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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생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4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6년 11월
평점 :
솔직히 인정하며 시작하자면 내게 이 책은 참 낯설고 어려웠다. 끊임없이 주어지는 시각적 이미지들을 머릿속에서 시각화 하는 것도 쉽지 않았으며, 그 시각화된 이미지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것도, 수없이 쏟아지는 그 기표와 기의들을 하나 하나 파악하며 넘어가는 것도, 그리고 앞에 나왔던 기표의 기의가 뒤에 나왔을 때 그것을 캐치하는 것도 내게는 모두 어려운 작업이었다
그래서, 그냥 내가 이해한대로, 내가 이해한 만큼의 리뷰를 써보려 한다. 사실 한 자 한 자 쓰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것은 내가 이해한 것이 사실은 책을 주의깊게 읽지 못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수도 있고 뒤에 가니 또 그게 아니었는데, 나 혼자 그 부분을 알아채지 못하고 넘어간 걸 수도 있으니까.
솔직히 이 책이 내게 어렵게 느껴졌던 건, 내가 터키라는 나라에 대해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름이 낯선 나라 만큼이나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그 나라에 대한 이야기들이 내게는 낯설기 짝이 없었고, 그래서 더 이해가 어려웠던 것 같다.
이럴 때 내가 좋아하는 건, 내 멋대로 일반화 하기. 다분히 주관적인 생각을 담아 혼자 일반화한 리뷰를 써보련다. 사실 너무나 다분이 내멋대로 쓰는 리뷰라 생각을 풀어놓기가 조금은 두렵다.
이 책에서 말하는 새로운 인생이란 어떠한 '유토피아'를 뜻할 것이다. 유토피아는 시대에 따라 사람과 그 의미가 다르겠지만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찾을 수 있는 지리적인 곳에 존재하는 성질의 것은 아닐 것이다. 버스를 타고 다니는 행위는 아마도 일련의 상징적인 행위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시대, 어떤 지리적 장소에도 누군가의 유토피아는 늘 존재해 왔다. 터키를 상대로 생각해 보는 건 조금 어려울 수 있으니, 가까운 우리 나라를 대상으로 생각해 보면, 근대 조선 시대에 누군가는 개화된 나라를 갖는 것을 유토피아로 여겼을 것이고, 반면 누군가는 지금의 체제를 유지하는 것을 유토피아로 여겼을 것이다. 일제 시대에는 독립된 국가를 갖는 것이 우리들의 유토피아였을테고, 그 독립을 억제해 현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또 누군가의 유토피아였을 것이다. 또한 독립된 국가를 가진 후에 사상적 대립이 있던 시대에 누군가는 맑스주의에 기반한 국가를 꿈꿨을 것이고, 누군가는 자본주의에 기반한 국가를 꿈꿨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는 민주화라는 유토피아를 통한 끝없는 열망과 그를 억압하는 세력들, 그렇게 사회가 발전해 가는 과정은 끊임없는 유토피아를 향한 열망과 그에 대한 반대되는 개념의 대립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리라.
이러한 유토피아가 존재하던 시기에는 크게 세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어떤 유토피아를 향해 열심히 달리는 사람, 그를 억압하거나, 혹은 반대되는 것을 향해 달리는 사람, 그리고 그와 상관 없이 사는 사람.
이 책에도 역시 세 종류의 사람이 등장한다. 어떤 종류의 새로운 세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세계를 접하고 그 세계를 향해 달리는 오스만, 메흐메트, 자난 등으로 대표되는 인물, 그리고 그 세계에 저항하려는 나린 박사로 대표되는 인물, 그리고 그와 상관 없이 살아가는 그저 평범한 사람들. (혹은 중립적 인물)
새로운 인생에서 말하는 그 유토피아가 거대 음모와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는 확실히 설명하기 어렵지만, 나린 박사는 책 속의 새로운 인생에 대해 저항하며, 또한 그 거대 음모에 저항하는 자이니, 그 둘은 어느 정도 일맥 상통하는 개념이 아닐까 한다. (새로운 인생의 저자인 르프크 아저씨의 사상을 대표하는 '철도'와 '카우보이' 역시 이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 새로운 인생이 말해주는 것은 그 나라에 다가올 거대한 변화의 물결이었으며, 오스만으로 대표되는 인물들은 아마도 그 거대한 변화의 물결에 매료되어 그것을 꿈꾸며 받아들이는 인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의 물결을 확인하기 위해, 버스를 타고 나라의 곳곳을 여행다닌 것은 아니었을까?
오스만이 다니는 여행은 이 책에서 크게 세 파트로 구분된다. 무작정 버스에 올라타, 새로운 세계를 찾기 위해 떠나는 여행, 그리고 나린 박사의 시각으로 다시 한 번 떠나는 여행, 그리고 그 모든 열망이 식어버리고 시간이 흐른 뒤에, 자신이 그토록 추구하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찾기 위해 떠나는 또 한 번의 여행.
그 여행 길에서 그는 터키의 전통 및 터키에 흘러 들어오게 되는 새로운 물결과 모두 조우하게 된다. 특색 있는 터키 전통 상품들이 하나 하나씩 규격화 된, 코카콜라, 럭스비누 등으로 대표되는 상품으로 대체돼 간다. 이러한 규격화된 상품을 파는 '대리점'들은 나린 박사에게 대항하는 인물들로, 책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세상에 동조하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더 이상 '우리 자신'으로서의 삶을 살 수 없는 것을 인정하고 변화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
여행의 과정에서 오스만은 새로운 인생의 선배격인 메흐메트를 다시 만난다. 그에게 열망의 시작이었던 메흐메트는 이제 그 열망과는 전혀 상관 없는 삶을 살고 있다. 한 때 그의 열망이었던 것은 이제 그에게 먹고 살기 위한 한 생존의 수단일 뿐이었다. 그리고 훗날, 새로운 인생의 저자인 르프크 아저씨에 대해서도 새롭게 알게 된다. 그는 그 책을 쓴 후, 어떤 신념을 갖고 그것을 지켰던 게 아니라 다시는 그런 책을 쓰지 말라는 검사의 말에 다짐까지 했던 인물이었던 것, 오스만은 자난에 대한 질투심으로 메흐메트를 죽이려 했지만, 종국에 방아쇠를 당길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이러한 사실에 대한 허망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서 파묵이 말하는 새로운 인생은 주인공이 읽은 책으로만 대표되는 것은 아니다. 터키의 수천가지 민요가 쓰여진 터키의 전통 캐러멜 이름 역시 '새로운 인생'이다. 결국 이는 각자가 꿈꾸던 새로운 인생들이었으며, 주인공은 이 새로운 인생을 모두 만나게 되고, 그 여행의 끝에서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두 세계를 모두 이해하게 됐을 때, 오스만은, 이제 균형잡힌 시각을 가진 한 사람으로 살아가길 원하지만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사실 이 부분이 조금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나는 광장의 이명훈이 남쪽과 북쪽 어느 쪽도 택할 수 없어 중립국 행을 택하고, 결국은 자살을 하게 된다고 쓸 수 밖에 없었던 최인훈의 마음과 조금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파묵 역시 전통적인 가치와 변화의 물결 속에서,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주기가 어렵지 않았을까? 결국 모든 이상은 다 나름의 이유를 갖게 마련이고, 그 가운데 무엇이 옳다, 무엇이 그르다, 라는 가치 판단을 흑백논리로 내린다는 것은 어려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새로운 인생은 근본적으로는 우리 나라도 온 몸으로 아프게 겪었던 그 몇 번의 대립들을, 유토피아를 향한 열망들을, 그 가운데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고, 좀 더 본질적인 것에 대해 고민을 하고자 노력하는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터키 버전으로 그린 책인 것이다. 우리 나라와 상황적으로 다르고, 문화적으로 달라 조금 낯설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우리 나라 해방 이후 문학들과 일맥 상통하는 면이 있는 책이었던 것.
몽환적인 분위기의 로드 소설로 정통적인 방법으로도 맞서기 어려운 본질적인 이야기들을 거침 없이 꺼낸 준 파묵의 작가적 재능에 박수를 보낸다.
* 하지만 너무 내 멋대로 단순화해버린 것 같아, 살짝 걱정은 된다는 거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