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학생일 때 한강 선생님을 깊이깊이 부러워했다. 너무나 단호하면서도 우아하고 자신의 앞을 제대로 응시할 수 있는 사람이라서. 혼자 가만히 있어도 그 가만가만함이 가장 유연하면서도 단단한 사람이라서. 그 중심이 고요히 빛나는 걸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해서. 내가 보는 한강은 그랬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싶다고 대학 내내 엄청나게 생각하고 노력했다. 그리고 당연히 실패했다.
실패의 요인은 방정맞음, 불성실함, 소모적인 생활, 우물쭈물하는 태도,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성질, 의지박약이었다. 열거하라면더 열거할 수 있지만, 아무튼 나는 나를 파악하는 자질만은 제대로 갖추고 있었고 그러므로 빠르게 포기했다. 한강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을. - P16

집에 오는 길에 누가 새둥지를 많이 찾는지 내기를 했다. 나무를 하염없이 둘러보면서 손을 꼭 잡고 집에 돌아왔다. 너는 둥지를발견하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이 작은 생명을, 이 예쁜 생명을 어떻게 하면 좋지? 엄마는 너무 무섭다. - P19

전 시어머니는 내가 아이를 낳은 순간부터 나를 껍데기‘ ‘밥통‘이라 불렀다. 살아 숨쉬는 젖 기계가 된 거 같고, 애 낳아서 나는 껍데기만 남은 거 같고.
그 말이 너무 싫고 슬퍼서 생각만 해도 진짜 숨이 쉬어지지가 않았다.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껍데기가 된다는 말이 있다. 너무너무 끔찍하다. 내가 시인이라 망정이다. 확실히 나는 운이 좋은 축에 속한다. 숨이 막힐 때 내 이름이 적힌 책등을 들여다볼 수 있고내가 발표한 지면들도 볼 수 있다. 진짜로 보진 않지만…… 그만큼 아이와는 독립된 영토를 갖고 있다는 의미에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 P25

나는 내가 끝없이 질문하면서 그 질문에 더 올바른 대답을 하려고 노력해야만 하는 이런 삶이 싫다. 왜 싫으냐고? 남자들은 안 그럴 테니까. 무언가를 이해하고 스스로에게 대답을 돌려주려고 애쓰는 것은 왜 늘 약자의 일인가? - P40

요즘 꼭 듣는 말은 ‘애는 어쩌고?‘이다. 남편은 그런 말을 한 번도 들은 적 없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일일이 여성혐오라고 정색하며 지적하지는 못한다. 어린 여자 후배로서, 나는 가끔 내가 술자리에서 동료 작가가 아닌 여성으로만 존재한다고 느낀다. 이전에는 몰랐던 것들이 이제야 눈에 보인다. 내가 몰랐던, 그냥 기분 나쁘고 불쾌했던 것들이 여성혐오였던 것이다. - P48

김현 시인은 21세기문학 2016년 가을호에 발표한 글 「질문 있습니다」에서 ‘왜 수치는 당한 사람의 몫이냐’고 물었다. 그 문장이 내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다. - P50

덕분에 나는 수업시간에 늘 학생을 향해 자기 고백의 시간을 갖게 된다. 사실은 내가 백인 남성의 책을 너무 많이 읽어버려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노라고… 내 안에 백인 남성이 떡하니 앉아 있다고……지금 그 사람은 코마 상태인데 영원히 깨어날 수 없게 영양 공급을 차단해버리려고 노력중이다. 이제 그만 숨을 거두소서. - P59

타인의 삶에 대한 얘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내가 독일 나치하에 태어났어도 나는 히틀러에 저항할 수 있었을까?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 생각할 때 나를 포함한 대부분이 자신을 유대인의 위치에 놓은 다음 그 시대를 상상하곤 한다고 느낀다. 모두 가해자보다는 피해자가 되고 싶어한다. 자신의 고결함과 존엄함을 너무 쉽게 믿는 게 아닐까. 나는 피해자다‘라고 생각하면서 오래 살았고, 이제는 내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했으며, 지금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래도록 말할 수없는 것들을 내 안에 적재하며 살아왔다. 그것을 내 안에 안전하게 가두어두면 모든 것이 잘될 거라고 믿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고, 말은 육신을 돌며 끝없이 메아리친다. 유령처럼 잡히지 않으며 모든 곳을 통과한다. - P66

내가 이혼을 했다고 해서 공공재가 된 것은 아니다. 내가 이혼한 것은 내가 되기 위해서이다. 언제나 사랑에 빠질 준비가 된 여성 1로 나를 보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이혼녀의 의미가 니가 나한테 마음을 품어도 된다는, 혹은 니가 마음을 주면 내가 보답할 거라는 뜻은 아니다. 정신 차려라. 너를 안 만난다고 해서 다른 남자가 있다는 뜻도 아니다. - P68

그렇지만 내 꿈은 이제는 사랑받는 것이 아니다.
아이가 내게 사랑을 준다. 그 사랑에 보답할 수 있는 체력과 체력에서 나오는 다정함을 갖고 싶다. - P80

사랑에 대한 갈망을 채워준 건 아이다. 절대로 나를 떠나지 않을 마지막 한 사람이 되어준 것으로. 매일 내게 선물을 준다며 작은 종이 쪼가리나 낙엽, 색칠한 그림을 들고 내게 와주는 천방지축 천사. 심지어는 엄마 엄마 너무 예뻐, 하고 매일 말해주고 뽀뽀해주고 세상에서 가장 큰 하트를 쏘아주는 나의 아이. 아이가 없었다면 더 자유롭게 살았을 텐데, 아이가 없었다면 이렇게 돈 벌려고 아등바등 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아이가 없었다면 가고 싶을 때가고 오고 싶을 때 올 수 있었을 텐데, 아이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도 그런 생각 자주 해. 그래도 아이 덕분에 나는 좀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 - P81

이제 내 꿈은 내가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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