가깝게 느껴지는 것들이 많아서 , 그러면서도 나는 절대 글로 이렇게 표현하지 못했던 것들이어서, 하나도 힘주지 않은 글을, 하나도 멋부리지 않는 글을 읽으면서도 그 내공이 실로 놀랍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나도 괜히 삶 속에서 맞닥뜨리는 작은 환경 하나 하나에, 뇌가 산문 버전으로 변모한다. 생각을 하는 걸 꼭 글쓰듯 하는 거다. 이런 느낌 알려나 모르겠다. ㅎㅎ 이건 왜이러지? 이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생각 자체를 '나는 그 순간, 이건 왜 이런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
 
책의 첫부분에서는 그녀가 아끼는 텃밭(꽃밭)을 가꾸는 이야기들을 한다. 지난 봄 꽃시장에서 화분을 잔뜩 사와 봄, 꿈, 맘이라는 사랑스러운 이름까지 지어주고는 죄다 죽인 전력만 아니었으면 아마 당장이라도 달려가 꽃을 사와, 나도 꽃에게 말이라도 걸고 싶은 심정이었다. 철따라 소소하게 피는 백여 종의 꽃을 키우며, 그것을 삶의 기쁨으로 삼는 모습이 참 예쁘다. 나이 들어 돈이나 자식의 출세가 자랑거리가 아니라 내 텃밭의 꽃이 자랑거리인 삶이라니, (그러고도 본인이 너무 으스대는 것 같다고 자책하는 그 마음이라니!) 나이 들어 내 삶도, 그렇게 소소하고 예쁜 자랑거리로 가득해지길 소원해본다.

그리고 책이 중간으로 가게 되면, 삶의 곳곳에서 그녀가 경험하고 느꼈던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여행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 또 크고 작은 사건들을 통한 단상들도 있다. 때로는 늙은이 노망이라며, 젊은이들 정치판에 한소리 하고 (하지만 글의 말미에 그녀의 딸에게 쓴 편지에, 본인이 노망이 들어서까지 명예욕으로 글을 쓴다면 부디 말려달라고 한 것으로 보아, 본인은 '노망'이라는 말이 진심은 아닌 듯 싶다) 자연을 사랑한다면서도 벌레들과는 한바탕 전쟁을 벌이는 자신의 이중성을 자책하기도 한다. 사실 이런 자책은 나 자신이 하루가 멀다하고 하는 것이어서 (결심과 삶과의 그 간극이라니) 존경해 마지않는 박완서 선생님도 스스로 이렇게 작은 걸로 자책하면서 사시는구나, 하는 생각에 다소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헤헷

앗 그리고 중간에 한 챕터를 '음식'에 할애했는데, 세상에나, 마치 이 배고픈 시간에 약을 올리는 것만 같은 그 음식에 대한 묘사라니! 오히려 너무 솔직하고 꾸밈이 없어 그 음식을 꼭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 먹어본 적도 없는 메밀 칼싹두기는 왠지 그 맛을 알 것만 같다. (물론 그 맛이 그 맛이 아니리라는 것은 안다) 그리고 강된장과 애호박에서는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된장을 뚝 떠다가 거르지 말고 그대로 뚝배기에 넣고 참기름 한 방울 떨어뜨리고 마늘 다진 것, 대파 숭덩숭덩 썬 것과 함께 고루 버무리고 나서 쌀뜨물 받아 붓고 보글보글 끓이다가 풋고추 썬 것을 거의 된장과 같은 양으로 듬뿍 넣고 또 한소끔 끓이면 되직해진다. 이 표현을 읽으며 우리 말이 참 예쁘다는 걸 다시 한 번 새삼 느낀다.  고작 혀 끝에 불과한 것이 이렇게도 집요한 그리움을 지니고 있을 줄이야 이 부분에 다다르면 어느 순간 배가 꼬르륵 하게 될 것이다. 흐흣! 게장에 대한 표현은 또 어떻고... 아무리 작은 양이라도 혀 전체가 반응하고 입 안의 점막까지도 그 맛을 한번만 보면 생전 잊지 못한다. 하하하, 박적골 게 번개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물론 지금은 없겠지만)
 
책이 마지막 부분으로 넘어가면서 흘러흘러 이제 그녀의 과거의 삶에 대한 이야기,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이 책은 단순한 하나의 산문집이 아닌, 그녀의 문학 세계들의 또 다른 연장선이 된다. 미처 하지 못했던 얘기가 되기도 하고, 그 후의 뒷얘기가 되기도 한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 를 읽으면서 참 꼬장꼬장하셔서 기억에 남았던 그 엄마, 하지만 엄마의 말뚝을 읽으면서, 나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그 엄마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차마 직접적으로 산문에 쓰기가 어려워 우회적으로 표현한 오빠의 죽음, 적어도 그녀의 과거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 이야기가 내게 낯설지 않고 오히려 반가웠던 건, 그간 그녀의 작품을 통해 그녀의 삶과 많이 마주해 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끝부분에서는 그녀와 함께 했던 소중한 인연들에 대해 나와 있다. 김상옥 선생님과의 인연이 참 인상적이다. 특히 그녀 아들의 죽음 앞에서 뭐라 위로해야 할지 몰라 절절 매는 김상옥 선생님의 모습을 보기가 어려워 선생님과의 인연이 끊어지게 됐다는 부분이, 참 인상적이었다. 주변 사람들과의 사별을 경험하지 못한 나로서도 그 마음이 이해가 되니 본인의 마음은 또 얼마나 절절했을까. 나목과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를 통해 여러 차례 소개된 박수근 화백과의 인연도 그의 사후까지 이어 나가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중간에 (아주) 살짝 등장한 오에 겐자부로에게는 괜히 인사 한 번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이문구 선생님과의 인연도 참 반갑게 느껴졌다. 한 번도 차를 마시거나 직접적으로 가까이 지내지 못했으나, 늘 마음으로 가깝게 느꼈던 사람. 물론 나의 작가들에게 괜히 친한 척 하고 싶은 마음과는 차원이 다른 관계이지만, 그래도 그 마음이 무언지는 왠지 알 것 같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는데, 그녀는 맨 마지막, 딸에게 쓰는 편지에 이런 말을 남겼다. 본인이 살짝 노망이 들어 괴발개발 글을 쓰게 되는 날이 오면, 그것은 사회적인 노망이니 모질게 제재해 달라고. 하지만, 노년의 작가에게 바라는 것은 부디 오래 오래 사셔서 많은 글들을 남겨주시길 바란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순전히 개인적인 욕심에서 박완서 선생님의 건강을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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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 2007-08-07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완서씨는 정말 내공이 출중하신 분이라는 생각. 전 작가의 산문집 읽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리뷰 정말 재밌게 잘 읽었어요.

웽스북스 2007-08-07 18:49   좋아요 0 | URL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박완서님은 읽기 쉽게 술술 쓰시는 게 좋아서 저도 자주 읽게 된답니다, 워낙 다작을 하셔서 전작 읽기는 포기했지만요 ㅋ

순오기 2007-08-10 0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칭 '완서님의 팬'이어서 책이 나오는 족족 읽었는데~ 좀 질리는 기분이어서 '오래된 농담' 이후 한 권도 안 읽었습니다. 좀 심했나요? ㅎㅎ
경남 하동에 최참판댁 복원하고 가진 제1회 토지문학상 시상식 때 박경리 선생과 같이 오신 완서님과 사진도 한 판 찍었는데... 두 거인이 너무 비교되더라고요!
하지만, 님의 친절한 서평 읽고 다시 '완서님의 팬'으로 돌아갈 것 같은 예감이라 추천!

웽스북스 2007-08-10 12:49   좋아요 0 | URL
우와~ 무한 영광입니다 ^^ 감사드리고 반갑습니다 순오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