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글이 누군가의 고통을 간편하게 밟고 쓰인 건 아닌지 성찰하는 태도 역시 필요했다. ‘고아처럼 쓸쓸했다, 처녀의 입술처럼 빨간 앵두, 과부처럼 농염한 단풍’과 같은 표현은 좋은 표현이라고 보기 어렵다. 간혹 페미니즘 이슈에서도 ‘나는 창녀처럼 강간당했다, 여성이 애 낳는 젖소입니까, 우리는 창녀가 아니다’라는 식의 구호를 쓸 때가 있다. 성노동 여성과 비인간 동물로부터 확실하게 거리를 두고 외치는 구호는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또 다른 폭력을 수긍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궁금하다. 배제하지 않는 구호, 여러 개의 팔로 모든 존재를 끌어안는 언어는 어떻게 가능할지.

사망자나 이재민을 이용하지 말고, 안이하게 동일시하거나 감상에 젖어 설교하지 말라는 사사키 아타루의 말은 타인의 고통에 접근하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절실한 윤리였다.

지금도 외숙모는 ‘외숙모’로만 존재하지 않았을 텐데. 그저 질문 하나 다르게 던졌을 뿐인데, 한 존재가 풍경에서 쑥 튀어나왔다. 나와 대화하고, 손잡고, 안을 수 있는 존재로.

중년 남성은 자본을 가진 ‘소비자’이지만, 아동과 엄마는 상대적으로 자본이 없고 ‘맘충’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민폐 캐릭터라는 사회적 편견까지 더해져 ‘노키즈존’이 탄생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니, 내가 자주 다니던 분위기 좋은 찜질방과 청포도 주스가 맛있는 카페도 노키즈존이라는 팻말을 당당하게 걸어놓은 곳이었다.

생각 없이 쓰는 언어가 실재하는 존재를 어떻게 지우는지 알아차린 사람은 쉽게 말을 뱉지 않는다. 나는 이런 태도가 글을 쓸 때도 배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크게 보면 문자 언어도 일부만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이지만, 적어도 글을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말을 걸 때는 시대의 감수성에 섬세하게 다가가는 서사와 표현을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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