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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미터 - 너와 내가 닿을 수 없는 거리
임은정 지음 / 문화구창작동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더 힘들거라고요. 지금보다 더 힘들거라고요. 이보다 더 힘든 건 없다, 이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더 힘든 상황이 올 거라고요. -아내에게 버림받은 강찬에게 찬강이 위로를 보내는 장면. p.188
'연리지'라는 영화를 텔레비전에서 본 적이 있었다. 결국 본인에게는 여자가 죽고 남자가 질질 짜는 3류 영화에 불과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둘은 정말 지독히 서로를 필요로 했다. 결국 죽어가는 여자에겐 살아가는 남자가 필요했고, 살아가는 남자에겐 죽어가는 여자가 필요했다. 연리지처럼 뒤엉켰다가 수액을 철철 흘리면서 떨어졌기에, 그들은 진짜 아픔을 겪을 수 있었다. 결국, 영화 속 그 커플들은 서로를 이용해서 진정한 고통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들보단 행복하게 되었다. '사랑한다면 연리지처럼..'이라고 자신의 어느 칼럼에 제목을 붙인 나무의사가 있었다. 사랑도 결국 사람이 만들어내기에, 그렇게 이기적이 되는 것일까.
일단 이 소설을 보면서 가장 먼저 들었던 느낌은, 오한이었다. 작가는 혹시 어떤 남자를, 아니 어떤 남자와 같이 자신마저 식물인간처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면서까지 그렇게 꽁꽁 묶고 싶었던 것일까. 거리는 1미터 남겨둔 채, 감정과 생각을 텔레파시처럼 나눌 수 있지만 몸은 1미터를 앞두고 떨어져 있는, 하지만 '그 거리에서 일밀리미터도 멀어질 수 없는' 남자와 여자. 강찬과 찬강. 서로 뒤바뀌었으면서도 같은 이름마저 너무나.. 도착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서로에게 사랑을 느끼고,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기꺼이 나무가 되기를 선택한 그들의 아름다운 사랑엔 그저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몸이 연결되어 있어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느낄 수 없어 안타까워하는 연인들이 이 세상엔 얼마나 많은가. 하루만이라도 특정한 다른 사람의 시점에서 세상을 볼 수 있다면, 모든 걸 바치고 싶어하는 사람이 본인 말고도 더 있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으면서 불행의 극치를 달리는 그들에게 알 수 없는 질투심을 느끼는 독자들도 분명히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내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커플이 있었으니, 바로 소연과 상혁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를 있는대로 뿌려댈테니, 양해해주시길.
소연은 말 그대로 '상처입은 짐승'같은 캐릭터이다. 그녀에게 반한 자원봉사자 상혁은 끊임없이 그녀에게 구애를 하지만, 그녀는 심한 말을 하면서 매정하게 뿌리칠 뿐이다. 책을 읽으면서 그녀에게 너무나 화가 났었다. 그러나, 책을 천천히 곱씹으며 읽고나서 본인은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그것은 내 이야기였다. 상처입어가는 과정도, 성격도 완전히 다르지만 그건 확실히 내 모습이었다. 싹싹하고 일처리에 능숙한 간호사캐릭터는 아니지만 간호조무사를 배우고 있고, 남자에게는(특히 좋아하는 남자에게는) 무섭게 쏘아붙이는 내 모습은 한 마디로 위선적이고 역겨웠다. 소연은 결국, 상혁이 싫은 게 아니라 자신이 싫어서 스스로를 파괴한 것이었다. 소연은 자신의 속에서 치밀어 올라오는 그 불덩어리를 견디지 못해 좋아하는 사람에게 안심하고 풀어놓은 것이었다. 그 마음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공감할 수 있었다. 결국 상혁은 끝내 그녀의 신호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녀의 분노가 무서워서 숨어버리고, 소연은 뒤늦게 자신의 마음을 깨달아버린다. 그들은 결국 몸으로는 하나가 되지만, 마음으로는 하나가 되지 못했다.
소설이라서 어쩔 수 없었을 테지만, 좋아하는 사람의 아이가 생겼다고 해서 그 분노가 그렇게 쉽게 풀어질 수 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정녕 그녀가 자신의 마음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원한을 풀고 새 인생을 시작하려면, 요양원을 떠나야 했다. 상혁과 상혁의 어머니가 있었을 때, 자존심이고 뭐고 무릎꿇고 싹싹 용서를 빌어야 했다. 설령 자신이 요양원에 남더라도 아이만은 요양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줘야 했다. 그 아이가 무슨 죄가 있길래 죽어가는 사람들이 가득한 요양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한단 말인가? 결국 그녀는 마지막까지 용기가 없었던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상혁에게는 차마 용서를 빌 용기도 없고, 요양원도 아이도 풀어줄 수 없어서 자신이 다 가지고 가야 했던 것이다. 그 다정함, 그 친절함 속에 분노의 불씨가 아직 남아있으리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뭐 상혁을 볼 낯도 없고 보기 싫다고 하니 방해가 되고 싶지 않은 마음은 충분히 알겠다. 그러나 상혁의 어머니를 만나지 않겠다고 한 그녀의 말에서부터 왠지 나도 심기가 뒤틀렸다. 그녀를 좀 더 용기 있는 여성으로 표현해 줄 수는 없었을까? 이 책의 모든 내용이 다 감동적이었지만, 나는 소연과 상혁의 결말만은 뭔가 잘못되었다고 말해두고 싶었다.
강찬의 이야기에서까지 스포일러를 뿌리고 싶진 않지만, 이 한마디만 하고 싶다. 모든 불행은 인과응보로 인해 생긴 것. 이 책에서는 '권선징악'같은 흔한 스토리를 쓰지 않고서도 그 사실을 아주 서정적으로, 그리고 지독하게 냉정히, 담고 있다. 결국 '용서할 수 없는' 게 아니라, 내가 '용서하지 않는' 것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용납할 수가 없다, 아니, 용납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소연처럼 '어쨌거나 쿨하게', 나에게 그 모든 고통을 가한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