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여성 여성신학 시리즈 2
앨버라 미켈슨 지음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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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경험이 많았던 나는 그 안에서의 남녀 관계에 있어 남학생들이 자신의 권위를 주장할 때보다 여성들이 이러한 성경의 해석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며 자신의 삶에 있어서 주체적이지 못하고, 남성들에게 리드당하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을 볼 때 더 가슴이 답답했다. 그래. 답답했다. 그건 내가 그 말에 대해 충분히 반박할 논거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결국 무지했던 나는 이렇게 답하는 수 밖에 없었다. ‘잘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하나님은 절대 그런 의도로 말씀하셨을 리가 없어.’ 하지만 이미 문자화된 성경의 권위 앞에서 나는 너무나 무력했다.

내게 이 책이 좋았던 건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그 안에서 성경 해석에 대한 다른 방향을 제시해 주었던 것이다. 페미니즘이 극단으로 빠져들게 되면 결국엔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게 되는 일이 많이 발생하는데, 그건 나 또한 원한 바가 아니었기에, 속으로 가슴만 답답해 하고 있었다. 이 책은 물론 100%의 정확한 해답을 제시하지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성경을 객관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것들을 또한 객관적인 방법으로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었다. ‘케팔레’ 라는 단어 하나만 놓고도 그 지역과 시대의 상황과 언어적 특징 등을 모두 고려해서 그 정확한 뜻을 파악하는 과정에 있어서 참 조심스러웠던 건 그 정의에 대한 신뢰감을 더해줄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우리가 한 권의 소설을 읽는다 해도 그 시대와 상황을 고려해서 읽어야 하는 거였는데, 지금부터 수천년전에 쓰여진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을 문자 그대로만 보려 했고, 그 시대와 상황을 전혀 보려 하지 않았다니 말이다. 시대와 상황이 다르다고 진리가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진리를 어떻게 표현하는 지에 대해서는 그 시대와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인 것인데, 우리는 너무 눈에 보이는대로, 그것도 수없이 많은 번역 과정을 거친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려 했던 것은 아닌지, 하는 안타까움이 일어났다.

우리는 황석영의 ‘손님’ 이라는 책을 읽으며, 또 여러 상황들을 직/간접적으로 겪으며 성경의 권위라는 것이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 사용될 때 얼마나 무서운 폭력적인 결과를 낳는지에 대해 이미 뼈저리게 느껴왔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오신 이래로 그러니까, 성경이 쓰여진 이래로 여성은 번도 기득권의 입장에 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성경을 해석하는 작업에 참여하는 기회가 거의 없었을 것이고, 성경에 남성의 기득권을 보장하는 내용에 대한 해석은 당연히 남성 위주로 이루어졌을 것이기 때문에 여성들이 성경에 쓰여진 문자적 사실들로 인해 이러한 억압을 받아오게 된 결과는 당연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참 안타깝지만 말이다. 이건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는 일인 것 같다. 아니, 지난 책임을 묻는다기 보다는 나름대로 여권이 많이 신장되었다고 하는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여성들이 동참해서 바꿔야 하는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서 있었던 포럼에서도 여성 신학자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던 것처럼 말이다.

이 책에서 인용된 여성이 당하는 불합리함이 타락에서 비롯한 것이라면, 이제 예수님의 구속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런 것들은 사라져야 한다고 하는 견해는 정말 탁월했다. 물론 그럼에도 풀리지 않은 문제는 있지만,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숙제로 남겨놔도 무방할 것 같다. 케팔레에 대한 정의도 꽤 많은 연구 작업을 통해 상당히 진전된 부분을 보면서 앞으로 성경의 많은 부분들이 이렇게 재해석되고 또 연구 된다면, 적어도 성경으로 인해 그 성경의 권위를 신뢰할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이 억압받는 상황은 오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바울이 여성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지 않았던 건 그 당시에는 여성의 권리가 보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 역시 내게는 시원하게 다가왔다. 그러한 시대적 상황은 이해하려 들지도 않은 채 성경에 적혀져 있는 것만 보고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해 온 남학생들에게 이제는 시원스레 말을 해줄 수 있게 된 것 같아 개인적 차원에서는 정말 그게 기쁘고 감사했다. ^^

이 책을 읽고 서평을 쓰면서는 정말 괴로웠던 순간과 정말 시원했던 순간이 함께 존재했는데, 정말 인정하기 싫은 말이 그 신학자의 중심견해였기 때문에 그 말을 타이핑해야 했을 때는 정말 괴로웠다. 게다가 써머리의 과정에서 주어를 ‘나는’ 이라고 사용했기 때문에 그렇게 치면 이게 정말 내 의견이 되어 버릴 것 같아서 도저히 기쁜 마음으로 타이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그런 의견에 대한 멋진 반박을 해 주는 비평문이 있을 땐 너무 시원한 맘에 자고 있는 방순이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타타타탁! 타이핑을 하는 내 모습을 바라보면서, 아, 내가 이 책에 정말 감정이입을 많이 하고 있구나, 하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렇다. 이 책이 좋았던 한 부분은 논문의 발표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비평을 함께 실었다는 점이었다. 문자화된다는 것 역시 권력의 한 일환이라고 할 수 있고, 그게 독자들에게 읽혀질 때는 비평적 읽기가 불가능한 독자라면 그 말이 절대화 되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상황인데, 이 책은 특히 지식이 전달되는 차원이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이 훨씬 많아 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견이 제시된다면, 이러한 의견 역시 제시될 수 있다는 것 역시 함께 실어 논문에 쓰여진 내용들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비평적 시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 또한 읽으면서도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왠지 맘으로 수긍되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 내 맘을 나보다 더 잘 아는 듯이 해 놓은 탁월한 비평들은 나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절대적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이 책은 그 사실을 인정한 것 같아서 참 마음에 들었다.

이 책이 내 책꽂이에 꽂혀져 있는 것을 보고 많은 학생들이 와서 얘기했다. “이 책이 성경의 이해 서평 책이라구요? 잘됐어요! 남학생들도 이런 책을 좀 읽어야 된다니까요!” 라고 말이다. 나 역시 그 말에 기쁘게 동의한다. 그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이해하고 싶은 대로 이해했던 남학생들에게 이 책을 읽어 본다는 작업은 분명 의미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또 한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성경도 그렇게 자신이 해석하고 싶은 대로 해석하고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사용했던 남성들 중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고 또 반성(?)할 수 있는 사람은 또 과연 얼마나 될 것인지. 그래서 꼭 다짐했다. 선생님께 이렇게 말씀드리기로!

“이 책을 제대로 읽고 올바로 이해해서 서평을 쓴 남학생이 있다면, 소개시켜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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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03 10: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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