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고요 문학과지성 시인선 312
황동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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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운대행때부터 풍장때부터 나는 황동규가 좋았다.
몰운대와 풍장을 말하는 이유는 그맘때 나는 마야코프스키와 브페히트의 선동에 심장이 뛰던
기형도와 김수영의 몇몇을 제외하고는 사무치고 분노하는 박노해와 백무산조차 풍족하지 않았어. 
이유를 알수 없었지.
왜 황동규가 좋은지.

긴장과 이완, 삶과 죽음, 열정의 뜨거움과 해탈의 초연함이 묘하게 하나로 섞이어 막연하게
경계에서 외줄타는 듯이 아슬아슬 경쾌한 떨림

이번 시집을 만든 지난 3년여는 '유마경'을 읽고가 아니라, 읽을수 있는 마음의 상태를 엮은 기간이었다. 자아를 긍정해서 자아를 긍정하는 타인을 만나는 선(禪), 타인을 긍정해서 자아를 비우는 유마경, 이 속사정은 내가 때늦게 유마를 만났기 때문에 체득하게 된 것이다.

'중생이 앓으면 나도 앓는다'는 그 유명한 유마경을 마음두고 있었더니
읽을수 있는 마음의 상태를 따로 엮어야 하는
'때늦게'야 읽을수 있다고 황동규가 일러주네. 넵.

마음을 엮는 것은 누구에게나 삶의 숙제로구나.
고통으로 숨찬 인민의 마음을 엮으려니 어찌 떨리지 않을까.
사는 것이 두고두고 마음 아프다.
 

만항재
 
하늘 한가운데가 깊어져
대낮에도 은하(銀河) 가 강물처럼 흐르는
만항재 늦가을
저 밑 침엽수림들이 물속처럼 어두워지는 것을 보며
바람에 손을 씻었다.
은하 가운데 머뭇대던 구름 한 장 씻은 듯 사라지고
열 받은 차가 하나 서 있다.
얼마나 높은 데 길들이면
자신의 신열(身熱) 들키지 않고
삶의 고비들을 넘을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넘을 수 있는 삶의 고비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위안이다.
아, 누구나 삶의 고비란 바람에 손씻어도 가리기 힘든 신열이구나.
나만 그런게 아니구나.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가슴속에 찬바람이 펄럭이는 것은
길을 가다 주저앉아 울고싶은 마음은


연어의 꿈

새 부리 곰 발톱 인간 작살 간발로 피해
하염없이 물줄기 오르는 꿈을 꾸었다.
모래 속에 파고들고 자갈 사이로 재빨리 기고
상처투성이로
폭포 위로 뛰어오르려다 몇번 떨어지고
숨 고르다 드디어 치고 올라
삶의 처음 시절로 돌아간다면,
청소년 적 갱도(坑道) 막장 같은 짝사랑 새로하고
십육년 전 곡성, 차 몰고 논으로 들어가
땡볕 속에 퀭하니 서서 레커차 기다리고
내린 눈 채 녹지 않고 버티는 길에서
 두 번이나 넘어지며 회현동 옛집으로 올라가
몸과 마음의 상처 연탄난로에 쪼이며
성에가 그려주는 환한 속삭임  다시 들을수 있다면,
지금까지 끄적거려온 글 가운데
마음 한가운데 뿌리박고 있는 것 더러 뽑아버리고
숨통 좀 트인다면,
끝장 연어처럼 몸 안팎 사이의 막 터지고
속에 있던 녹색 적색 찬란한 색깔들 밖으로 헤집고 나와
삶의 끄트머리 한번 겁나게 달궈주지 않을까?
물강에 널브러져 새들에게 속 다 보이고
물속의 맹물이 되기 전.

삶이란 마지막 숨까지 찬란한 것이다.
침묵하고 움츠리고 취해 있을 때조차 삶이란
벼랑끝 허공으로 팔뻗은 풀처럼, 잘도 뚝 끊기는 풀잎처럼
황동규의 시가 좋다.

고통일까 환희일까?

'요즘 멜 깁슨이라는 자가 만든
그대의 수난 영화가 가히 엽기적이라던데.
지금꺽 나는 그대가 고통보다는
환희의 존재라고 생각했지.'
불타가 입을 열자 예수가 말했다.
'이른 봄 복수초가 막 깨어나
눈 속에 첫 꽃잎 비벼 넣을 때
그건 고통일까 환희일까?'
'막 시리겠지.'

참 이상하지.
고통일까 환희일까, 막 시리겠지. 설레임이고 서러움인데 더 날것의 에너지,
막 시리다는 말에는 성적인 욕망의 느낌이 있다.
불타와 예수의 대화가 젊어 뜨겁다.
안타까워라.
황동규의 시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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